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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눌프 Oct 19. 2019

나를 지탱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를 사랑하는 힘

사회적 동물이라는 용어는 더불어 사는 것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래도 세상은 아직 따뜻합니다’라는 문장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애에 대한 조명을 통해 우리에게 더불어 사는 삶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 우리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바로 타인과의 활발한 소통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착각이다. 대표적인 예를 온라인 세계에서 바로 찾아볼 수 있다. SNS 속의 삶은 우리가 그리는 어떤 이상향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현실의 삶과는 다르게 내가 꾸미는 대로 내 삶이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욕망의 공간이 바로 그곳인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SNS 속 이미지를 사랑하고 그 이미지를 위하여 다양한 투자를 하며 많은 사람들과 온라인상으로 소통을 한다. 때로는 그 세상이 자신의 전부인 것 마냥 살아가기도 한다.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삶이 시작된다.


SNS 사용은 연령에 국한되지 않지만 유독 이 부작용이 강하게 드러나는 연령층이 있다. 바로 청소년이다. 청소년기의 학생들에게 또래집단은 매우 중요하다. 가족보다도 당장 주변의 친구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 시기이다. 친구가 내 모든 세상이 되는 그런 시기. 그래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친구의 머릿수로 매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누군가가 동경의 대상이 되며 그것이 청소년기의 이상향이 된다. 과거에는 일진과 왕따라는 용어가 청소년들을 괴롭혔고 지금은 인싸와 아싸라는 용어가 그렇듯이 과시할 만큼의 친구 수가 없으면 인생을 실패한 낙오자와 같이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이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온라인 상에서 페이스북 친구가 몇 없고, 좋아요 수가 적은 것에 대한 걱정을 쏟아놓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빈번하게 접할 수 있다. 많은 좋아요 수와 댓글이 실제적인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온라인상에서 인기가 많은 친구들을 보며 부러워하며 열등감과 자괴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삶의 모습 실현을 온라인 세상으로만 국한시킨다. 이곳에서의 내 모습이 진짜이고 내가 펼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제한시킨다. 사실상 이 가상의 세계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다. 생각보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그리 많은 관심이 없다.


물론 이 가상의 공간이 각박한 현실에 쫓겨 도피처로 삼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도 있지만 진짜가 아닌 거짓으로 포장된 삶은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이 현실의 삶 속에서 진짜 ‘나’만이 펼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 잠재된 가능성이 펼쳐지기 시작할 때 진짜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온라인 속의 나는 그저 현실의 나를 거드는 존재라는 것을 언제쯤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친구가 세상의 전부인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만들어주어야 할 세상이라는 것은 편리한 자동화 세상이 아니다. 나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개인 생의 가치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을 물려주어야 하는 주체인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타인과의 활발한 소통은 우리에게 분명 이로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소통에 목을 매고 우리의 에너지를 전부 쏟기 시작하는 순간 내면의 공허함이 커져간다. 타인의 작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 받고 온종일 지배받는 삶을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빛나고 찬란하다. 나를 지탱하는 것은 남이 아니라 결국은 나 자신이다. 아무리 서로에 대한 배려와 세심한 신경을 쓴다고 한들 결국엔 타인과 타인이다. 적절한 소통과 대화는 이로움을 가져다주지만 내 삶을 굳건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자존감의 영역과는 또 다른 문제, 자기 존중과는 또 다른 자생력의 영역이다. 자신의 존재를 존중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생을 존중하는 영역이다. ‘존재’를 존중하는 것은 선택과 연결된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생’을 존중하는 영역은 그것보다 좀 더 넓은 의미의 영역이다. 선택과 연결되지 않는다. 개인에게 주어진 생을 온전히 살아가고자 하는 삶이다. 분명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생력이 강한 사람들은 존재한다. 고난은 상대적이라 그 크기를 감히 재단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누군가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의 삶의 신념을 지키며 묵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작아 보이지만 이 세상을 움직이는 아주 강한 힘.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생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타인에게 지배받는 삶을 살고 있는가? 혹은 무분별한 독단주의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자생력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신이 나에게 허락한 전체의 생을 당연하게 굳건하게 살아가는 것, 고난과 아픔을 존재의 가치와 연결시키지 않고 구별하고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자생력이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도 그럼에도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지배와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마음속에 묻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생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 상처를 꺼내놓고 이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 줄 수 있을지 계속해서 고민해 보고 적용해보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들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내 상처를 치료하는 주체를 타인으로 두어서는 절대 안 된다. 나는 타인에게 지배받고 휘둘리고자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내 삶을 존중하고 나에게 주어진 생을 사랑하자. 나를 넘어뜨리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며 나를 일으킬 수 있는 것도 나뿐이다. 나를 지탱하는 힘은 온전히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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