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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눌프 Sep 29. 2019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 속에서

 누구에게나 삶은 처음이다

삶은 언제나 꿈과 동행한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가져다주는 것과 같은,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꿈이든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절망적인 꿈이든 우리 인생은 꿈과 뗄 수 없다.


대개 꿈은 인생을 살면 살수록 희미해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와는 반대로 꿈은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꿈이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하고 손에 잡지 못한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다. 꿈은 곧 현실이다. 꿈은 꾸기 때문에 꿈이 아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생각만 하며 단잠에 취해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허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행복한 허상이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꿈은 깨어야만 꿈이 된다. 허상에서 벗어나 현실과의 괴리감을 경험하기 시작한 순간이 ‘진짜’ 꿈의 시작이다. 꿈이 우리의 인생에서 점점 선명해지는 순간이다.     


나는 공상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생각하며 행복과 기대감에 젖어있었다. 현실은 암담했지만 행복한 상상에 빠져있을 시간만큼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단잠에 빠져있는 만큼 그 잠에서 깨어난 이후의 시간들을 보내는 데에는 매우 소홀했다. 내 정체성에 대한 혼돈이 찾아왔다. 나는 공상 위를 걸어가는 사람인가? 꿈을 깬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가?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 가운데에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이 있다. 꿈을 크게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리는 있는 말이다. 어느 정도 노력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에게 꿈을 크게 가지면 그 꿈을 반드시 이룬다며 확실하게 보증을 서줄 이는 없을 것이다. 꿈의 결말은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공평한 것 같지만 또 공평하지 않아서 행복한 이상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누군가에게 반드시 행복한 결말을 주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꿈을 크게 가져서 성공한 사람들은 몇 없다. 인간은 꿈을 크게 가질수록 이상과의 물리적 거리감에서 멀어진다. 단잠에서 깬 뒤에 보이는 현실의 실망감이 괴리감이라는 것을 데려 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네 장래희망이 뭐니?”라는 단골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굳이 꿈을 꾸지 않아도 난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당연히 될 수 있다는 어떤 순수함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곧 꿈에서 존재하는 나와는 다른, ‘현재의 나’에 대한 확신에 더 가까운 이야기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 허황된 상상에 젖는 것도,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도 아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현재의 나에 대한 확신이다. 그래서 꿈은 곧 나 자신이다. 현실도 나 자신이다. 꿈과 현실은 곧 지금 숨 쉬는 나 그 자체이다. 꿈을 꾸는 것도 현실을 살아가는 것도 결국엔 나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절망스럽다며 나를 포기하지 말고, 꿈에 닿지 않는다는 초조함으로 나를 미워하지 말자.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모조리 접으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행복에 젖은 기대감은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며 그 기대감으로 지금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누군가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꿈꾸며 그 꿈에 막연히 취해있는 것보다 현실 속 지금의 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은 인간을 결코 나약한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 인간이 나약함을 경험할 때는 신 앞에 섰을 때뿐이다. 삶에 치여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특별한 능력이다. 그런데 신 앞에서 경험하는 나약함을 제외하고 인간이 유일하게 나약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확신이 없을 그때이다.


이것이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 현실 속 나에 대한 확신이 더 중요한 이유이다. 나를 믿어주는 것, 말로는 쉽지만 마음에서는 참 어려운 일. 그럼에도 나를 믿어주는 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육신의 탄생이 아주 작은 세포로부터 시작되듯이 인간 삶의 흐름은 아주 작고 소박한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상쾌한 공기, 눅눅한 비의 냄새, 젖은 흙의 감촉, 향긋한 커피의 향, 바람의 온도, 따뜻한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포근함. 이 땅에는 내가 이름 붙이고 경험할 수 있는 무한히 많은 자원이 존재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태초의 첫 인류인 아담은 생물들에게 손수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신이 이 생명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 하는 임무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존재에게 의미를 담는 일, 자신만의 의미를 담아 내가 경험하는 삶의 많은 존재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 그것으로부터 삶의 흐름은 또다시 새롭게 시작된다. 우리 모두는 삶을 처음 경험하는 아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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