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연습
소통의 부재와 소통의 필요가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특이하게도 오늘날 ‘소통의 부재’라는 주제는 지난날 이기주의와 공동체성으로 나뉘던 문제와는 별개의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태도보다는, ‘당신에게 피해 주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나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는 문제에 더 가까운 것이다.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는 외로운 것’이 오늘 우리의 상태를 가장 잘 이야기해주고 있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모든 이들이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루의 삶을 개인의 시간과 타인을 위한 시간으로 분류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내 경험에 의하자면, 타인과 함께 있는 시간조차도 내가 존재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건 남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는 시간이 될 뿐이라는 사고방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 타인을 위해 내가 할애하는 일정,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건 그저 버리는 시간이 되었다.
버리는 시간이라고 표현할 만큼 타인과 함께 하는 시간에 이리도 거부감을 느낀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너무 예민한가? 사회성이 뒤떨어지는 사람인 건가? 수많은 질문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답은 간단했다. 나는 인격체로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쓰레기통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간관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 인생은 마음 맞는 소수의 몇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현대의 현명한 관계론’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소수의 몇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수의 몇 사람이 꼭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진짜 관계라는 말로 포장되어 유지되는 그 관계가 자신을 좀먹게 만드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번 마음을 고쳐먹고 ‘나 아니면 누가 들어주겠어’라는 마음으로 성인이라도 된 마냥 품고자 한다. 하지만 그 관계는 유지될 수가 없으며 결국 처음부터 없었어야 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결국엔 혼자가 최고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비단 가깝고 멀고의 문제가 아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또 희생하는 누군가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관계의 질량 보존 법칙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혼자인 것이 마음 편할 수밖에 없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오고 가는 감정의 표현 없이 일방적으로 내뱉는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누군가의 심정을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내가 존재하는 시간이지만 내가 없이 타인의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주고 어르고 달래주는 그 시간들이 얼마나 폭력적인지에 대해서 되짚어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도 늘 되돌아본다. 내가 진짜 관계라고 생각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의 감정 쓰레기통의 역할을 감당하는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에 대하여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들을 해소할 수 있는 물리적인 방법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실천해보는 중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과 같이 내 감정들을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해 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감정들을 사람에게 해소하고자 하는 무분별한 태도를 지양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현명한 관계와 소통을 위한 연습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과의 소통이 필요하지만,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도 소통의 단절을 불러오는 것도 결국에는 나의 몫이다. 아주 미약하여 어떤 영향도 끼칠 것 같지 않은 작은 행위들이 당신 인생의 모든 부분들을 만들어낸다. ‘나는 당신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며, 당신도 나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