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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도 나의 일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by 생활모험가


퇴사 이후 한동안, '성실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루를 허투루 보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빈틈없이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 애썼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하던, 수년간 몸에 밴 회사원의 리듬이 단번에 무너질까 두려웠다. 아이러니하게도 퇴사 직후의 공기는 자유롭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에 가까웠다. 도태될까봐, 게으름에 잠식돼 버릴까봐, 나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그래서 퇴사 후에도 마치 회사를 다니듯 시간을 구획지었다. 하루 일과표를 짜고, 정해진 시간마다 정해진 일을 했다. 오랜 회사 생활 덕에 익숙했던 아침의 체크리스트는 여전히 손에 붙어 있었고, 매일 아침 그날의 할 일을 적어 내려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나하나 실선으로 지우고 빨간 펜으로 브이를 그릴 때면, 작게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거봐, 회사 안 다녀도 괜찮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토닥이며 불안함을 눌러보려 했다. 되도록 9시에 책상 앞에 앉고, 12시엔 점심을 챙겨 먹고, 6시 무렵엔 일과를 마무리하려 애썼다. 출근을 하지 않았을 뿐, 시간의 리듬은 여전히 회사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리스트 하나하나에 붙어 있던 '당연함'에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려고 퇴사했나?
혼자 일하면서도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아니, 이렇게까지 성실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던가?


그동안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나태해질까봐 불안했고, 그래서 늘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 했다. 시간이 비는 걸 견디지 못해 효율만을 좇았고, 멈춰있는 나 자신이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쓰지 못해도 노트북 앞에는 앉아 있어야만 했고, 집중이 되지 않아도 정해진 시간만큼은 책상 앞을 지켜야 했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땐 가볍게 바람을 쐬고 와도 되고, 정해진 루틴에서 살짝 벗어나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하지 못한 일들이 마치 밀린 방학 숙제처럼 마음 한편을 짓누르게 내버려두었다.


회사를 나왔으니 이제는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리듬으로 흘러가도 되는 줄 알았건만, 정작 나는 여전히 회사의 속도와 리듬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매일 대단한 걸 해내야만 의미 있는 하루일까?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은 해선 안 되는 걸까?


나 자신을 너무도 조급하게, 너무도 팽팽하게 쥐어짜고 있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어릴 적 방학 계획표를 짤 때도 쉬는 시간은 짧아야 한다고 배웠고, 성실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시간은 언제나 무언가로 가득 차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긴 시간 동안 '성실 강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체크리스트에 끌려 다니지 않고,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걸. 무작정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시간을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것을.


일이 막히면 잠시 멈춰도 된다. 꼭 목적 있는 일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필요한 휴식이라면 얼마든지 누려도 괜찮다. 약속과 마감을 지키는 선에서, 혼자 일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마음껏 누려도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일이 몰려도 지치지 않는다. 효율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즐겁게 일할 수 있다. 할 때는 몰입해서 하고, 쉴 땐 온전히 쉰다.

그렇게 진심으로 쉬어야, 다시 제대로 일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순간들 속에서조차 유레카는 조용히 우리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 책 『콘텐츠로도 먹고삽니다』 중에서


*본 브런치 스토리는 책 『콘텐츠로도 먹고삽니다』(생활모험가 저/ 소로소로)의 내용을 바탕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콘텐츠로도 먹고삽니다』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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