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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링유리 Oct 13. 2021

2. 숨 가쁜 일상에 쉼표 하나

피렌체에서 만나 제주에서 살고 있어요.

[피렌체에서 제주까지.]


# 숨 가쁜 일상에 쉼표 하나, 이탈리아     


벌어서 세계 속으로 여행하고 살았던 간호사 시절, 나는 버는 족족 여행을 떠났다. 그래서 내 통장은 빈 통장이었지만 이었지만, 경험은 텅 비지 않았고 넘쳤다고 생각한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니 이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해야 한다. 누구에게 손을 벌릴 순 없었다. 병원이라는 응급한 상황들이 바쁘게 돌아가는 곳에서

쉼표 하나는 내겐 여행이었다. 병원 일을 하다 보면 나만의 온전한 쉼이 없었다. 병원에서 하루를 보내면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고 싫지 않기 때문에 그냥 누워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10년 정도를 간호사로 일하면서, 근무시간은 8시간, 너무 바쁠 땐 10시간도 일을 했다. 그 근무시간에 끼니를 제때 먹은 적, 일하면서 화장실을 자유롭게 간 적, 물도 충분히 마셨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인생의 쉼표는 때때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늘 쉼 없이 달렸다. 쉼을 가질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쉼에 필요한 돈도 물론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남들은 국가고시 여독을 풀었지만 나는 바로 신규 간호사로 입사했다. 병원이란 곳은 환자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생명의 최전방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신규 간호사의 자리는 한없이 작을 수밖에 없다. 이제 학교를 갓 졸업하고 막상 임상에 가니 학교에서 배웠던 이론이 중요하지 않았고, 제일 중요한 눈치코치가 더 중요했다. 처음부터 하나씩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복습하지 않으면 내일 되면 다시 백지가 되어버리는 나는 많이 울었고, 울면서 부딪혔다. 선배 간호사가 가르쳐 준 일들을 다음 날 물어봤을 때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꾸짖음을 들었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호랑이 같은 선배 간호사와 같이 근무하는 날에는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상태로 일을 해야 했고, 나 때문에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이 힘들까 봐 페를 기칠 까 봐 노심초사 눈치 보면서 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은 적응을 했지만, 간호사 연차에 맞는 힘듦이 수시로 찾아왔다. 일해온 연차에 따라 다른 사람의 기대도 올라갔기 때문이다. 라떼는 말이야~ 신규 시절 손 차팅 하던 때라 차트 판으로 콕콕 찔림도 당하고, 그야말로 태움(병원에서 괴롭힘을 말하는 단어)을 당했다. 그렇기에 병원 일을 배우며 울면서 간호사 생활을 했었다. 하지만 밖에 나오면 금방 잊어버리는 단순함 때문에 다음날은 울었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출근하고 있던 나였다. 병원 간호사로 하는 일이 솔직히 많이 힘들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었다. 간호사라면 한 번쯤을 울면서 일을 배운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한 번도 안 울어 본 간호사가 있을까? 하지만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많이 울었던 만큼 배운 것도 많았다. 그야말로 태우는 선배 간호사들은 보면서 나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일반화의 오류일 것 같지만 꼭 시집을 안 간 선생님들이 남을 시기 질투하고 혼을 내는 것 같아 나는 제때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병원이라는 곳이 그만큼 일이 생명을 다루고 있는 곳이라 쉽게 일 할 수 없었다. 요즘 슬기로운 의사 생활 드라마를 보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감정이입돼서 보게 된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따뜻한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많이 있었더라면 의료 현장에서 이렇게 태움으로 간호사가 자살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도 한쪽으로 들기도 했다. 나 또한 저렇게까지 따뜻한 마음으로 후배를 대하고 환자를 대하지 못한 것에 반성도 했다. 이렇게 힘든 간호사 생활의 전환은 딱 하나 여행이었다. 간호사로 일하며 틈틈이 많이 여행을 떠났다. 그야말로 벌어서 세계 속으로 여행하는 간호사였다.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고, 갔던 곳도 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간호사로 일하면서 갈 수 없었던 곳이 남미였다. 물론 짧게 10일 정도로 한 나라씩 다녀올 순 있지만, 가는 비행시간이 길어 나라에 머문 시간이 짧아 쉽게 갈 수 없어 마음속 깊이 남겨두었다. 그러던 어느 나이트(밤 22시~ 아침 8시) 근무 중이었다. 내 담당 환자가 컨디션이 괜찮아져 정말 다행이었고 그렇게 된 김에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어르신께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 있으세요?”라는 질문에 바로 들려준 대답은, “많이 놀지 못한 것” “젊을 때 더 많이 여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많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하셨다. “돈도 다 필요 없어”라고 말씀하시면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많이 즐기라고 하셨다. 많은 환자를 만났지만, 나의 같은 질문에 늘 같은 답변이었다. 갑자기 무언가 내 머리를 때린 것 마냥, 나한테 주어진 시간이 없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오랜 꿈이었던 세계여행을 하면서 지내고 살아보고 싶었다. 10년 동안의 간호사 생활을 그렇게 쉽게 그만둘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며칠 후 사직 면담을 하고 그만두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이제 남미를 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퇴사 후 첫 여행지는 남미가 아닌 이탈리아 남쪽 시칠리아였다.     

그곳이 바로 이탈리아였다.

나는 사직 면담하러 들어가면서 비행기 표를 끊었다.

“인생은 과감한 모험이던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헬렌 켈러 말처럼.. 모험을 시작했다.

그렇게 이탈리아로 떠났다. 물론 계획도 없었다.

누군가는 “왜 또 이탈리아를 가니?” “가보지 않은 나라를 여행하지 그래!”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귀엔 들리지 않았고 무작정 이탈리아로 떠났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영화를 보면서 줄리아 로버츠처럼 정말 나를 위한 여행이 무엇일까..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도 이탈리아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여행하고 많은 것을 느끼는 여주인공처럼 이탈리아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는 여행이 될 수 있기를.. 마침표가 아닌 쉼표가 이탈리아가 되기를 바랐다.

내 여행을 잠시 같이할 휴가를 맞이한 친구와 함께 시칠리아로 향했다. 시칠리아 편 비행기를 타기 전 우리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머물렀다.

크루즈 여행 중인 할아버지들과 함께 대화하게 되었다.

나는 간호사였지만 일을 그만두고 여행 중이라고 설명하니, 나의 여행을 응원한다고 했다. 친구와 나는 퇴사 기념, 휴가 기념으로 샴페인 두 병을 샀다. 하나는 정말 비싼 샴페인을 하나 샀고, 하나는 적당한 가격에 샴페인을 샀다.

유럽 여행하며 마셔본 와인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값이 비싸고 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분위기에 우리는 취해버렸다. 10월이었지만 남부는 따뜻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고, 푸른 바다가 내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의 취중 여행 은 시작되었다. 크루즈 여행 중인 할아버지는 우리가 와인을 맥주처럼 호로록 마시는 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바라봤고, 우리에게 레드와인을 가득 따라주며 천천히 즐기라고 했다. 바다도 보고, 사람도 보고 여유로운 여행을 느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소주나 맥주를 즐겨 마셨지, 와인을 자주 먹어본 적 없는 순천 토박이일 뿐이었고, 그 와인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는 주류인 줄 몰랐다. 포도주스 마시듯 목으로 넘겼으니 말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조금은 부끄럽다. 지금은 나도 와인을 음식과 함께 사람들과 대화하며 여유롭게 마실 수 있게 됐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여행 중에 만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즐기고 늦잠도 자고 즐기면서 여행하고 있었지만, 한국 사람들은 숙제하듯이 새벽부터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며 바쁘게 여행 중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던 사람에게 여행이란 정말 큰 휴식이지만, 이 짧은 시간에 무엇 하나 더 보고, 무엇하나 더 사진 찍고, 기록하기 바쁜 여행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천천히 즐길 수 없었고, 빨리빨리 가 습관이 되어 습관처럼 할아버지가 가득 담아준 와인을 원샷을 했다. 할아버지 친구가 우리에게로 다가오며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또 들고 오셨다. 우리는 한껏 취했고, 그날 저녁은 멋지게 옷을 입고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칼질하기로 했었던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우리의 계획은 하나씩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원래 인생도 계획대로 되지 않아야 즐겁지 않나 싶다. 휴가까지 가서 젊은 남자들이 아닌 할아버지들과 효도 관광 공연처럼 말동무를 열심히 해드렸고, 나는 트로트까지 불러드렸다.

그 덕분에 할아버지들에게 우리나라 트로트를 알려드릴 수 있었다.

인생이 살짝 미쳐야 재미있듯이, 살짝 취해 미치니 이렇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할아버지들에게 맞는 한국 노래를 들려주겠다며 심수봉 러브레터를 간드러지게 불러드렸다. 몸치인 나는 리듬에 맞추어 흔들흔들하기도 했다. 맨 정신이었더라면 절 때 노래도 부르지 않고, 내 몸도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술이라는 것이 이럴 때 보면 참 매력 있는 것 같다. 물론 술은 적당한 것이 중요하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들에게 아주 큰 박수를 받았고, 그 박수의 힘이 그날의 기억이 너무 좋게 남아있다. 하지만 그날 취해서 계단에서 비틀거리다 넘어진 상처도 함께 남아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했으니 이 상처가 아물면 성숙해지기를 바랐던 남부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날 잃어버린 내 금반지는 아직도 가끔 추억 속에 떠올리곤 한다. 할아버지가 빼가신 건 아니었겠지? 하면서..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이탈리아라는 나라는 유럽이라는 많은 나라 중에서 나에겐 가장 친근하고 애정이 가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다.

그 많은 이유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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