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엘라>(Cruella)
영화 <크루엘라>는 통쾌하다. 주인공인 크루엘라(에스텔라, 엠마 스톤) 때문이 아니라 남작부인(Baroness, 엠마 톰슨) 때문에. 1970년대 런던을 주도할 젊은 세대의 대변인으로서 크루엘라는 당연히 영화 속에서 통쾌함을 선사해야만 한다. 그리고 크루엘라는 마땅한 기대치에 적합하게 그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한다. 그런데 크루엘라의 반대편에서 날을 세우는 인물 곧 남작부인이 팩폭을 시전 하며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준다. 크루엘라가 나타나기 전 런던 패션계의 아이콘인 남작부인은 호쾌하고 직설적이고 솔직하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빌런인 듯 빌런 아닌 빌런 같은 그녀. 남작 부인의 위치와 말과 행동 덕분에 영화는 보다 시원해졌고 덜 식상해졌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불의(가 아닌 것으로 영화 끝에 밝혀지지만)의 사고로 엄마를 잃은 고아 에스텔라가 런던의 새로운 패션 아이콘인 크루엘라 드 빌로 변신한다는 스토리. 혼자 남은 에스텔라는 마찬가지로 고아인 재스퍼(조엘 프라이)와 호레이스(폴 월터 하우저)를 만나 도둑질을 하며 생활을 이어가지만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잃지 않는다. 그리하여 리버티 백화점에 취직한 에스텔라는 우연히 당대 패션의 큰손(?)인 남작부인을 만나 그녀의 회사에 들어가게 되고 재능을 펼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남작부인의 정체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에스텔라는 크루엘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 끝내 에스텔라의 장례를 치름으로써 크루엘라는 에스텔라로서의 자아를 죽이고 크루엘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크루엘라는 혈연이 아니라 삶 속에서 마음으로 맺은 인연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에스텔라는 하나의 페르소나다. 백발과 흑발이 반반씩 공존하는 실제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해 그녀가 쓰고 다니는 붉은색의 가발 같은. 이기적이고 반항적인 데다 자기중심적이며 누구보다 튀어야 하는 유별난 성격은 공동체와 사회에 위험하다. 그래서 그녀는 에스텔라라는 수동적이고 겁쟁이인 데다 명령에 순종하는 소심한 소녀로서의 가면을 쓴다. 반면에 크루엘라는 그 본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반항과 자유분방함을 온몸으로 뿜어내며 세상과 각을 세우는 공격적이고 광기 어린 인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크루엘라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상식을 부수고 기성세대에 반기를 든다. 그러나 크루엘라가 휘두르는 파격적이고 화려한 언동은 분명 남작부인이라는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작부인은 영화 속에서 이름이 없다. 그저 "남작부인"으로 호명된다. 결혼을 통해 획득한 지위이자 자신의 패션 브랜드명(House of Baroness)인 동시에 자타(自他)가 부르는 호칭인, 그녀의 전부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누구 부인, 누구 엄마로 호명되었던 것처럼 그녀 또한 그렇게 불린다. 마치 우리의 "사모님"과 같이. 이때 남작부인은 남편의 성을 지우고 그 작위만을 취하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남작부인"이라는 납작한 이름표를 자신의 독특한 캐릭터로 압도하여 그만의 유일한 정체성으로 삼는 데 성공한다. 아마도 남작부인은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단지 그녀가 "남작부인"이라는 누군가의 와이프로 남지 않으려면, 남작에 버금가는 혹은 그를 넘어서는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물불,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여성의 사회경제적 한계를 본다. 즉 여자가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활발히 경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는 말이다. 여성의 성공적인 사회 활동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특정 지위를 획득해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남작부인은 "남작부인"이라는 이름표를 자신의 정체성에 분리 불가능하게 접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권력을 향해 게걸스레 달려들어야 한다. 그저 누군가의 부인으로 남지 않으려면 말이다. 하여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또한 이 덕분에 에스텔라는 남자 친구나 남편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크루엘라로 호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므로 에스텔라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남작부인의 충고는 의미심장하다.
딴 사람은 신경 쓰지 마. 타인은 방해물일 뿐이야. 방해물에 신경 쓰다 보면 패배한다고. 내가 딴 사람을 신경 썼으면, 벌써 죽었어. 뛰어났던 수많은 다른 여자들처럼. 보이지 않는 천재성으로 가득한 서랍과 비통함으로 꽉 찬 심장을 가졌던 그녀들처럼 죽었겠지. 넌 재능이 있어. 문제는 너한테 킬러 본능이 있느냐지.
You can't care about anyone else. Everyone else is an obstacle. You care what an obstacle wants or feels, you're dead. If I cared about anyone or thing, I might have died like so many brilliant women with a drawer full of unseen genius and a heart full of sad bitterness. You have the talent for your own label. Whether you have the killer instinct is the big question.
아무리 천재적이어도 킬러 본능이 모성 본능을 뛰어넘지 못하면 여자는 남자들처럼 성공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남작부인의 과도한 나르시시즘이 밉지 않았다. 크루엘라처럼 "날 때부터 뛰어나고 못됐고 약간 돌아버린"(I was born brilliant, born bad, and a little bit mad) 여자를 남작부인의 세대에서는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유별난 여자를 수용할 여력이 없던 세상 속에서 그녀가 생존하기 위해선 나르시시즘과 이기심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평범과 상식의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미친 여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어떤 희생이 필요하다. 자신의 어떤 부분을 과감히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남작부인은 여성에게 부과된 재생산의 의무를 등지기로 했다. 결혼 후 뱃속에 생긴 아이는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그래서 임신 소식에 기뻐하지도, 출산 후 아이를 품에 안아 보지도 않는다. 그녀는 간단히 고개를 돌리며 아이를 버리라고 말한다. 그 아이를 가엽게 여긴 사람은 다름 아닌 남집사인 보리스(마크 스트롱)다. 이렇듯, 영화는 아주 가볍게 우리에게 익숙한 성 역할을 바꿨다. 자식을 버리는 자와 버려진 자식을 몰래 살려둔 자의 성별 말이다. 오이디푸스를 버린 사람이 아버지인 라이오스라는 점, 또는 모세가 어머니와 누이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남작부인과 보리스의 역할 치환―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죽이라 하고 이 명령을 받은 남자 집사가 그에 불복하여 아이를 살리는 것―은 눈 여겨 볼만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는 다소 충격적이고 일면 속 시원하다. 남작부인은 까놓고 말한다. 아이조차 자신에겐 타인이며 따라서 방해물이 될 조건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모성애는 자궁을 가진 인간에게 반드시 생겨나는 무엇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자궁과 모성애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여자에게 임신이 축복일 수 없듯이. 자궁을 가졌다고 해서, 남작의 부인이 되었다고 해서 당연히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건 남작부인에겐 전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난 남작부인의 뻔뻔하고 충만한 자기애가 아주 매력적이라 느꼈다.
모성애는 없지만 남작부인에겐 카리스마가 있고 권력을 잡고 휘두를 능력이 있으며 기만하려는 상대를 단칼에 무찌르는 기민함이 있다. 게다가 재목을 알아보는 안목과 그것을 적재적소에 이용할 줄 아는 재주까지 갖추었다. 비록 에스텔라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목적이었지만 어쨌거나 그 덕분에 에스텔라는 백화점 화장실 청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에스텔라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남작부인이 베푼 기회 덕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그녀를 사악하고 악랄한 인간이라 비난한다. 이 판단은 모성애의 결핍이라는 단점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물론 남작부인은 빌런이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위법을 저지르고 도덕과 윤리는 가볍게 무시한다. 살인을 하고 그것을 사고로 위장하는 태연함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비슷한 성격과 재능을 가진 에스텔라는 가졌지만 남작부인은 갖지 못했던 기반을 지시하고자 함이다. 에스텔라는 남친 혹은 남편, 아버지 없이도 크루엘라로서 스스로 설 수 있었다. 못생기고 멍청한 남사친들과 집사만으로도 에스텔라는 크루엘라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작부인은 그럴 수 없었다. 재능과 천재성을 겸비했지만 결국 빛을 보지 못하고 아스라이 사라져 버린 수많은 다른 여자들처럼 남지 않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 안의 킬러 본능을 최대한 발휘해야만 했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남작부인은 분명 흉악하고 잔인하다. 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멋있다. 화려하고 우아한 겉모습뿐 아니라 오만방자한 말투,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당당함까지.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거침없이 해내는 여자이기에 멋있다. 그녀의 독설에는 폐부를 찌르는 예리함이 있고 그녀의 독기에는 납득할 법한 시대적 근거가 있다. 그래서 미워할 수 없고 그저 못됐다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평범하다는 말을 치욕스럽게 느끼는 여자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남작부인은 에스텔라에 앞서 체득했다. 그러니 에스텔라의 변신은 남작부인이라는 토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크루엘라의 광기와 반기는 남작부인에게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
그러나 남작부인은 지는 별이다. 그녀의 킬러 본능은 연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의 넘치는 자기애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다. 남작부인이 행한 영광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것이었다. 반면 크루엘라는 주변을 둘러볼 줄 안다. 남작부인만큼이나 독하고 미친 여자이지만 자신의 잠재력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줄 아는 것이다. 에스텔라에게 주어진 환경이 그녀로 하여금 남작부인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했다. 다른 경험은 다른 욕망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크루엘라는 남작부인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지평으로 나아간다. 떠오르는 샛별은 지는 별보다 더 미친 모습이지만, 그것이 발하는 빛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크루엘라의 광기는 세상의 모든 미친년과 돌아이를 향해 있다. 그것이 남작부인과 결정적인 차이점이며, 크루엘라의 다음 행보를 기대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