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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 Nov 16. 2019

[여행일기] 미국의 노신사는 멋져요

정말 오랜만에 온 샌프란시스코다. 가장 최근에 왔던게 몇달 전이더라..? 5개월 전? 반년 전? 아니, 1년전? 정신 없이 비행 하다 보면 이렇다. 내가 여기 언제 왔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데 체감으로는 한 1년전 쯤 왔던 것 같다. (실제로는 한 3개월전 쯤에 왔을 가능성도 있다. 내 기억력이 이렇다. 모든 것이 새롭다.)

캘리포니아의 청량한 가을 바람과 따사로운 가을 햇살. 지금 한창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찔 내 나라 한국의 계절과 비슷해서인지 더 정감이 간다.  
오랜만에 온 미국이라 신이 난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1시,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5시쯤 호텔에 도착해 한숨도 자지 않고 옷을 갈아 입고 튀어나간다. 피곤하기는 하지만 오늘은 놀고 싶은 열정이 피곤함을 이겼다. 붉은 색 옷으로 갈아 입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소매 끝만 살짝 바꿔 입은 나뭇잎들 사이로 비추는 붉은 가을 햇살. 그 아래 12시간의 비행을 마친 내 발걸음은  스타카토처럼 경쾌하다.  
            
내 목적지인 Union square 까지는 걸어서 20분. 도저히 걸어서 갈 자신은 없고 오늘은 샌프란에만 있는 전차 뮤니를 타기로 한다. 생긴 건 그냥 버스랑 똑같은데 전차처럼 전깃줄에 매달려 운행하는 전차 버스이다. 하늘에 얼기설기 보이는 전신주의 전깃줄은 그렇게 보기 싫은데, 샌프란의 파란 가을 하늘에 얽혀있는 뮤니의 전깃줄은 왜 낭만적으로 보일까?

Van ness street에서 뮤니를 타고 목적지인 Union square에 도착해서 내릴 준비를 하는데 나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선 빵모자를 쓰신 노신사가 먼저 내리라며 양보해주신다.
"Thank you" 하고 인사하자 씩 미소를 지으며 살짝 눈인사를 하는 정말 노신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어르신.
한참을 유니언 스퀘어 주변을 구경하다가 날이 어둑어둑해져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이번에는 Sutter street에서 2번 뮤니를 탄다. 이번에도 나보다 먼저 정류장에서 뮤니를 기다리던 노신사 한분이 먼저 타라며 양보해주신다. "Thank you so much" 이번에도 노신사는 살짝 눈인사.

몇주 전 스탠바이에 불려 싱가폴 턴어라운드 비행을 할 때였다. 그날은 이상하게 비즈니스맨들이 많이 탔는데 내 존에 계시던 정장을 잘 차려입으신 서양인 노신사 한분이 진앤토닉을 여러잔 주문하셨다. 그 신사분에게 여러번 진앤토닉을 서빙하고서 한참 뒤, 그가 나를 살짝 부르더니 휴대폰을 쓱 내민다. 그가 내민 휴대폰에는 메모장이 열려있었는데 그 메모장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You have beautiful smile. Your eyes are gorgeous. But I am not heating on you. Can I have one more gin and tonic please? (너 미소가 정말 예쁘다. 눈도 정말 아름답고. 근데 나 너한테 작업 거는거 아니야. 진앤 토닉 한잔 더 줄 수 있니?)' 노신사의 메모장 편지와 연륜에서 나오는 그 센스에 나는 그 자리에서 깔깔 웃었고, 그에게 진앤토닉 두 잔과 그날 비행에서 드릴 수 있는 스낵을 모두 가져다 드렸다.

처음 비행을 시작하고 유럽에 갔을 때 놀랐던 점이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까페에 들어갔을 때, 그 곳에 젊은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자리잡고 계시던 빵모자를 쓰신 노신사 세 분. 나와 동기들이 사진 찍으며 놀자 뒤에서 손을 머리 위로 번쩍 올리고 함박 웃음을 지으신 채로 사진에 찍힌 노신사 덕분에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노인들은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다. 요즘에는 많이 유연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노인과 젊은이들의 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나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텐데 그러면 노인이 된 나는 더 이상 스타벅스가 아니라 학다방이나 파고다 공원에서 친구들을 만나야 하는건가? 그 누구도 "65세 이상 스타벅스 출입 금지"라는 사인을 걸어놓지 않았지만 공공연한 파티션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나이로 인한 벽과 의식 소통의 부재가 사라진다면 세대간 갈등도 좀 줄어들테고, 미국처럼 앞집 노신사랑 친구먹는 일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무조건 미국 문화가 최고야! 라는 건 아니지만 나이를 내세워 권위를 세우기보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배울점이 있으면 기꺼이 배우려고 하고, 개개인으로서 상대를 인정해주고 받아들여주는 그들의 문화는 좀 부럽다.

미국에서도 뮤니의 앞쪽 자리는 노약자를 위해 양보하라는 사인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노인들 스스로가 본인을 약자로 인식하기보다는 아직까지 여성을 보호하고 양보해줄 수 있는 남성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다. 스스로 보호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노신사들. 그분들은 노인이라는 칭호보다는 노신사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그리고, 정말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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