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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 Nov 14. 2019

[여행일기] 카페 프쉬킨의 야디아나


모스크바의 늦여름 하늘은 잿빛이다. 해가 반짝 나는가 하면 어느 새 또 비를 뿌리기도 하고, 덥다 싶으면 어느 새 또 쌀쌀해지고, 변덕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바실리 성당의 화려한 자태에 한참을 감탄하다가 모스크바에서 꽤 유명하다는 까페 프쉬킨에 찾아가기로 했다. 붉은 광장에서 20분 정도 걸어 이렇다 할 간판도, 영어 이름도 없는 긴가민가한 가게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주는 직원에게 “여기가 까페 프쉬킨이 맞나요?” 하고 물어보자 그는 맞다고 대답한다. 드디어 찾았다.

까페 안에 들어서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온통 어두컴컴해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둠에 눈이 익자 차츰차츰 까페 프쉬킨의 고풍스러운 테이블, 의자, 붉은색 커튼이 달린 고전적인 느낌의 창문, 전형적인 웨이터 복장의 턱시도를 입은 직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 뒤쪽으로 앤티크한 괘종시계가 있고 우리가 그 쪽에 앉은 때문인지 웨이터 한명이 연신 시계를 돌려가며 오르골에서 나는 음악 같은 시계 소리를 들려준다. 오리 콩피와 소고기 요리를 시키고 와인을 한잔씩 곁들인다. 촛불 모양의 백열등 몇 개로 밝히고 있는 고풍스럽고 고전적인 까페에 앉아 오리 콩피와 와인을 함께 하고 있자니 내가 마치 안나 까레니나가 된 것 같다. 검은 벨벳 드레스에 빨간 새틴 허리띠를 하고 있었으면 완벽 했을텐데.

그 때, 조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기 시작했다.  늦여름 러시아 하늘빛 눈동자를 가진, 작고 깜찍한 원피스를 입은 귀여운 여자 아이였다. 하얀 타이즈를 신고 그 작은 발에는 검은 메리제인 구두를 신었다. 머리도 단정하게 땋아내렸다.

어차피 나는 러시아 말을 못하고, 아이는 영어를 못한다. 나는 그냥 한국말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참 예쁘다. 이름이 뭐야?” 아이는 낯을 가리는지 한참을 무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는 부모님이 있는 자기 테이블로 돌아갔다.

잠시 후 아이가 다시 왔다. 이번에도 무표정으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한다. 보통 낯을 가리는 아이는 낯선 사람한테 아예 오질 않는데, 이 아이는 신기하게 와서 쳐다만 보다가 간다. 동양인이 신기한가? 그러고 보니 모스크바에서는 동양인을 거의 못본 것 같다.

그렇게 몇 번을 왔다갔다 하며 쳐다만 보던 아이가 이제 우리가 익숙해졌는지 갑자기 입이 터져 러시아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를 가리키며) 나는 리앤, (친구를 가리키며) 내 친구는 애슐리, (아이를 가리키며) 너는 이름이 뭐야?” 라고 묻자 아이는 “야디아나” 라고 또박또박 대답한다.
이번에는 “(나를 가리키며 손가락으로 숫자를 만들면서) 나는 32살, (친구를 가리키며 또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친구는 31살, (아이를 가리키며) 너는 몇 살?” 하고 묻자 아이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러시아어로 크게 외치는데 “세살이에요!” 하는 것만 같았다.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함께 완벽한 대화를 나누던 귀여운 야디아나는 그렇게 한참을 우리 테이블과 자기 테이블을 오가며 놀다가 어느새 식사와 담소를 마친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까페 프쉬킨을 떠났다. 우리도 곧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데, 모스크바의 하늘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잿빛 하늘색 눈동자의 야디아나가 생각나 여러 번이고 미소가 슬며시 지어지곤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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