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자호, 만천명월주인옹
조선 시대 가장 존경하는 왕하면 많은 분들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애민정신으로 나라를 다스린 세종대왕을 떠올리실 것 같은데요, 저는 정조대왕을 제일 존경합니다.
물론 세종대왕도 엄청난 업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성군으로 꼽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세종대왕의 탄생일을 5월 15일 스승의 날로 정할 정도로 우리 민족의 스승이시죠. 그런데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이라는 엄청난 후광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태종이 탄탄대로를 닦아놓아서 별다른 걱정 없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조는 모두들 아시는 바와 같이 할아버지 영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하는 임오화변을 겪습니다. 11살 어린 나이의 정조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분명 정조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아있지 않았을까요.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선 인물들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어린 시절 정조를 끊임없이 감시를 하고 심지어 즉위 1년도 안 된 시기에 자객을 보내 정조 시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정유역변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실제로 정조가 즉위하는 첫날 첫마디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습니다. 정조의 이 한마디에 사도세자와 정치적 대립을 보였던 노론 대신들은 두려움으로 벌벌 떨었겠지요.
이제 왕이 된 정조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복수와 포용이 정조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입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조정에 피바람이 불게 하여 복수의 카드를 선택했다면 지금까지 성군이라 불리지 않았겠지요.
정조는 포용을 선택합니다. 놀랍게도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 노론까지 포용하는 탕평책을 펼칩니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숙적들을 제거하기보다 포용하고 끌어안는 지혜로움을 선택한 것이죠. 정조가 복수 대신 포용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위해야 하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조는 오직 백성을 위하는 왕이라는 자신의 역할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군주민수 君舟民水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
백성을 임금을 떠받들지만 임금이 잘못하면 백성들이 임금을 끌어내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군주민수를 정확히 이해한 왕이 바로 정조입니다. 정조는 군주민수와 연결하여 자신의 철학이 담긴 자호를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이라 지어 창덕궁 후원에 있는 존덕정 현판에 걸어두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정조가 자신의 글을 모아 엮은 문집인 홍재전서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요,
만천이란 한자 그대로 만 개의 시내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 시내란 작은 시내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8도에 있는 모든 물길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민수民水, 즉 백성을 말합니다. 명월明月은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을 의미하는데 밝은 달은 군주를 의미합니다. 결국 만천명월이란 우리 땅에 있는 수많은 천을 고루 비쳐주는 밝은 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이
어느 천은 작은 것이기에 작게 비추고
어느 강은 큰 것이기에
더 많이 비추어서는 안 된다.
군주가 힘 있고 돈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주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서민들에게는 적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조는 더 나아가 만천명월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천이 흐르면 달도 흐른다.
천이 멈추면 달도 멈춘다.
천이 고요하면 달도 고요하다.
그러나 천이 소용돌이치면
달은 이지러진다.
즉,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물과 함께 흘러가 그 물이 고요할 때는 같이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천이 계곡을 만나거나 불규칙한 지형을 만나 소용돌이 치면 달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모나거나 찌그러진 모습으로 제 모습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거센 물결로 배가 뒤집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군주와 명월, 민수民水와 만천萬川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생각이고 이런 생각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군주민수 君舟民水와 만천명월주인옹 萬川明月主人翁를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한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개혁 군주가 바로 정조입니다.
현재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 땅의 리더들은 정조가 삶으로 보여준 군주로서의 자세를 이어받아 정조의 자호 만천명월주인옹을 곁에 두고 자주 보아 각인해서 올바른 리더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