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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형 Oct 05. 2024

아버지의 유훈대로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아가다

견금여석見金如石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 최영 장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사실 이 말은 최영 장군의 말씀이 아닙니다. 고려말 최고의 명장인 최영 장군의 말씀으로 알고 있는데 최영의 아버지인 최원직의 유훈입니다. 최영이 아버지의 유훈대로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았기에 우리가 이 문장을 들으면 바로 최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최영이 살았던 고려말은 뇌물을 받거나 권세를 이용해 백성들을 괴롭혀 땅을 빼앗는 권문세족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시기였습니다. 최영은 73년 평생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강직한 모습을 보이며 고려의 충신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버지의 유훈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최영은 고려의 명문인 철원 최씨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5대조인 최유청은 재상까지 지낸 인물로 무신정변 때도 덕망을 인정받아 화를 면한 문신입니다. 반면에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은 높은 관직이 아닌 종6품인 사헌규정에 그쳤지만 강직하고 청렴했습니다. 

최영은 어릴 적부터 견금여석 즉,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이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서 허리띠에 견금여석見金如石 네 글자를 써서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최영은 우왕 시기에 시중의 자리까지 오르지만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재물을 탐내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당시 많은 권문세족은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의 규모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최영은 겨우 밥을 먹고 지내는 정도였습니다. 

당시 높은 관직에 있는 자들은 서로 집으로 초대하여 바둑을 두기도 하였는 데 이 때 진수성찬을 마련하여 대접하면서 누가 더 손님상을 잘 차려내는 지 자랑하였다고 합니다. 최영이 대접할 차례가 되어 손님들을 초대하였는 데 점심 때가 훨씬 지나도록 음식상을 내지 않다가 저녁 때가 다 되어서 잡곡밥과 나물 반찬 뿐인 상을 내놓았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손님들은 배가 고팠던 터라 최영 장군네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칭찬하며 먹었다고 합니다. 이에 최영은 이 또한 용병술이라고 웃으며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처럼 최영은 청렴하고 강직함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고려 말 최고의 명장이었습니다. 이색의 <목은집>에 따르면 최영은 87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했는 데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최영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나이인 30대 중반이 되고 나서야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습니다. 공민왕 때 왜구가 출몰하던 시기부터 최영의 명성이 높아집니다. 공민왕 이후 우왕이 즉위한 후에도 고령의 나이였지만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특히 왜구를 물리친 홍산대첩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왜구의 화살을 입술에 맞았지만 최영은 당황하지 않고 입에 꽂힌 화살을 뽑아서 그 화살로 자기를 쏜 왜구를 맞추어 죽였다고 합니다. 이 용맹한 모습에 왜구들은 고려에서 가장 두려워할 자는 흰머리 최만호(萬戶 무관 관직)라는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87전 87승에 빛나는 최영은 딱 한 번 패하는 데 바로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군대와의 마지막 결전이었습니다. 최영은 70이 넘은 나이와 이성계가 남기고 간 오합지졸을 거느리고도 이성계와 함께 회군한 조민수 부대를 막아내지만 얼마되지 않은 병력으로 수만 명의 이성계의 군대를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성계가 개경을 점령한 뒤 최영은 체포되고 이때 이성계가 최영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은 내 본심이 아닙니다.
 
나라가 불안해지고 백성이 고통을 겪어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에 
부득이 일으킨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시오. 
잘 가시오.


이때 최영은 언젠가 이인임이 이성계가 왕이 되려 한다는 말을 믿지 않은 것을 탄식했다고 합니다. 최영은 유배됐다가 불려와 국문 받기를 반복하다 처형되는 마지막 순간에도 낯빛이나 말씨에 흔들림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최영은 이렇게 유언합니다.


만약 내가 평생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그의 묘는 관리를 잘하여 풀이 잘 자라고 있지만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실제로 최영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그의 묘를 적분(赤墳)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최영의 인품과 업적을 알기에 그가 사망했을 때 백성들은 정말 많이 슬퍼했습니다. 개경 상인들은 시장을 열지 않고 소식을 들은 아낙네와 시골의 아이들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의 주검을 거리에 내다 버렸는데 그 곁을 지나던 길손이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면서 존경을 표시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최영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가진 고려 최고의 무장으로 고려의 국운이 그의 손에 달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가 무너지면서 고려 또한 망국의 길로 향해 갑니다. 






종종 잊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나긴 우주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삶은 두 어둠 사이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작은 틈“이라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이 찰나의 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합니다.

이 고민의 해답을 바로 최영의 삶에서 찾아봅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문장대로 청빈하고 꼿꼿하게 한 평생을 보내고 최후의 순간까지 언행일치의 모습을 보이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던 그를 보면서 내가 평생 품고 행동으로 옮겨야 할 문장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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