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 없는 편안한 삶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엄마, 내가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인지 알게 됐어.”
2년 전, 고3 여름방학 동안 기숙학원에 다녀온 딸아이가 돌아와서 맨 처음 한 말이다. 기숙학원에서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생각하며 남은 고3 생활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모든 시간과 이성에 대한 호기심마저 통제되고 있는 편치 않은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딸아이가 느낀 것은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이가 경험했던 작은 불행이 삶의 행복을 깨닫는 약이 되었다. 동기부여와 성적 상승에 초점을 두고 기숙학원을 선택했는데 인생의 비밀과 같은 더 큰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 딸아이가 대견했다.
잊고 있었던 딸아이와의 대화가 생각난 건 이번 주 독서 모임에서 읽은 양귀자 작가의 <모순>이라는 책 덕분이다. 안진진이라는 스물다섯 살 여성 화자가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일란성쌍둥이지만 극명하게 대조되는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어머니와 이모는 안진진의 롤모델이자 삶의 기준이다. 남편의 폭력과 가출, 감옥에 갇힌 아들과 같은 끊임없는 불행 속에서 살고 있는 어머니. 반면, 능력 있고 자상한 남편과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녀를 두고 있는 이모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완벽한 행복 속에서 살고 있다.
안진진은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낭만적이지만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 김장우와 이모부와 비슷하게 지루하지만 꼼꼼한 인생 계획표를 가진 유능한 남자 나영규 사이에서 갈등한다. 경제적으로 무책임하고 어머니에게 폭력적으로 대하면서 가출까지 일삼는 아버지였지만 안진진에게는 낭만적인 추억을 갖고 있는 아버지였다. 안진진은 그런 아버지와 닮은 남자, 야생화를 찍는 사진작가 김장우에게 사랑의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만, 더욱 바빠졌고 나날이 생기를 더해 가며 세상 속에서 사는 일에 대해 철인의 무사가 되어갔다. 반면, 이모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불행이 없는, 무덤 속처럼 평온한 삶을 살지만 그 속에서 무의미함과 권태를 느끼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지루해 죽겠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이모의 자살은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당황스러운 전개에 소설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인 핍진성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었다. 소설은 작가가 창조한 이야기지만 현실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야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부분에서 나는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이 소설이 허구처럼 느껴졌다. 행복의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모가 무언가에 열중하면서 인생의 부피를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충분했지만 그저 유학 간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기념일을 챙겨주는 남편을 지루하게만 느끼며 왜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독서 모임 선배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공감 능력 혹은 현실 감각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녀가 성장하여 독립한 후, 부모가 느끼는 슬픔, 상실감, 외로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인 빈 둥지 증후군을 예로 들며 엄마 역할이 갑자기 사라져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그로 인한 우울증으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선배님들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실제로 출가한 자녀와 혼자서 골프를 즐기던 남편 때문에 의도치 않게 혼자 있던 시간이 많았던 한 선배님의 지인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에 현실도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던 안진진의 선택도 나의 예상과 달랐다. 지루한 남자와 살았던 이모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걸 보았다면 자신에게 지루하지 않은 남자였던 김장우를 선택했을 것 같지만 안진진의 최종 선택은 나영규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고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결국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결정하는 문제라고 안진진은 말한다. 자신에게 없었던, 결핍이 적어 보이는 삶을 살기 위해 나영규를 선택한 안진진의 결론이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어머니의 불행하고도 행복한 삶. 그리고 행복하지만 불행하다 느낀 이모의 삶에서 느낀 모순은 안진진을 더 성장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작은 불행에서 행복을 깨달았던 딸아이처럼 행과 불행이 적당히 섞여 있는 삶이야말로 사는 것처럼 사는 삶이었다. 결핍 없는 편안한 삶은 행복의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행복은 아니었다. 진정한 행복은 단순히 결핍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적인 상황 자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나만의 삶을 살아가면서 주체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행복만 있다면 그것이 행복인 줄 모르고 지루해서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실수하고 실패하고 결핍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