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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연속

굿럭투유, 앤 미

by 이븐도





언제 끝나요. 골수검사를 위해 처치실로 빼놓은 베드에 누운 소년이 물었다. 두려워 보였다. 사실 좀 많이. 무서워요? 물으니까 아니요,라고 얼버무렸다. 근데 표정에는 그렇게 써 있었다. 나도 두려웠다. 혹시 잘못될까 봐. 물론 나도 무서워,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빠뜨린 거 없겠지.

아홉 시 반까지는 검체를 전달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끝나야 하는 게 맞다. 엄마, 나 학원 갈 수 있나? 몇 시에 가셔야 하는데요? 일곱 시쯤? 그럼 괜찮아요. 아무리 늦어도 오후 중으로는 퇴원하실 거예요. 세 시 반에 PET도 예정되어 있었다. 아빠 일찍 퇴근한다잖아, 데려다 달라고 해. 저녁 뭐 먹을 거야, 장어 먹으러 가자. 장어, 학원, 이른 퇴근.


나는 암이나 그 비슷한 것을 이유로 입원해 본 적 없지만 아무튼 무섭기는 하겠지. 혈액종양내과 교수와 전담간호사들이 들어오고 진정제를 투약하고 산소포화도가 안 떨어지는지 지켜보고 중간중간 움찔거리면 약을 한 번씩 더 줬다. 국소마취제를 잔뜩 주사하고, 담당의는 손잡이가 검처럼 생긴 두꺼운 바늘을 뼛속에 박아 골수를 뽑는다. 검체가 슬라이드 사이에서 붉게 번졌다. 검사도 접수도 별문제 없이 끝났다.


정말 장어를 먹으러 갔을까. 양념이었을까 소금구이였을까. 학원은 영어였을까 수학이었을까. 아빠까지 셋 또는 넷이서 저녁을 잘 먹었을까, 궁금했다.




잠시 코끼리였던 그는 보통의 고등학생으로 돌아왔다. 2학년 2반. 사는 곳은 곤지암.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때는 제2 외국어로 말할 경황이 없었던 것뿐.

가장 큰 사이즈 환자복을 입고, 기저귀는 진작 뗐고, 구부정한 자세로 고양이가 인쇄된 케이스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폴대를 끌고 복도를 걷는다. 수액 폴대 안에는 생수가 든 하늘보리 페트병과 이어폰이 들어 있다.


당시 하도 오랜 시간 쳐다보고 있어 얼마간 눈앞에 선명했던 귀 부근의 눌린 자국. 역시나 원래 안경을 쓰는 애였다. 샤워하고 싶으니 수액 떼 달라는 말을 하고 아버지는 나를 보면 꾸벅 목례를 한다. 항바이러스제는 이제 안 들어간다. 죄다 주사로 들어가던 항경련제는 먹는 것들로 바뀌었다. 너 나 기억나니? 했더니 고개를 끄덕, 한다. 내가 뚱뚱하다고 유일하게 놀려댈 수 있는 인간인 남동생의 몇 년 전 모습이 떠오른다. 꽤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애들은 보호자와 함께 바나나킥과 양파링과 자갈치와 칸쵸와 손바닥만 한 주스를 사 가지고 온다. 지하의 편의점으로 가는 게 입원 생활의 별미 같은 거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먹고 싶다, 과자. 하츄핑과 핑크퐁과 산리오의 인기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아직까지는 건재한 것 같다. 사 온 것들에 들어 있던 스티커, 또는 스티커북, 피규어가 든 초콜릿이나 사탕. 장난감들. 낡아빠진 인형. 빛이 바랜 베개. 알록달록한 범퍼 케이스가 씌워진 태블릿, 영어 동요.


그들이 집에서 가져온 것들이, 입원 전의 취향과 생활이 보이는 물품들이 병상 한구석이나 침대 전체에 어질러져 있을 때, 이상한 안정감이 든다. 내 것도 아닌데. 그 일상의 흔적들에서 구태여 편안함을 찾게 된다. 왜지. 귀여워서? 애들이니까? 애들이 아니라도 그렇다. 문제집을 풀거나 숙제임이 분명한 뭔가를 끄적이는 다 큰 그들을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짜증과 분노가 잔뜩 차오르다가도 커튼을 열어 그 광경을 보게 되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변화가 싫다. 안정적인 게 좋고 뭐든 좀 안 변했으면 좋겠다. 변한다면 좋은 쪽이었으면 좋겠지. 살이 빠진다거나, 습도가 낮아지고 미세먼지가 옅어진다거나, 컴백이나 콘서트의 간격이 짧아진다거나, 엄마아빠의 노화가 더뎌진다거나, 월급이 오른다거나, 하는 쪽으로. 병원은 긍정적인 방향의 변화와 거리가 멀다. 어떤 좋은 말로 포장하려 해도 입원이나 검사 등은 부정적인 경험에 더 가깝다.


오전 내내 실사화 히컵과 투슬리스와 백설공주를 보며 감탄하는 동안 병동에는 진짜 백설이가 내려왔다. 다른 게 있다면.. 노란 치마 드레스도 안 입었고 사과가 아닌 돼지갈비뼈가 목에 걸린 거였고, 트루 럽의 뽀뽀를 받는다 해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점들이다.

하나 더. 거동을 못 해서, 못 하게 되어서 중환자실에서 병동으로 온 지 4일 만에 시뻘건 욕창이 생겼다. 열여섯 살.

보호자는 그녀가 교복을 입고 말하고 돌아다니던 장면에서 이 새로운 일상에 적응을 못 한 것 같다. 매시간 무조건 자세를 바꿔 줘야 하는 생활 패턴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못 하겠으면 도와 달라고 하자,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생각하며 출근했었다. 이제는 내가 도와 달라고 말할 사람이 딱히 없다. 그나마도 있던 고연차들은 다른 병동으로 갔고, 중간 연차에서 고연차로 넘어간 그들은 점점 일을 미룬다. 인퓨전 펌프 소리가 나든, 저편에서 누가 오든, 전화벨이 여기저기서 울리든,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사람들인 것처럼 한두 박자씩 느리게 반응한다. 그들이 그렇게 일해도 병동이 어찌저찌 굴러가기 때문일까. 아무튼 좋지 않다. 출근하기 싫다. 뭐 언제는 출근이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싶긴 한데 비슷하면서 다르다. 부정적인 변화다. 같이 일하면 짜증이 난다.


모른 척 앉아 있다가 나나 저연차가 일어나면 내가 할게, 하고 움직이는 모습. 일을 다 해 놓으면 아아, 고마워어, 하고 멋쩍은 척. 나는 좀 더 잘 웃는 법을 연습해야 할 것 같다.

정말 도움을 요청하려면 그 코끼리 소동 정도의 난리통이어야 한다. 그런 규모가 아니면 이제 나는 일손을 구할 필요가 없거나, 내 일이 아닌 것까지 끌어당겨 굳이 일해도 어떻게든 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힘에 부치는 건 똑같은데 여하간 그렇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왜 나는 일상이 매번 같은 모양으로 돌돌돌 굴러가는 구슬 같은 거라고 느꼈을까. 그런 건 없는데.

일상은 차라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이러스였다. 죽지도 않고 그 몸집의 어딘가를 문틈과 신발 밑창으로 스며든 빗물처럼 침입해 잔뜩 깔렸고 사람은 그 환경 속에 살았다.


날씨, 주변 사람들의 기분, 나의 기분, 사고, 취향, 입맛, 노화, 체력, 또 날씨. 나는 이 변화의 집합체들을 다 통제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조각들이 내 일기장이나 태블릿과 휴대폰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한낱 유리구슬들이길 바랐다. 쥐어채 어딘가로 던지거나 여유로이 햇빛에 비춰 보고 빗길에 굴려 보길 원했던 것이다. 건방지게도.




병동의 장난감과 과자와 문제집을 보며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던 건, 이 상황들이 꽤 부정적인 브레이크임에도 변하지 않은 한 줌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게 일상이라고 생각했다. 안온하고 조용한 것.

입원과 병환은 파열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것들은 깨진 일상이 아니었다. 병원 역시 삶의 공간이었다. 착인형과 헤드셋과 색칠공부책 같은 타 산물들은 바닷가에 서서 한 손에 쥔 모래알 같은 거였다.


전체가 아닌 일부. 어떻게든 손을 웅크려 잡아둔 것들. 다행스럽게도 빠져나가지 않은 것들.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것들. 원한다면 다시 퍼올릴 수 있지만 같은 알갱이를 똑같이 쥐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는 것들.






파도처럼 두려워질 때가 있다. 세상에 채워져야만 하는 불행의 절대치가 있는 것 같을 때. 그중 무엇을 어떤 방향으로 맞게 될지 도무지 모르을 때, 그들이 내가 목격하고 느낀 것들처럼 나를 덮치면 어떡하지, 하는 밑도 끝도 없는 불안의 존재가 느껴질 때. 중환자실에 내가 알던 애들이 아닌 새로운 이름의 애들이 다르지만 또 비슷한 사연으로 등장했을 때.


달리기와 글쓰기가 좋았던 건 날씨와 듣고 있는 음악 말고는 고려할 게 없는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쥘 수 있을 만큼의 변화는 얼마나 소중하고 깨지기 쉬운가. 일상은 부서져 변모하라고 있는 거였다. 내가 이 속성을 아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에 어낸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뒤집힌 테이블인 줄 알았던 체스판을 바라본다. 주머니에는 입구로 들어올 때 받았던 말이 있다. 빨간 구슬이다. 평평한 나무판 위에서 나의 게임은 정상적으로 진행될 없다. 맞은편의 상대는 당신들의 그런 무력함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한다? 내가 들었으니 내가 그런 말을 한 거나 다름없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도 않은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이다. 다만 이제야 알았을 뿐이다. 삶에 적용하는 법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정말이었다. 손에 쥔 말은 바닥이 갈리지 않은 단단한 구슬이고, 앉은 이 자리는 구슬이 굴러갈 미끄럼틀이 아니라 매끄러운 장기판이 놓인 곳이라는 것을.



그러니 단지 바랄 뿐이다. 어떤 일상에서도 행운이 함께하기를. 조각을 잡되 너무 상심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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