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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 유지 비용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by 이븐도 Mar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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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밥을 먹고 조금 취해서 후드티를 벗고 반팔티만 입고 걸었다. 설빙 빙수에 들어 있던 찹쌀떡이 맛있었고 잔뜩 기대 있던 그녀의 조금 통통한 등이 참 편안했다. 치대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틴케이스에 들어 있던 곡물 쿠키가 맛있었다. 그레인 쿠키라 쓰인 걸 보고 그라신 쿠키야? 하고 하나도 안 웃긴 농담을 하는 그들이 조금 귀엽기도 했고.

나는 남은 보드카를 집에 가져왔다. 선임이 틀어준 오아시스 노래와 이 가방 속의 술병. 갑자기 세상 어떤 것도 두려울 게 없는 기분이었다.


화난 채로 뒤돌아보지 말라잖아.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라잖아, 아무튼 슈퍼소닉이라잖아. 뭐, 오늘보다 더 하겠어? 더한 날은 진짜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 살면 되지. 혼자 마시지 말고,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노래 한두 곡을 온전히 듣고, 깔깔깔 자지러지게 웃고 속으로도 깔깔깔 웃으면서. 한 개 삼만 원이나 하는 키링을 산 스스로를 그렇게 미워할 필요가 없었다. 가방에 달랑거리는 눈이 콩알만 한 커다란 덤보를 보며 이게 다 이걸 달고 와서 그런 거야, 코끼리를 달고 와서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은 거라고, 맞지? 맞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할 수 있었으니까. 아, 이래서 사람들이 술 마시는구나. 아하, 아하.





딱 두 가지를 간절히 바라며 잤다. 제발, 네 시간 후에 멀쩡히 일어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이 글을 올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니까, 이 적은 글을 올릴 수 있는 날이 오게 해 주세요.

다 지난 일이 되어 버리게 해 주세요.












솔직히 그 방에서 제일 미친 것 같았던 건 그 남자애도, 알 수 없는 러시아 어로 그를 진정시키려 땀을 흘리며 그의 귀에다 소리 질러 기도하듯 말하는 그의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팔짱을 낀 채, '진정해, 진정해. 착하게 해야 풀어줄 거야'라는 말을 반복하는 주치의였다. 나는 그의 팔인지 다리인지 이제는 자각도 안 되는 부위를 잡으려 노력하며, 주치의를 내내 째려봤을 것이다. 째려본들 그게 대수인가. 흰 재킷을 입고서 그 말만 하는 그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때리고 싶었다는 게 좀 과장일까? 나가서 오더나 내던가, 아니면 제발 여기서 꺼져 줬으면 했다.



우리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시도 중이었다.

우리, 가 누구냐고? 몸무게 구십 킬로는 나갈 것 같은 보안요원 세 명과 간호사 일곱 명,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도합 열 명이 넘는군. 난데없이 코끼리? 이 병실 냉장고라면 그는 코끼리가 맞았다. 열일곱, 열여섯인가. 180cm, 118kg. 말 그대로 이성이 없는 상태 그의 입에서는 알 수 없는 러시아 어만 나왔고, 나는 억제대와 침대 시트와 환의까지 동원해 묶어 놓으려고 시도한 그의 통나무만 한 정강이쯤을 누르려 하고 있었다. 잡는 건 불가능했다. 보안요원 한 명씩도 겨우 다리 어드메쯤을 누르고 있었고, 그는 팔다리가 다 묶인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두껍고 단단한 팔다리를 침대 난간에 내려칠 것처럼 괴성을 지르고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냉장고, 냉장고라.. 병실도 멀리 간 표현이다. 그는 코끼리였고, 그 침대가 냉장고였다. 그는 침대에 가만히 있지 못했다. 침대나 그의 몸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금 가기 전에는.













중환자실에서 전동을 올 때는 보통 거기서 썼던 '자는 약'과 인공호흡기를 떼고 온다. 피치 못할 경우 인공호흡기는 유지한 채 온다. 다만 재우는 약은 중단하고 온다.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나 통상 그렇다. ICU는 인텐시브 케어 유닛, 의 약자다. 사람으로서의 의식보다는 그 육체 자체를 소생시키는 데 집중하는 곳. 치료의 진행에 환자가 깨어 있는 것이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을 경우 그들은 마취제를 끊임없이 얕은 농도로 주면서 그를 계속 자는 상태로 유지시킨다. 이 주입방법을 CIV라 부른다. 계속해서 주는 것.

뭐, 복잡하고 험한 일들을 가급적 빨리 해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걸 중단하지 못하는 상태인 경우, 일반 병실에서는 그를 보기 힘들다. 중환자실은 간호사 한 명당 환자 둘을 본다. 우리는 열 명을 본다. 나이트 때는 열셋에서 넷으로 그 수는 늘어난다.






전동을 받으라고 했다. 받으라니 받아야지. 환자 파악을 위해 중환자실 리스트에서 그 친구를 눌렀다. 뭐, 이틀밖에 안 됐네. 별  없군. (당연하지만, 재원 기간이 길 수록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그런데 마지막 차팅이 이상다.

'irritability 심해 Dr 컨펌하 precedex 비강 내 주입함' 

(약마다 근육, 정맥, 콧구멍 속 등등 줄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한데, 통상 근육이나 비강 내는 정말 응급할 때 사용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허벅지 등에 팍 하고 꽂는 약이 그런 종류다. 당장 그 약을 주지 않으면 안 될 때 투약하는 것이다)


아니, 이거 다 끄고 오는 거 아니었어? 주입을 하다가 증량했다는 차팅도 있었다. 병동 전동 1시간 전 CIV off. 아까 껐었네. 근데 그걸 껐다가 다시 쭉 줘버렸다는 거지. 뭐야, 오늘 오는 게 맞아? 이상하잖아. 그리고 기록들을 내려보니 제어가 안 되어 의료진 다칠 뻔함, 발길질, 진정되지 않음, 진정되지 않아 의사 확인 하에 IM 투약함, 진정에서 깨어나 irritability 있음.. 의 차팅이 가득했다.







제 입원해서 오늘 올 건데 지금 이런 상태라고? 몸무게 백 킬로가 넘는 거구의 청소년 남자애. 의사소통 안 됨. 아니, 이걸 어떻게 받아. 나는 차지 선생께 좀 징징댔다. 선생님, 얘 진정 안 돼서 계속 프리세덱스 주는데요. 케타도 계속 아이엠으로 줘요. 오는 거 맞아요? 이걸 어떻게 받아요.

그녀는 무던히 대답했다. 아, 그러게 말이야. 어떡해. 주치의도 미친 것 같아. 근데 계속 재워 둘 수가 없대.

아니, 그래도요. 계속 킵해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병동에서도 재워야 할 것 같은데요? 모르겠어. 근데 내려보내겠다는 걸 어떡하니.



들어먹히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이틀이었다. 멀쩡히 살다가 중환자실로 와서 있던 게 이틀, 사실은 하루 하고 반나절. 그런데.. 당장 데리고 있는 게 문제였다. 원래 전동을 받으면 퇴근이 좀 늦는다. 근데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얘를 받으면, 다른 환자들은 어떻게 보지? 여기서 재우거나, 다시 중환자실로 올리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계속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지.

별 수 있나, 나는 '퇴원 자리로 금일 GW 전동'이라고 오더를 낸 주치의를 속으로 잔뜩 씹으며 전동을 받을 준비를 했다. 씹으며? 온갖 쌍욕을 다 했다. 퇴원 자리? 지가 뭔데 배정까지 관여해. 또라이가.. 이걸 텍스트 오더로 내?










그리고 그녀, 차지 선생은 다섯 시 반에 나와 함께 퇴근하며, 나에게 망고 스무디를 사 주었다. 나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서 아메리카노요, 했더니, 안돼. 더 비싼 거 먹어. 버블 추가 안 해? 저거 시켜, 저거. 하고 이름도 엄청나게 긴 신메뉴를 말했다.

선생님, 이런 걸로 안 돼요, 내일은, 아니 나이트는 또 어떡해요, 진짜. 했더니 쿠키도 시켜, 다 시켜, 다.라고 했다. 나도 저 정도일 줄 몰랐다, 미안행. 에휴. 어떡하지, 정말?

어떡하긴요, 선생님은 나이트를 안 하시잖아요. 내일도 출근 안 하시고요,라고는 속으로 말하고.. 나는 힘을 다해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이후 그녀는 일주일의 휴가를 떠났다.












그는 천만 다행히도 눈을 감고 가만히 누운 상태로 왔다. 나는 그가 자는 상태일 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상태는 삼 분도 못 갔다. 이송용 카에서 그를 조심히 굴리고, 다시 침대에 애써 묶어 놓는 데 걸린 시간이.. 아마 6분 정도. 그는 병동으로 들어온 지 오 분도 안 되어 깨어났다. 중심정맥관을 열어서 펑션을 확인하기 전이라 다행이었지 그게 아니었으면 난동을 치는 그 몸부림에 다 뽑혔을지도 모른다.


나는 콜벨을 눌러 누구든 두 명 와 달라고 했다. 중년의 이송요원과 그의 반쯤만 한 몸집의 아버지와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코끼리가 깨어난 게 맞았다. 천으로 묶인 다리와 팔이 아프지도 않은지 그는 난간과 베드 전체가 다 흔들릴 정도로 움직이며 '파파!' 하고 소리치고 알 수 없는 말을 잔뜩 내질렀다. 아버지는, 무슨 구마라도 하는 것처럼, 그 작은 몸으로 그의 얼굴에 대고 다른 말들을 쏟아냈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없었고 알아듣는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힘을 짜내 애쓰고 있었지만 내 어깨만 아팠다. 누르는 것도 어려웠고 그가 휘두르는 팔다리에 맞지나 않기를 바랐다. 도움이 안 됐다. 나는 다시 벨을 눌러 보안요원을 불러 달라고 했다. 사람 몇이 오자 누군가 내게 차팅을 넣고 노티를 하라고 소리질렀다. 그들이 그의 팔, 다리, 손, 중심정맥관 쪽을 다 누르려 애쓰고 있었다. 애초에 옆자리의 환자와 보호자는 복도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전산을 켠 후 내게 인계를 준 간호사를 잔뜩 욕했다. 망할 새끼가, 이걸 나한테 인계를 안 줘? 분명 이 차팅은 없었다. 알았다고 해도 나는 어차피 전동을 받아야 했겠지만, 이렇게 통수를 치는 건 아니지.

전동 위해 스트레쳐 카에 옮기는 도중 irritability 있어 케타민 IM 투약함? 장난하나, 개새끼가. 어쩐지 빨리 보내려고 하는 눈치였다. 어떻게든 치우고 싶었던 것이다. - 이름 석 자 퇴사할 때까지 못 잊는다.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나중에 따져 묻고 싶다. 오**씨, 그때 나한테 그거 인계 왜 안 줬어요?



케타민은 반감기가 짧다. 빨리 작용한다는 뜻이다. 정말로, 중환자실에서 이 쪽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나 잤던 것이다. 이런 애를 여기로 던져? 주치의랑 너 다 나와, 망할 새끼들아. 앞에서는,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그를 감당하려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그는 묶인 침대와 사람들의 팔과 손으로부터 벗어나려 발광 중이었다. 주치의 어딨어, 어딨어. 던져 놓고 와보지도 않아? 분노가 잔뜩 올랐다.


기록을 넣는 게 의미가 없었고 나는 스테이션으로 나가 주치의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환자 전동 왔으니 한 번 보시라고. 그녀는, 왔어요? 하며 우아하게 일어나 천천히 걸었다. 정말로, 천천히 걸었다. 그 난장판에서 나오는 소리가 분명 스테이션에서도 다 들렸는데, 그래서 다른 이들은 다 토끼눈이 되어 있는데, 그녀는 뛰지도 않았다. 기가 찼다. 대신 달렸다. 한 명이라도 더 필요했다. 그 개판에서 그를 포함한 누구든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데이 번, 이브닝 번 할 것 없이 그 병실에 모여 그를 어떻게든 붙들고 억제대를 다시 고정하려 애쓰고 있었다. 코끼리나 다름없는 사지를 그 나뭇가지 같은 팔의 간호사들이 붙잡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보안요원들도 진땀을 흘렸다. 모두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진정제달라는 말에 주치의는 이제 더 쓸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그녀는 '착하게 해야 풀어줄 거야. 착하게, 착하게. 움직이면 안 돼.'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죄 러시아 어로 떠드는 그 애에게 그러고 있었다. 대체 눈을 몇 번 질끈 감고 쌍욕을 삼켰는지 모른다.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사람들이 다 모여서 얘를 붙잡아 두려 해야 할까, 언제까지. 정말 우리는 족히 한 시간을 그 아수라장에서 사투를 벌였다. 다른 이들의 처방이고 나발이고 이 방을 나갔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서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중간중간, 뭐라고, 하는, 거예요?라고 아버지에게 통역을 요구했다. -내가 그녀를 너무 싫어한 티를 낸 것 같아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그럴 만했다- 중심정맥관을 고정시켜 놓은 드레싱이 다 벗겨져 삽입 부위가 전부 드러났고 그의 난동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쪽으로 목을 꺾지 않도록, 감염되지 않도록 머리까지 붙들어야 했다. 실습생들은 클립보드를 끌어안고 문간에 서 있었다. 와서 잡아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기를 몇 번을 더 반복했다. 주치의는 결국, 당연히도 소통에 실패하고 할돌이랑 아티반 반 앰플씩 섞어서 줄게요,라고 했다. 그제야.













그러고 진정이 되었냐고? 수선생까지 와서 이런 애를 병동에서 볼 수는 없다고 항의했으나 진료과의 입장은 완강했다. 지금이야 교대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만 나이트 때는 간호사 셋뿐이다, 환자도 더 많다, 이런 애를 병동에서 어떻게 케어하냐, 당신들이 와 있을 거냐, 아니지 않느냐, 재울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내려보내시면 어떡하냐.. 그리고 주치의는 교수님께 전달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애가 깨어나려면 중환자실은 불을 켜둘 수 없는 상태라 일반 병동에서 봐야 한다고 했다. 이런 씨, 그게 문제가 아니고 재우지 않으면 저 친구와 나머지 환자 안위는 어쩔 건데요. 속이 끓어서 폭발할 것 같았다. 이래서 간호사 안 하려고 하는구나, 병원은 정말 일하기 개 같은 곳이구나. 돈 벌기 쉽지 않네. 이런 것까지, 거기서 하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해야 하는 거야?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못 하겠다는 건데.  하는데.










그가 그새 깨어나 내지르는 소리, 쾅쾅쾅대는 소리, 움직이지 말라는 누군가의 말소리, 뭘 갖다 달라는 소리, 또 아무나 와 달라는 소리. 울고 싶지는 않았고 진짜 주치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다. 보안요원 둘은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못했고 이브닝번은 일단 내게 인계를 받았다.

나는, 채 십 분도 효과가 없는 아티반과 할돌과 프리세덱스와 케타민의 약효와 그의 몸무게를 생각하며 잔뜩 심란하고 분노에 찬 상태로 남은 일들을 정리했다. 정확히는 십 분에 한 번씩 그 사람 가득한 병실로 뛰어가 어딘가를 또 붙잡고 누르고 필요한 걸 갖다 줬다. 떠날 수가 없었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주치의는 교수에게 노티를 하는 건지 사담을 하는 건지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카톡을 하고 있었다. 켜져 있는 오더창은 색깔로 보아하니 여자 환자 거였다. 이런 개판을 두고도 저럴 수 있다니.

썅년이 맞다. 환자를 그냥 내려보내서? 아니지. 보내는 건 보내는 건데, 보내 놓고 본인 환자인데도 남 일인 양 그러고 있는다는 게 썅년이 맞다. 남들은 왜 그러고 있는데, 그 사람들 시간이 남아돌아서 거기서 그러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 거구의 소년이 더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설령 침대를 탈출해 다른 환자들에게까지 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상황을 관망한 후 그 소굴을 떠났지. 어떻게 좋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원래는 선임이 내 사번 애들과 스케줄을 맞춰 밥을 사 주기로 한 날이었다. 타과 PA로 가 있는 그녀는 네 시 반쯤, 선생님 저 오늘 못 갈 것 같아요,라는 내 표정과 난장판인 병동을 보더니 알겠다고 했다. 밥이고 나발이고 그냥 지쳤다. 이렇게 온몸으로 시달리고 이곳으로 내일 다시 출근해야 했다. 쟤가 저러고 있을 동안 나는 최소 여덟 명의 환자의 일을 커버해야 한다. 감도 안 잡혀서 무섭지도 않았고 그냥 진이 빠졌다. 막상 집에 가서 뭘 먹기도 힘들 것 같았다. 안 가려다가, 정말 밥이나 얻어먹고 와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당장 국밥이나 푹푹 퍼먹어야 할 것 같았으나 장소는 어쨌든 이 동네의 웨이팅까지 있는 양식집이었다. 곱게 화장을 한 동기와 후배 몇이 앉아 있었다. 별생각 없었는데 그들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고였다. 흘리지는 않았고 나온 메뉴들을 먹었다. 맛있었다.

선임이 와인을 한 잔 시켜줬고 나는 죽이고 싶은 인간들의 목록을 시작으로 오늘의 강한 소회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대강 상황을 알고 있었다. 저녁 여덟 시, 기록을 보니 아수라장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기어이 다시 진정제 CIV를 시작했고 잠들지 않아 보안요원을  호출했다는 차팅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이전에도 이런 애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 애는 여자였고, 70kg쯤이었다. 그녀의 아빠 선에서 제압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녀는 장장 반년이 지나 깨어났다. 진짜로, 같았다. 정말로 퇴사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데 퇴사고 뭐고 당장 내일도 그 친구를 붙들며 일해야 하 게 더 막막했다.












나는 자리를 옮겨 간 선임의 집에서 잔뜩 웃고  취했다. 그녀는 나를 위 오아시스 노래를 몇 곡 틀어줬고 이후에는 다른 동기를 위해 데이식스 노래들을 틀었다. 그들의 성대모사와 난데없는 똥 얘기와 또 성대모사와 나의 데스노트 리스트와 물고기와 사람의 유전자가 팔십인가 구십몇 퍼센트 일치한다는 이야기와 수륙 양용이니 물고기보다는 차라리 양서류가 낫다는 이야기와 월급 이야기에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밥만 먹고 오려고 했는데 그렇게 정신을 놓은 것 같은 중구난방의 대화를 하며 술을 마시니 즐거웠다.  절망적이었고 오른쪽 어깨와 윗팔이 너무 아파 들어 올려지지도 않았지만 별 수가 없었다.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데, 어쩌겠는가. 과제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그 친구 이전에, 제발 나 내일 멀쩡히 일어나게 해 달라고 모두를 향해 빌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들에게 판교 디즈니스토어에서 산 덤보 키링을 자랑했다. 이쁘지, 얼마게, 그리고 동기는 한 번에 가격을 맞췄다. 그전날 나는 그걸 결제하며, 행복하지만 대체 이런 것들을 사들이는 짓을 언제쯤 그만둘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그걸 만지작대며 오아시스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게, 내 제정신 유지 비용이라고. 비록 좀 취한 상태라서 제정신이 아니지만.. 이 정도 음주도 제정신 유지 비용으로 생각해 주자고 생각했다.


우습게도, 이걸 마셔서 내일의 출근을 걱정하고 있지만, 어차피 걱정했을 일이었잖아? 아,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위해서 이 정도 비용이라면? 차라리 나은 편이지.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이잖아, 처방이 우다다다 나는 걸 커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내 완력으로 어쩌지 못하는 일까지 닥쳐 보니 더 무서울 게 없었다. 이거보다 심한 일이 있을까? 없을 거야. 망할. 상상조차 안 된다니까.














그리고 아무튼 기적적으로, 정말 기적인가?

나는 이 글을 이곳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멀쩡해진 그와 그날과 그다음 날의 나이트 내내 뺑이를 친 간호사들과 운 나쁜 보안요원들과 그 근처 방의 모든 환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축하를 건넨다.



마법인가? 나는 그 때 디즈니 판타지아 마법사 미키 키링도 같이 샀거든. 그다음 날에는 그걸 달았다. 그게 코끼리를 마법에서 깨어나게 한 건가?

아무튼 결론은, 어떤 소비는 꽤 정당하다는 거다. 그게 그날의 결론이다.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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