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가버렸어요
오랜만에 출근했다.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좀 죽고 싶었다. 별개로, 예상했던 것처럼 오더 자체가 다 안 읽히거나 주변의 말들이 안 들리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더 짜증이 났고 화가 났다. 흠, 내 슬픔은 왜 이리 짧고 우스울까? 내 삶과 글의 특징인가 봐.
나 혼자 하던 어둡고, 진지하고, 사회에서 용인되지 못할 것 같던 뭐 그런 생각들이 퇴근 후 키보드 위에서는 그냥 멍청이의 반란 정도가 되어 버린다. 그땐 다큐인 줄 알았는데 떼놓고 보니 망한 시트콤이다. 내가 이상한가? 근데 이 이상 뭘 더 어떻게 정상적으로 슬프고 울적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의 일들을 어떠어떠한 장면들이라 칭하며 왜 그렇게까지 주절주절 쓰고 싶었는지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남의 불행이 칠십 퍼센트, 있어 보이는 척하는 내 생각이 삼십 프로인데. 칠십에 삼십? 양심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해 봐. 구십에 십으로 정정한다. 나는 돈을 위해 이 일을 한 게 맞는데, 뭘 그리 아닌 척하려 했던 건지 스스로 조금은 웃기다고 생각했다. 돈도 경험 같아 보이는 그 무엇도 다 가져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냥 욕심이 많았다. 꼴에.
이틀 간의 나이트, 달라진 것 없는 병동. 우는 애들. 죽어가는 애, 가엾지만 안 가여운 부모들, 자기들이 낳은 자식을 감당할 그릇이 못 되는 한심한 몇몇. 이곳에서 일해 모은 2천만 원을 잃은 나. 피곤하고 할 일이 많아서 딱히 쓸모 있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쓸모, 쓸모라.. 2천만 원과 내 사진과 영상을 위해 뭘 할 수 있는가. 죽을까? 그럼 어떻게 죽을 것인가.
병동 간호사로 일하며 깨달은 한 가지 진리는, '지랄하면 해준다'. 나는 수많은 지랄을 듣고 염병을 대신 떨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입장이었던 적이 참 많았다. 바빴다. 시간마다 챙길 것들이 많았다. 이러이러해서 범인은 잡기 어렵다는 말부터 초장부터 반복하는 형사에게, 보낸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는 그들에게 어떤 지랄을 어떻게 떨어야 할지 구체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랑 똑같네? 절대 잘해보겠다는 말부터는 하지 않지. 온갖 잘못됐을 경우를 설명한 무시무시한 말들이 적힌 시술과 수술과 검사에 대한 동의서처럼.
그는 내가 현금을 건넨 시간을 각각 다른 형식의 서류에 서너 번이나 기입해 놓았음에도, 아, 열한 시 오십 분이 아니라 네 시 오십 분이요? 하고 되물었다. 음. 역시 병원과 똑같구나. 경찰서에서, 그들은 일하는 사람이고, 나는 아니었다. 지랄? 지랄이라고 해봐야 결국은 수사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하고 공손하게 전화를 걸어 묻는 것뿐이다. 내가 그렇지, 뭐. 그래도 그만한 게 어디야.
병동에서도 조용한 환자는 제일 늦게 봐 준다. 시끄럽고 불만 많고 사람들 귀찮게 하는 환자? 어찌됐든 속전속결로 일처리를 한다. 아, 네네.. 그렇죠, 힘드시죠.. 근데 환자분께서 너무 화를 내시고 컴플레인도 심한 상태라서요, 정말 정말 죄송한데 먼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그 꼴을 내 앞에서 치우기 위해서라도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뭐.. 일단 죽지 않을 것이고 그만두지 못한다. 퇴근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24학번 대학교 과잠바를 입은 애가 하나 보이길래, 모은 거 들고 대학이나 다시 들어갈까, 하고 생각했지만, 실현 가능성은 0이다. 반농담으로 하는 말처럼, KCL을 슈팅해 달라고 해야 하나, 생각은 했는데. 이딴 걸로 그렇게 죽기는 좀 아까웠다. 나 스스로도 쪼금 웃겼다.
사실 며칠간 은은하게 했던 생각이었다. 왜 나는 진지하게 죽음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 20대를 교대근무에 갈아 넣어 모은 돈의 적지 않은 부분을 그렇게 한순간에 잃고도 왜 자살 혹은 타인에 의한 자살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 정말 진지했다. 내가 생각보다 더 간이 큰가, 아니면 타고나길 선비 같은가. 글쎄, 같은 브랜드 신발을 그렇게나 꾸역꾸역 사대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데.
나는 꽤 염세적이고 때때로 비관적이지만 타고나길 우울한 사람은 못 되는가 봐. 귀찮아서 못 우울하겠어. 아니면 너무나도 회피형이라 그런 불행도 이제 회피해 버리고 싶은 건가. 아무튼 확실한 건, 열흘 새 이 불행이 지겨워져 버렸다는 것.
간단히 말해 그 애는 죽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숙사에 살던 시절이면 8개월, 지금 기준이면 10개월, 말이 열 달이지 보너스나 상여로 누덕누덕 구멍들을 메워야 그렇게 모았다. 돈은 꽁으로 받는 게 아니니 매번 점심시간 같은 사치스러운 건 바라본 적도 없고 그냥 응당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취직이 쉬운 직종이니까. 백 날 잘해줘 봐야 돌아오는 것 없는 이 병동의 수많은 애들과 보호자들 앞에서 그렇게나 웃었고 너스레를 떨고 따뜻한 관심을 주는 척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받으니까.
그렇기에 참았던 근원이 약 일 년치 사라졌다. 내 2천만 원의 근원, 이곳. 거기서 일했던 걔는 죽었다. 이제 좀 덜 친절하고 표정이 더 굳어 있어도 어쩔까 싶다. 어차피 원래 사실 그래도 되는 거였잖아? 뭐, 그래서 며칠간 울적했던 걸로 치기로 한다. 걔가 죽었으니까. 기실 다를 게 있나? 걔는 벌어놓은 돈과 함께 사라졌다.
오늘의 질문도 똑같았다. 달라진 게 뭐지? 죽을 건가? 2천. 그리고 아니. 완전히 그 전과 똑같지는 않다. 내 손으로 한 달간 끊었던 과자를 병동에서 까먹었고 퇴근 직후에는 삼각김밥을 내리 네 개 먹었다. 이렇게나 건전한 자기 파괴 행위라니. 이렇게 재미없고 간이 콩알만하니 그런 우습지도 않은 수법에 넘어간 거다.
일하는데, 누구누구 씨 검찰 출입만 해도 기록 남는 거 아시죠, 간호사라고 하셨는데 의료인 전과 남으면 면허 정지거나 박탈인데, 뭐 해 먹고 사시려고 그러십니까? 했던 말이 생각난다. 개새끼. 글쎄, 나는 이제 욕을 할 권리도 없다. 그 년놈들의 면상에 퍼부어 줄 게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응당 욕 처먹어야 할 대상 앞에서는 못 하고 엉뚱한 데다가 하면 어떡해. 정말 올해인가 보다. 욕설을 끊을 때가.
걔는 죽었다. 일하러 가서 알았다. 나는 이 일이 내 일상을, 나아가 내 인생 전체를 흔들지 않게 하기 위해 그전에 해오던 일들을 그대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딱히 그렇게나 땡기지는 않던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써서 주의를 돌렸고, 하던 대로 뭐라도 쓰자고 생각했다. 쓰고, 밟고 서서, 지나쳐 걸으면 되잖아. 달리기를 했다. 오늘은 실패지만, 앞뒤 없이 단 것들을 잔뜩 사다 먹지도 않았다. 집도 잘 치웠고 그래도 잘 씻고 단장하고 출근했다.
그래도 그 친구가 죽어버린 만큼 아주 예전으로는 못 간다. 그렇게나 착한 맛을 만들어내서 쓰던 그 친구는 가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직종을 다 드러낸 만큼 늘 적당히 거르고 무게를 덜어낸 글을 쓰려 했는데 잘 안 될 것 같다. 한편으로는 또 어떤가 싶다. 이런 거 쓰는 간호사가 나밖에 없을 리가 없잖아? 내가 무슨 대표 자격 같은 걸 가진 것도 아니고 일개 노동자일 뿐인데. 자의식 과잉이다. 만일 없다 해도, 그렇다면 더더욱 내 마음이다. 내가 쓰는데, 뭐. 그리고, 돈 주니까 더 열심히 했던 일인데, 좀 삐딱하게 바라본들 어때.
그 친구는 죽었다. 안타깝게도 현생의 나는 죽지 못했고 당장 이깟 일로 응급사직을 해버릴 만큼 낭만적인 인간도 못 된다. 그러니, 당분간은 그냥 이렇게라도 뭔가를 써서 올리고자 한다. 그전 글도 훌륭하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더 형편없을 수도 있다는 예고이다. 하지만, 괜찮다. 이러다 보면 또 헤까닥 돌아서 일터를 포함한 모든 곳이 또 아름다워 보이는 때도 오겠지. 내게 소아과가 사랑을 가르쳐 준 곳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또 아니면 어떤가, 쌔고 쌘 게 자기 일한 걸 조리 있게 감동적인 글로 풀어내는 사람들인데. 난 애초에 아니었다.
우울한 채로, 뭘 해도 몇 시간이나 걸리는 그런 답답한 상태보다는 낫다. 나는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우울한 인간도, 우울함을 토로하는 것도 싫다
울적해 무기력하느니 진짜로, 죽는 법을 모색해 성공하는 게 낫다. 불행?나만큼 불행해? 난 불행해.
그러니까, 불행을 토해놓는 건 이쯤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