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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의 고저

250307

by 이븐도 Mar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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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낀다. 주제에 살까지 쪘다. 체중계 배터리가 다 되어서 몸무게를 못 잰 게, 집에 AAA 건전지가 없던 게 너무나 다행인지도 모른다. 가지고 있는 옷들이 끼는 게 너무 끔찍해서 살이 찌기 싫었다. 작년에 산 청바지에 허리가 끼는 느낌이 생경했다. 허리띠를 끼워야만 맞던 바지가 그냥 맞았다. 그걸 확인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절망이다.




전공의 몇이 돌아왔고 하나도 달갑지 않다. 오더를 잘못 내고, 덜 내놓고 퇴근은 제때 한다. 그들이 할 일을 안 한 건데 왜 재촉하지 않았냐는 쿠사리를 먹는 건 또 내 몫이다.

PA들도 꼴같잖기는 마찬가지다. 본인들도 할 수 있는 일을 나에게 시킨다. 회진을 돌아야 하는데 자리에 없으니 불러 달라는 그런 것들. 니가 의사야?라는 말을 삼킨다. 죄다 병동에 있었던 똑같은 인간들이 윗사람 척하는 게 아니꼽다.

저도 병원에서 일했어서 아는데,라고 말하는 보호자들이 싫다. 방침대로 따르기 싫으면 나가시라고 하고 싶다. 당신이 이십며칠 짜리 쌍둥이를 어떻게 데리고 있든, 전직이 뭐였든 내가 다 알아줄 수 없고 알아줄 필요도 없다. 임상병리사였건 간호사였건 의사였건 지금의 당신들이 책임질 게 아니면 제발 같잖은 컴플레인 좀 그만했으면. 꼬우면, 병원 직원이 아니라 이곳 병원장 가족으로, 여기 교수나 전임의 지인 정도여야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병원에서 안 되는 일 같은 건 없는데. 안 되는 사람이 있을 뿐.





상반기 내한 티켓 모두를 취소했다. 선예매까지 해서 난리 아닌 난리를 쳐 잡은 것들. 한물간 그들의 쇼를 보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았다. 취소하니 후련했다. 일산까지 오가는 길을 견딜 자신과, 작은 공연장 스탠딩석에서 또 휴대폰을 이리저리 쳐들다가 인스타 스토리를 올리고 있을 인간들을 감내할 의지가 없었다.

 사실 그냥 어린 날의 나를 위해 예매한 걸지도 몰랐다. 니가 그렇게 듣던 노래를 이제는 혼자 번 돈으로 공연장 가서 본다고. 그런 건 이제 충분히 한 것 같기도 했다. 함께  공연장에서 보기로 한 언니가 아니었다면, 내일의 아이돌 콘서트도 아마 어떻게든 취소했을 것이다.



살이 찐 건 내일로 예정된 생리를 미루기 위해 먹은 피임약 때문일지도 모른다. 동기가, 알룰로스랑 코코아 파우더 말고 진짜를 먹으라며 보내준 초콜릿 세 봉지 중 두 봉지를 하루에 다 먹었다. 총 1400칼로리. 나는 대체 얼마의 설탕을 먹은 걸까. 이렇게까지 무너지듯 먹은 적이 최근에 있던가. 한 달간 자의로는 안 먹으려 했던 온갖 과자, 컵라면, 초콜릿, 도넛.. 병동에 있는 걸 보이는 대로 다 먹었다. 제 때 식사를 잘 챙길 수  있었으면 그렇게 안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일을 정말 그만둬야 할까. 그만두면 뭐?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출근했더니 웬 9년 차에게 오리엔테이션을 주라고 한다. 그녀는 비뇨기과와 내분비내과와 영상의학과 등등을 거쳐 이 병동에 불시착하게 된 고연차였다. 학기가 시작는지 실습생도 따라다녔다. 3학년. 남자애긴 했지만 아무튼 통상의 대학 3학년이면 나와 6년이나 차이가 난다. 내가 대학교 3학년이었던 게 무려 6년이나 전의 일이었다니.

실습생인데, 링으로 된 피어싱을 하고 있었다. 뭐.. 여자애들도 귀고리는 하고들 있으니까. 그거랑 다를 게 뭔가. 귓불로 일할 것도 아닌데. 하여튼 신기했다. 그런 게 보이는 스스로가 이제 정말 꼰대가 다 되어 간다는 생각을 했다. 한 병에 삼백 짜리 고가약을 두 개, 일주일에 한 번씩 맞으러 와야 하는 애를 보고 '저 친구는 어떻게 아무 증상 없이 괜찮아진 겁니까' 는 멍청한 소리를 해서, 순간 온 생각이 다 멈췄다. 이 정도 규모 대학병원에 그러면 아무 일 없이 저렇게 뛰어다니라고 입원했을 리는 없잖아?

 그 머리로 그 대학은 어떻게 들어간 걸까,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치료 과정과 약의 가격과 혈액검사 수치 설명해 줬다. 6년이다, 6년. 나는 졸업도 했다. 월급은 꽁으로 주지 않는다. 그렇게 받으며 지겹도록 같은 일을 한 게 그래도 며칠인데. 당연히 쟤보다는 내가 잘 알겠지. 꽤나, 정말로 꼰대가 되어가고 있으니 조심해야겠다고 다시 마음을 잡았다.





3일을 붙어 던 그녀는 성격은 좋은 모양이었지만 이걸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둥 군말이 많았다. 난 안 해야지, 하고 상쾌하게 웃는 그녀 앞에서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 같은 사람들이 안 하면 결국 내가 갈굼당하고 뺑이쳐야 하는 거지만 그건 그녀의 알 바가 아니지.

오늘은 그녀와 일을 하지 않았다. 샤넬? 불가리? 독하게 달고 지끈거리게 머리가 아픈 짙은 파우더 향이 없는 것만으로도 해방된 기분이었다. 다시는 함께 있고 싶지 않다. 대체 출근해서 일하는 곳에, 그것도 병원에, 그런 걸 뿌리고 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병동이 돌아가는 모양새, 안 중요하지만 결국은 챙겨야 하는 것들에 대해 적당히 말하면서, 한쪽으로는 향수는 왜 뿌리고 오시는 거냐고 묻고 싶은 걸 참느라 머리가 더 아팠다. 역시 이런 무딘 인간들이 병원에서 오래 일하는 건가? 나중에는 그녀의 파운데이션 바른 핑크빛 얼굴만 봐도 정수리까지 아다.





데이 근무가 끝나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만 클렌징 티슈로 박박 닦고서 바로 침대에 누웠다. 대학교 2학년 땐가, 그때 이후로 이랬던 적이 없다. 눈을 떴더니 새벽 두 시다. 동기가, 수액세트 끝의 필터를 안 빼놓으면 어떡하냐고 단톡에 떠들어 놓았다. 일단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그런 건 개인적으로 말했던 것 같은데 굳이 이런 곳에 카톡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일대일로 하면 더 어색할까 봐? 아니면, 나보고 유복하게 컸다고 말한 그녀의 속사정을 미루어 보아.. 사랑을 덜 받고 커서? 고작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표현을 굳이 갖다 쓰는 게 특이하다고는 생각한 적 있다. 아무튼 눈뜨자마자 본 게 그런 거였다. 어쨌든 잘못했다.

그리고 다시 출근. 대학 동기는 윗년차에게 긴 인계를 주고 나에게는 본인 화면을 쳐다보면서 인계를 주는 둥 마는 둥 했다. 이건 했냐고 물더니 인슐린이 든 트레이를 책상에 요란하게도 던지고 퇴근했다. 째려보고 싶은 걸 참았다. 그녀의 입사 동기이자 나의 선배는 팔짱을 끼고서 내가 그 낯선 9년 차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는 걸 듣다가 끼어들 지적했다. 왜 이런 인간들은 어디서 객사하지도 않는 거지?



그 대학 동기가 아직까지도 안 놓고 사귀는 남자친구를 떠올린다. 그 선임이 나이트 때, 자기는 남자친구가 귤도 다 까줘야 먹었다고 떠들던 걸 생각한다. 글쎄, 저 성질에 저 얼굴의 그녀를 그렇게 대해준 거라면.. 그 사람 비위가 참 좋았나 보다, 아니면 어지간히도 여자가 급했던지. 과시는 결핍이라고도 했다. 쪽팔린 줄도 모른다고도 느꼈고. 대학 동기의 그 남자친구. 학부 동기. 싸가지도 없었고 피부도 더러웠다. 잘생겨서 좋다는 그녀의 말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생일인 본인에게 만 원도 쓰기 싫어하는 것 같다며 너무 슬프다고, 헤어질 거라고 눈물 짜는 걸 들어줬더니 그런 소릴 했다. 아. 그래. 애초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왜 저런 애랑 그렇게 괴로워하고, 한심한 취급을 받으며 징징거리면서도 안 헤어지는지 늘 신기했다. 신기한 존재다. 신기하고 이상한.. 다른 존재. 원래 끼리끼리잖아. 한결같이 못되고 별로인 인간들. 남자친구와 외모는 부차적인 거였고 나는 그들이 어놓고 싫었다. 어떻게 좋아하겠는가.






콘서트는 원래 그 표 값을 미루어 볼 때, 다녀와서 최소 3일, 가기 전 2주는 행복해야 한다. 그러지 못했다. 실상은 나와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무대에서 뛰노는 걸 즐겁게, 한마음으로 지켜보려면 사실 그 정도 마음의 평화는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온전치 못하다. 그 언니와의 카톡창에 '팬콘 날까지 몸도 마음도 건강하기'라고 썼던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저녁을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역시나 못 먹어 그대로 가져온 식당 도시락은 너무 짰다. 초콜릿, 몇 달간 안 먹은 라면, 짠 것, 도넛, 과자.. 이 우울이 먹는 것으로 해결될 게 아니라는 것만 질리게 깨달았다. 새해 목표였는데. 건강한 식습관 가지기. 꽤 그래도 애써서 잘 정착해 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안 행복했고, 너무 달았고, 너무 짰고, 기름졌고, 냄새가 났다. 더부룩했다. 주말부터는 내내 머리가 아팠다. 일주일간 타이레놀을 열심히 먹었다. 나도 병원에 누워 있고 싶었다. 슬프게도 그 정도로는 안 아픈 모양이었다. 따뜻한 세 끼 챙겨주고, 상태 봐주고, 불편한 거 들어주고, 조심하라고 말해 주고.. 정말 더 슬프게도 사지가 멀쩡했고 정신도 그랬다.







이 또한, 다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모든 게 다 그렇듯이. 파도처럼. 작고 또 큰 물결들, 그 수많은 모양과 높낮이에 대해 생각하는 건 참 진 빠지는 일일 것이다. 나는 진 빠지는 일을 하고 있다. 멍청하고 나약한 죄다. 이봐, 십 년 전의 나야. 난 지금 이렇게 지내. 어떻게 생각해?

나를 기쁘게, 행복하게 했던 것들이 빛을 잃었다. 잠시뿐이길 바란다. 원래 삶은 좀 재미가 없는 그런 거잖아. 언제는 매일매일이 다 밝고 휘황찬란했나?

그냥.. 멀리 갈 것도 없다. 꾀부린 적도, 욕심부린 적도 없는데. 내가 참아 가며 번 돈이 그렇게 사라졌다는 게 나를 아프게 한다. 그뿐이다. 다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뭐 언제는 의미가 있었냐고. 원래 그랬던 사실을 이제야 다시 아프게 느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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