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너를 사랑해애! 알러뷰 걸-
그녀는 다른 병원으로 떠났고, 위루관을 꽂았다. 이제 그녀는 밥을 먹는다. 그녀를 보러 몰려간 혜화동에서 우리는 기름지고 매운 메뉴가 아닌 고등어와 갈치를 시켰다. 야, 내 남친도 슬슬 소화 안 된대. 이제 짜장면도 안 시켜 먹어, 같은 얘기를 했다. 신규 핫바지들이 그 짧은 시간이나마 살아남아 이런 추억도 만들었다. 팬미팅이나 다름없던 만남을 마친 후였다.
그녀는 나를, 우리를 아직 기억했다. 계절이 한 번, 두 번 바뀌면 짧은 문장으로 대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아무튼 우리 모두는 그녀를 꽤나 사랑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22년 7월, 그녀가 중환자실에서 태어났고, 몇 번의 무시무시한 수술을 거쳤다. 23년 8월, '왕건이'가 전동 온다고 했고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침대를 타고서 병동으로 왔다. 그녀를 지탱하는 수액들의 무게가 아마 그녀 몸무게의 서너 배는 됐을 것이다. 우리는 중심정맥관을 통해 들어가는 그녀의 '밥'들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무균적으로 매일 교체할 수 있을지 이 수액 세트의 이 부분을 떼내어 저 세트의 이 부분에 이어 붙이고, 저 세트의 그 부분만을 빼내 연결하는 방식을 인계 때마다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작은 콧줄을 밤새 빼지 않도록 자는 시간이 되면 작게 뭉친 거즈와 잘 늘어나는 헝겊 테이프 같은 것으로 그녀의 손을 장갑처럼 감쌌다. 추석 연휴 때, 나는 그녀가 입술과 몇 안 난 이로 그것을 문 채 잡아당겨 벗겨내는 것을 지켜봤다. 흰색과 핑크색이 섞인 작은 비행접시 같은 보행기에 그녀가 앉아 있기 시작했고, 12월에는 간호사나 보호자의 손을 잡지 않고 서 있게끔 하는 '하드 트레이닝'을 했다. 그녀는 우리가 손을 뗀 채 본인을 세워 놓으려 하면 그야말로 목놓아 울었다. 안아 달라며 손을 내밀었지만 수선생님의 지시 아래에 우리는 그녀가 우는 것을 낄낄거리며 또는 안타까워하며 지켜보기만 했다.
어쨌거나 그런 시기를 지나 그녀는 24년 상반기에는 비틀거리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수액 폴대에는 신생아중환자실 간호사들과 이 병동의 간호사들이 어딘가를 갈 때마다 사 오던 머리핀 같은 것이 가득 담긴 주머니와 그녀를 닮은 열쇠고리들과 장식물들이 그녀의 '밥'과 함께 알록달록하게 걸려 있었다.
여름이 지나자 그녀는 뛸 수 있었다. 안정적으로 걸었고 '우다다다'를 할 수 있었다. 한여름 나이트 근무가 끝난 일곱 시 반에서 여덟 시 사이, 바깥이 아주아주 밝을 때 버스 정류장에서 그 화려한 폴대 옆의 그녀와 그녀의 보호자가 버스를 타는 우리를 지켜봤다. 그녀는 그렇게 여름에도, 가을에도, 눈이 오던 날에도 우리를 마중 나와 세상을 구경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시간과 돈 모두를 썼다.
다른 병동에 파견을 갔을 때, 나는 열두 시간이 넘는 근무를 한 후에 이곳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후에 그녀를 구경하고, 껴안고, 같이 걷고, 뭐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일을 돕기도 하다가 퇴근했다. '차챠 보려고 일찍 왔어'. '나 챠챠랑 놀다 갈 거야, 먼저 가.' 같은 말을 다들 많이도 했다. 엘리베이터는 더럽게 안 오고, 로비고 본관이고 사람들이 쏟긴 것처럼 가득한 이브닝 출근의 풍경, 그리고 병동 문 너머로 알록달록한 그 폴대가 보이는 순간. 짜증과 압박감이 녹았다. '차챠야!' 하고 뒤뚱거리며 아빠 손을 잡고 걷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뚱뚜', '챠차'라고 배시시 웃거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누군가를 보며 반응하는 그녀에게 돌진하지 않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쇼핑몰 위층의 아가방, 앱소바와 에뜨와를 그냥 지나지 못했다. 왜 연인들이 그렇게나 선물을 사 주는지 알 수 있었다. 이유가 있어서, 돌려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정말 이렇게 그냥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주고 싶을' 수 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점원이 애기가 몇 개월이냐고 물었을 땐 다시 대답해야 했다. 덩치가 작아 개월 수가 의미가 없었다.
우리는 그녀의 생일이 다가오자 '누가 누가 더 귀여운 거 주나'를 내기하듯 비밀스레 선물을 준비했다. 어떤 브랜드는 어떤 느낌이고 이런 건 예쁘긴 한데 정말 그때밖에 못 입고 (그런데 애들 옷은 사실상 그런 게 태반이었다. 그런 주제에 어른 옷보다 비쌌다) 어떤 브랜드는 질도 괜찮고 엄청나게 귀엽지만 오프라인에는 매장이 없다는데 어떡할래. 차차는 이런 색이 너무 잘 어울리는데 그 색이 많긴 하니까 이 색이 낫겠다. 근데 이건 벗기기가 불편해. 기저귀도 있으니까 이렇게 생긴 건 안 되겠다, 딴 거 없나. 등등의 대화를 카톡방에 노랑, 핑크, 베이지색의 원피스 사진들 사이로 잔뜩 나누고, 한여름 땡볕을 지나 출근시간 전 백화점에 들르고, 사이즈를 바꾸고, 언젠가 그 애가 한글을 익히면 읽을 수도 있는 카드를 우리 이름으로 써넣고, 입은 모습을 잔뜩 난리 치며 사진으로 남겼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그녀에게 줄 선물을 고민했다. 나 어디서 이거 봤는데 이거 사갈까. 그때 그거 이쁘던데 그런 거 집에 많으려나, 하는 식이었다. 반을 갈랐다 붙일 수 있게끔 찍찍이가 붙은 과일 모형과 주방놀이 세트, 책이라기보다는 거의 무슨 카세트나 다름없는 동요 동화책, 역시나 생긴 건 핑크퐁이 붙은 마이크지만 주크박스나 다름없게 노래가 끊임없이 나오는 장난감, 장갑, 머리끈, 머리핀, 크고 작고 더 크고 작은 인형들, 그림책, 스티커, 또 스티커. 사실 안 가지고 있는 걸 찾는 게 빨랐다.
문제는 우리 중 결혼한 사람이 없어 그런 장난감 트렌드에는 동향 파악이 빠르지 못했다는 거였다. 미미인형 같은 걸 좋아하기에는 어렸고, 티니핑을 좋아하기에도 아직 일렀다. 놀이 세트가 제일 나았는데.. 의외로 가짓수가 많지 않았다.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환자가 많지 않을 때, 바쁘지 않을 때, 그녀는 기관 내 삽관 시 기구 안에 밀어 넣는 스타일렛이나 튜브를 만지작거리면서 스테이션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바늘을 뺀 시린지(주사기)를 좋아했고 빈 검체 통을 좋아했다. 두부 한 모 정도 크기의 박스에 가득 든 소독솜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한 장씩 주는 건 받지 않았고 뭉탱이로 주는 것만 받았다.
또래 애들이 파란 옷을 입은 사람만 봐도 자지러지듯 울고, 무엇이든 병원 물품을 보기만 하면 잔뜩 소리지를 준비를 하며 겁에 질릴 때 그녀는 누군가는 사실 평생 볼 일이 없을 물건들을 잘도 가지고 놀았다. 맞다, 확대해석. 내가 꽤 멀리 생각한 게 맞다. 그래도 선뜻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아마 평생 병원을 다니며 병원과 가까이 살아야 할 가능성이 컸다. 기정사실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알록달록한 병원놀이 세트를 사주는 건 왜인지 모르게 거부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야, 이미 여기 있는 거 잘만 가지고 노는데, 하면서 결국 병원놀이 장난감은 선물하지 않았다.
그녀와 너무 가까워서 때로는 그녀가 환자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손이 많이 가는 쉽지 않은 환자였고 때로는 버거운 존재였다. 병원에 괜히 오래오래 재원 중인 게 아니라는 사실이 가끔 새삼스러웠다.
소화기관에 문제가 있어서 경구섭취를 거의 하지 못했다. 이곳은 급성기 병원이었다. 당장 급한 처치를 마치면 어느 정도는 외래에서 추적관찰을 하거나 집 근처 1차 의료기관에서 남은 치료를 마저 받도록 하는 곳. 그녀는 한 번도 퇴원한 적이 없었다.
수술 등의 근본적인 치료에 선뜻 나설 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중심정맥관이나 그곳으로 들어가는 약제를 집에서 관리하는 것도 조달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약했고 병원은 그리 깨끗한 곳이 아니었다. 그 병실에 그녀 말고는 아무런 환자가 없을 때에도 그녀는 온갖 호흡기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나 코로나에 걸렸다. 치료가 진전되려 하면 열이 나거나 다른 곳에 문제가 생겼다. 앞으로 한 발 가려하면 두 발, 다섯 발 백스텝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녀가 몇 번인가 다시 중환자실로 갔을 때 우리가 하도 그녀의 기록을 열어보자 수선생은 그녀의 오더창과 일지를 열어보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다. 소용없었지만. 우리는 그녀에게 들어가고 있는 약제와 하고 있는 처치로 그녀의 상태를 가늠했고 단체카톡방에서 그것에 대해 염려와 걱정을 섞어 떠들었다. 아무튼 안타까웠다. 나 역시 그녀가 나오는 꿈을 꿨다. 본가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엄마아빠는 젊은 애들이 남의 애를 그렇게나 귀여워하는 걸 보니 다들 시집갈 때가 된 것 같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한 번씩 묻기도 했다. 그 꼬마는 잘 있냐고.
비가 조금 왔고 잔뜩 흐린 날이었다. 소나기가 내렸다가 그쳤고 나는 1인실 저편에서 할 일을 한 후 돌아섰다. 다시 시선을 든 그 큰 창에, 무지개 두 개가 나란히 떠 있었다.
7월. 경기 남부와 서울 모처들에서 쌍무지개가 보인 날. 정말 그녀의 생일 하루 전이었다. 나는 차챠를 찾았다. 이거 꼭 봐야 해. 그래. 너는 나중에 기억할지 어쩔지 모르지. 하지만 아무튼 넌 이걸 봐야 해. 어정쩡하게 비가 내렸던 반쯤 어두운 하늘, 물방울이 잔뜩 흩뿌려진 세상 위로 무지개가 둘 겹친 광경. 그녀는 무지개가 뭔지도 몰랐고 그녀를 거기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 간호사들과 그걸 보는 보호자만 신이 났다. 우리가 흥분한 것을 보고 그녀 역시 덩달아 흥이 오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진을 그 자리에서만 서른 장은 찍었다.
사라질 장면, 사라질 순간, 그녀가 성장할 날들, 무지개의 자취, 우리가 그녀를 이곳에서 이렇게 만난 인연, 그녀 기억 속의 우리, 우리 기억 속의 그녀. 그러니까 사실 이건 세상의 많은 우연 중 하나였고, 그 어떤 의미도 없지만, 나는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무지개나 해나 달이나 똑같은 저편의 자연물임은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이곳을 스쳐가야 마땅할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이었으며 우리는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나 호들갑을 떨며 그녀가 그걸 보길 바랐을까, 그 순간을 어떻게든 박제해 놓고 싶었을까. 명확히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밖에.
그녀는 핑크퐁 '멋쟁이 토마토'를 상당히 좋아했다. 작년 상반기까지 그건 그녀의 몸이 먼저 반응하는 부동의 1위 곡이었다. 중간중간 무슨 딸기와 공룡에 대한 노래들이 그 자리를 탈환할 뻔했으나 그녀는 꽤나 일편단심이었다.
그리고 봄이 지날 때쯤 '바나나차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녀는 내가 안는 것을 싫어했다. 재원 일수와 지금까지 살아온 일수가 똑같았기 때문에 그녀는 병원 사람들의 유니폼 등을 보고 겁먹는 일이 없었다. 낯을 적게 가리는 편이었고 붙임성도 있고 애교도 많았다. 그러나 안긴 자세가 불편한 건 귀신같이 가려냈다. 나는 타고나길 요령이 없고 뭘 하든 어설펐다. 그녀가 나와 함께 찍힌 사진에서 그녀는 항상 오만상을 찌푸리며 잘못된 불가사리처럼 온몸을 뻗대고 있다. 그 프레임들 안에서 웃는 건 나뿐이다. 그래서 그녀를 부득이하게 데리고 있어야 할 때는 나는 일단 노래를 틀었다.
바난나차차, 바난나차차, 다 같이 랄랄라 랄라 후. 뽀로로와 함-께! 돈을 많이 썼는지 사운드가 빵빵했다. 차차차차챡 드럼 소리가 나오면, 내 무릎에 앉아 이면지에 뭔가를 그리려고 하거나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검체 바틀을 가지고 노는 그녀가 몸을 흔들거렸다. 나도 속으로 실컷 춤추고 싶을 정도로 신나는 노래였다. 바난나찻차! 다 같이 랄랄라 랄라 후! 사랑해요, 사랑해요, 엄마아빠빠 사랑해요.
지지부진한 듯하다가도 진행되던 치료가 안정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달에 한 번은 열이 나거나 독한 항생제를 추가해서 쓰던 게 꽤나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혹시나 재수가 없을까 다들 언급은 피했지만, 아무튼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말하자면- 아프지 않았다. 진료과에서도 퇴원 계획을 슬슬 잡았다. 이런저런 과정을 또 거쳐서 퇴원이었다가 보류였다가 또 퇴원이었다가 결국은 전원으로 가닥이 잡혔다. 어쩌다 보니 이 병동에서 그녀는 두 번의 성탄절을 보냈다.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가 바나나차차의 자리의 빼앗으려 할 때쯤, 그녀는 독한 감기에 걸렸고, 전원이 조금 미뤄졌다. 우리는 역시나 또 누구도 시키지 않은 그녀의 환송회를 준비했다. 다 모으면 과장 없이 몇 만 장은 될 각자 휴대폰의 그녀 사진들 중 가장 예쁜 것들을 골라 포토북을 만들고 또 선물을 준비했다. (그녀는 내 휴대폰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사람이다) 한여름 에어컨이 빵빵하던 쇼핑몰에는 이제 눈길에서 신을 수 있는 패딩부츠와 작은 스키장갑과 두꺼운 샤워가운들이 모여 있었다. 언제 여길 또 이런 기분으로 올 수 있을까 생각했다. 시간이 참 많이 지났다고 느꼈다.
전원 후 한 달이 조금 지나 그곳의 지하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나를 똑같이 '차챠'라고 불렀다. 불렀다기보다는 나를 보면 차챠,라고 말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불렀다고 믿고 싶다. 우리는 모두 그녀가 각자 본인을 어떻게든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녀는 양손 주먹을 세워 맞부딪히는 제스처를 언제부턴가 반복했는데, 아무튼 그건 나를 지칭하는 움직임이었다. 대체 내가 왜 그 '주먹깡깡'으로 각인된 것인지 병동 사람들은 모두 몇 개월간 상당한 의문을 가졌는데, 지난달에야 그 미스터리가 풀렸다. 내가 진단검사실과 하던 통화 중 잔뜩 -물론 그러면 안 되지만 그건 정말 전적으로 그쪽 잘못이었다- 화가 난 상태였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내 쪽을 보고서는 주먹을 맞대며 '누구누구 선생님 화났어, 화나서 싸워. 이렇게. 들어가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나를 '바나나 차차 틀어주는 싸우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게 되었다. 비록 나중에는 다 잊어버리겠지만. 뭐.. 이런 부끄러운 기억마저 그녀가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여했다는 것이 참 반갑고 행복했다. 행복하다.
알콜솜을 '알코'라고 하던 그녀는 이제 다른 병원의 환자복을 입은 영상에서 '감샤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럴 줄 알았다. 야, 그거 우리가 다 가르쳐줬어. 여기서 반토막으로 말하다가 이제 올해 다른 곳에 가서는 아마 폭발적으로 말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기야 했지만, 이렇게 빨리? 질투가 났다.
그토록 알려주고 싶었던 '감사합니다'. 주제넘은 생각이나마, 네가 그대로 커서 사회에 잘 섞여 들기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말.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까지. 너, 착실히 세상에 나갈 준비 중이구나?
신기한 일이다. 왜 이렇게 주고 싶고, 더 신경을 쓰고 싶고, 생각이 나고, 보고 싶고, 찾아가고 싶고, 또 궁금한 것인지. 내 애도 아니고 그녀는 다루기 쉬운 대상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웃는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잘 잤는지 열이 안 났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쉬는 날에도 갤러리를 열어 잔뜩 웃고 있었고, 지금이라도 잠깐 병동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사랑이구나. 돌아오는 것이 없어도, 아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답받는 이 상태가 너무 행복해 자꾸 주고 싶고 보고 싶은 이런 상태 역시 사랑이겠다고 느꼈다.
3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일했고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일 년 반이다. 그녀가 그만큼 키와 체중을 불리고, 눈을 뜨자마자 지내던 이곳에서 나가기까지 그녀도, 우리도, 나도 꽤 성장했다. 그녀는 정말, 단지 환자일 뿐이지만, 자꾸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만나서 반가웠고 사랑했다고. 앞으로도 잘 지내라고. 거기가 대학로든 이 병원 근처의 집이든 언제든 근황을 궁금해하고 있겠다고. 그리고 또, 사랑한다고.
대체 뭘 배웠는지 딱 잡아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가르쳐 줘서 고맙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 스스로 반성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내 연습 대상 같은 게 아닌데 왜 그렇게 느끼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이제 대충 알겠다. 절대 다 담을 수 없는 그 일 년 반을 대충 회상한 지금에야 깨닫는다. 나한테 사랑을 가르쳐 줬구나.
우리도 네게 사랑, 또는 따뜻한 기억이었으면 좋겠다.
사랑해.
고마워. 사랑해. 더 아프지 마.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