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조건
아, 아빠를 많이 닮았구나.
햇빛이 들어온 휴게공간에 그녀와 이목구비가 많이 닮은 나이 든 사내가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었다. 병원 지하에서 파는 수제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으며. 그녀는 콧줄을 꽂고 벽돌만 한 보조배터리를 연결한 태블릿으로 '타요'를 보고 있다.
"이게 보조배터리예요?"
"우리가 좀 크게 놀아요."
엄마는 가볍게 받아쳤다.
"코..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살도 좀 쪄야 하고."
"먹고 싶으면 얼른얼른 나아야지, 안 그래요. 공주님?"
공주님? 아. 이 친구.
"자기도 알아요, 자기가 공주님인 거. 우리집 복덩이 누구?"
"복덩이 공주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해? 해봐요."
아빠가 그녀를 복덩이 공주님이라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아, 당신이군요, 복덩이 공주님.
공주는 또 있었다. 가냘프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아픈 내색을 잘 안 했다. 예뻤다. 학교에서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이 사람이라는 것을 애들이 모른다면.
어떤 편견을 주려는 게 아니라, 아무튼 그녀의 아버지의 외양이 그런 인상을 줬다. 불그스름한 얼굴, 스포츠 브랜드의 민소매 티셔츠 (겨울이었다), 굵은 금목걸이와 금색 시계, 반무테 안경, 왁스를 바른 것처럼 짧게 솟은 헤어스타일, 서 있기만 해도 위압감을 주는 체구.
애는 여기저기가 아파서 입원을 했다. 온갖 진료과로 협진이 나고 매일같이 채혈과 검사를 거치다가 결국은 혈액종양내과로도 협진이 났다. 이번 주에 골수검사를 하게 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갈 때마다 암에 대해 물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만 대답을 했다. 인터넷에는 항상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걸 다 읽었을 보호자에게 어설픈 대답을 하느니 입을 다무는 게 맞았다. 초등학교 6학년. 어딜 가나 아빠와 함께 다녔다.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빠가 무서워 못 물어봤다. 있어도 아빠 앞에서는 대답을 안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택배 상자만큼 마른 소녀는 고구마가 든 포대자루처럼 거대한 아빠와 함께 조잘대면서 다녔다.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좀 궁금했지만 바빠서 그런 걸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항상 아빠와 장난을 쳤고 아빠는 딸 앞에서는 어떤 험상궂음이나 무뚝뚝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눈앞에 없을 때, 한밤중에 복도를 거닐다 내게 뭔가를 물어볼 때는 말투와 얼굴 모두가 잔뜩 어두웠다.
아무튼 그녀는 결국 골수검사까지 했다. 그리고 아빠는 낯빛을 되찾았다. 암이 아니라는 것이 모든 근심을 풀어 준 것 같았다. 그는 퇴원 서류를 묻는 내게 갑자기 말했다.
"쟤를 내가 휴대폰에 뭐라고 저장했는지 아세요?"
"네?"
"뭐라고, 저장했을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게 불러요, 가끔."
"음.. 우리 이쁜 딸, 하트?"
"유리공주요, 유리공주."
유리처럼 깨질 것 같은 소중한 딸이다 이 말씀이신가. 그렇지. 저렇게 말랐는데.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 있죠, 거기 들어갔잖아요. 그 유리 상자 속에서 저 쪼끄만 게 울지도 않는데, 제발 살려만 달라고 맨날맨날 빌었어요."
"아하, 거기 있었어서 유리공주예요?"
"그렇죠. 그리고 지금도 속을 썩이잖아. 평생 유리공주야."
"아하하, 이제 안 아파야죠."
아빠는 활짝 웃었다. 진짜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생 걱정거리고 아주 평생 속을 썩인다니까요, 저게.라고 하지만 참 즐거워 보였다. 그 유리공주님은 아실까, 아빠가 자기를 어떤 마음으로 생각한 그날들의 부피를, 간절한 바람들을. 나도 모르지만. 아가씨, 사랑 많이 받았군요. 든든하겠어. 아주.
온 나라가 독감으로 들끓기 전, 지진의 전조 증상처럼 독한 호흡기질환들이 먼저 약한 개체들에 기생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독감, 감기, 또 독감, 기관지염, 폐렴. 보통 사람들이면 주사약 한 번 맞고 열과 감염력과 증상이 한층 가라앉을 질환들이 그들에게는 질기게도 들러붙어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원래 숨 쉬는 건 문제가 없었던 애였다. 그냥 입으로 보통의 음식을 먹었고, 마지막 경련은 몇 년 전이었고, 숨 쉬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폐렴에 걸렸다. 가래가 잔뜩 찼는데 도통 뱉어내지를 못해 아무리 석션을 해 줘도 소용이 없었다. 밤이면 산소포화도가 뚝뚝 떨어져 중환자실을 가느냐 마느냐를 논의했지만 이미 소아중환자실은 만실이었고 다른 곳도 자리가 없었다.
당직 교수가 검진을 하고, 담당 간호사가 들러붙어 몇 시간 내내 가래를 빨아들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친구를 처치실로 빼서 호흡기내과 교수의 지휘 하에 석션을 하고, 산소를 대 주고, 폐에 들러붙은 가래가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며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그녀는 각목같이 마른 팔로 처치를 하려는 우리 손을 잡아챘고, 다른 간호사는 또 그 손을 잡아 붙들고 할 일을 했다.
구강섭취는 안 한지 오래였다. 흡인 위험이 있어 비위관으로 유동식만 섭취했다. 벌린 입의 치아와 잇몸과 혀 사이로 침이 튀었고 그녀는 자꾸 몸부림을 쳤다. 하긴, 나라도 누군가가 저렇게 때리면서 뭔가를 입과 코로 쑤셔 넣으면 싫긴 하겠다.
비인간적이었다. 과연 인간적인 건 뭘까. 콧구멍에 꽂힌 관, 입에 물린 플라스틱 관, 고무 카테터, 기계, 또 기계.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애 눈에 눈물이 찼다. 불쌍했다. 여럿의 다른 환자도 봐야 하는데 이 친구에게 붙어 소용없는 듯한 처치만 하고 있는 내 처지도 그리 훌륭하지 않았다. 누굴 불쌍하다고 생각할 입장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참 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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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밴드를 감은 워치에 (사실 시계를 보거나 문자를 읽을 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분홍색, 보라색, 흰색, 금색 구슬이 엮인 비즈팔찌를 하고 있었다. 이게 그 친구 취향인 거냐고 물은 적 있었다. 엄마는 '저 닮아서 완전 공주공주한 거 좋아해요. 언니는 완전 반대고, 아빠 닮아서.'라고 했다. 그녀는 보라색 곰돌이 모양을 한 내 사원증 홀더로 손을 뻗었다. '이거 쓰고 싶으면 여기서 일해야 돼'라고 했더니 엄마는 '안돼 안돼, 병원에 너무 오래 있었어, 가야 돼.' 라며 웃었다.
그 밤을 지나 그녀는 중환자실에 갔다. 기관절개관을 박고 올 줄 알았다. 그때 엄마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다.
길랑 바레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나도 배운 것 말고는 잘 모른다. 아무튼 확실한 건 그 진단을 받은 애들은 모두 초반에 엄청나게 짜증을 내고, 생떼를 부리고, 또 짜증을 내고 상당히 찡찡거린다는 점이다.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한결같이 그랬다. 애들이라 표현을 자세히 못 해 어떤 양상으로 아파서 그러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 친구라고 다르지 않았다.
혈압을 재는 것도 체온계를 귀에 꽂는 것도 잔뜩 싫어했다. 그 짜증을 엄마는 다 받아 줬다. 한밤중에 그 친구는 잠을 못 자고 내내 낑낑거렸다. 짧은 혀로 '맛사지 해 줘, 주물주물 해 줘'라고 했다. 엄마는 한 번을 들어 넘기는 일 없이 부스스 잠에서 깨어 '여기, 여기? 이쪽?' 하며 충실히 그를 돌봤다. 뭐, 항상 그렇지만, 구태여 자는 애를 깨운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걔도 걔지만, 하루종일을 그렇게 그 친구의 곁에 있는 그의 엄마에게.
보호자가 아빠로 바뀐 밤이었다. 그전날과는 비교도 안 되게 병실이 조용했다. 안 아픈가? 잘 자나?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닌데, 저녁때까지도 똑같았다고 인계받았는데. 괜찮아진 게 아니었다. 그때 알았다. 아, 사람 봐 가면서 그러는구나. 좋은 표현은 아니다만.
아빠는 그의 짜증을 받아 주지 않았다. 똑같이 짜증으로 응수했다. 훈계를 하는 차원의 짜증이 아니었다. 피곤과 지겨움이 섞인 반응이었다. '낮에나 좀 그러지 왜 안 자고 지금 해 달라고 해'라고 했다. 애는 낮에도 해 달라고 했어, 엄마한테. 라고 대답했다. 새벽에 그 병실에 들어갔을 때 몇 번이고 그런 대화를 다시 들었다. 그다음 날 밤에는, 애만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다. 체온계를 밀어 넣어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무서워하는구나, 아빠를.
당연히, 그의 아빠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가 중환자실로 가야 했을 때 아빠는 시뻘게진 눈으로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서는 얼마나 있다가 올 것 같냐는 하나마나한 질문을 했었다. 그 눈에서 보인 감정은 분명 엄청난 걱정과 두려움이었다. 가끔 잔뜩 큰 어른들이 애처로워 보일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이 그렇다.
그리고 어느 점심 때는 그에게 이 반찬 저 반찬을 집어서 카레라이스 위에 올려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애가 아빠를 좀 무서워할 수도 있지. 하지만 조금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잖아. 나는 아프지만 아빠는 옆에서 쿨쿨 자고 있고, 나는 그런 아빠가 깰까 봐 무서워 누워만 있던 밤을 나중에 기억하는 건. 아침에 아빠가 자리를 비웠을 때, 오늘은 안 아팠냐고 물었다. 아팠다고 했다. 그래.
나는 내가 얼마나 다정함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았다. 애를 키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로. 내가 나를 돌보는 것과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확연히 다르다. 엄마 아빠가 내게 별 뜻 없이 냈던 짜증이나 했던 말들이 나중에까지 기억에 남은 걸 떠올릴 때, 혹은, 돌아보니 엄마아빠는 미안해했던 일들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기억하고 있을 때 그 괴리가 쉽지 않겠다고 느꼈다.
사람이 항상 예쁘고 좋은 말만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싶다가도, 의도한 것과 아예 다른 결과를 내는 그 육아라는 활동이 상당히 생경하게 느껴졌다. 해본 적 없고 아주 먼발치에서 짐작할 뿐이지만, 내가 던지는 다트가 어디에 어떤 식으로 얼마나 박혀 있을지를 모른다는 거잖아. 그리고 그런 활동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
물론, 그 대상이 다트가 아니라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무럭무럭 자라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점도 관건이다.
그녀는 손가락을 틀어 본인을 가리켰다. 그리고 오른손을 휠체어 부근에서 틀었다.
"맞아, 우리 집 복덩이 누구? 근데, 그건 삐끼삐끼잖아. 선생님 보여주게?"
".. 아버님이 그걸 아세요?"
"이 사람 저보다도 잘 알아요. 엠지예요, 엠지."
"복덩이, 삐끼삐끼 보여줘. 다른 것도 있는데. 아빠랑 한 거."
그녀는 다행히 아무것도 꽂히지 않은 목을 옆으로 틀고 오른팔을 굽혀 앞뒤로 움직였다.
"아이, 그거 아니지. 포인트를 잘 살려야지, 이렇게."
그녀의 아버지는 여기서 처음 봤다. 그게 자택에서였든, 이곳에서처럼 간간이 휴게 공간에서 마주한 시간이든, 그 시끄러운 영상을 틀어 놓고 그걸 열심히 인지가 부족한 딸에게 가르치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했다. 음.
"이쁜 짓, 이쁜 짓도 보여드려. 이쁜 짓 어떻게 해."
그리고 그녀는 오른손을 다시 들어 볼 쪽으로 가져갔다.
"아, 최고네. 이런 걸 언제 다 연습했어. 대단한데."
"우리 복덩이 공주 똑똑해서 얼마나 빨리 배우는데요. 아빠랑 한나절이면 하지, 그치?"
그녀와 똑같이 생긴 아버지가 웃었다. 나는 내가 너무 빨리 동정했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나 사랑받고 있었는데. 돌아서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랑을 줄 수 있는지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인가, 나는?
바깥에서 그녀가 어떻게 얼마나 아픈 환자로 취급 받든, 그녀는 언제나 이 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는 복덩이 공주이며 이쁜 귀요미잖아.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할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저런 자세를 가지는 게 좋겠다고, 내게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아직 잘 모르는 사랑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얕은 바람을 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알기 힘들잖아. 말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어떤 사랑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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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을 당한 사람들은 도처에 있다. 병동 환자들 중에도 있으며, 어쩌면 내게 말하지 않았으나 주변인들 중에도, 유명인들 중에도 있다. 내 애라도 손찌검과 분노를 참지 못한 것이다. 낳았다고 애정과 자제력이 절로 생기는 게 아니겠지. 사랑이 다 해결해주지는 않을 거고.
내게는 그런 게 존재하는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건 정말 아무나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나한테는 그럴 능력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