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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도 Dec 17. 2024

1/2. 롤린롤린롤린

라떼는 그렇게 구르고 굴렀어






기다리고 있잖아, 베이베. 롤린롤린롤린, 롤린롤린롤린.

차에서 '롤린'을 들으며 대학을 어떻게 갔는지, 아까 식당이 어땠는지, 날씨가 어떤지 이야기했다. 사실 그 대화보다 이 쫀득한 노래가 더 듣고 싶었다. 카페에서 주먹만 한 크기에 9000원 하던 케이크와 커피를 마시고, '소울'을 보러 갔다. 아마 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겠지. 그리고 며칠 뒤에 나는 있었던 일을 전화로 잔뜩 이야기하면서 질질 짰다. 그날 밤 나는 아까 너무 피곤해서 그랬다고, 미안하다고 전했고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나는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본가로 가던 기차에서 상큼한 얼굴의 그녀들이 시원하게 웃으며 노래하는 '롤린' 무대영상을 보며 같이 웃었다. 그리고 또 앉아 있다가 울었다. 3월 마지막 주였다.



몇 달이 지나 나는 본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사실 죽고 싶었다. 바깥에서 엄마가 저녁을 만들고 있었다. 빨리 먹고 다시 기차에 타야 했다. 에드 시런의 새 싱글 공개가 일주일 남았다. 눈에 잔뜩 꺼먼 칠을 하고 송곳니를 끼운 채 꽃분홍색 정장을 입은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귀여워 봤자 뭐 얼마나 귀엽겠는가. 그는 외모로 뜬 가수도 아닌데. 하지만 나는 그 뮤직비디오를 보기 위해 살아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새 곡 공개 소식을 접한 그날부터 내가 사는 이유였다. 풀앨범을 공개할 때쯤에도 나는 여길 이렇게 다니고 있을까 궁금했다. 뮤직비디오가 한 시간쯤이면 안 되는 걸까 생각했다. 정말 죽고 싶었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나를 죽여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마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도 울었을 것이다.












데이 근무, 새벽 네 시 사십 분에 눈을 떠서 다섯 시까지 병동 물품보관실에 도착했다. 일곱 시부터 근무 교대 시작이었고, 나와 입사동기들은 빠르면 저녁 7시 전후, 보통은 9시를 넘겨 퇴근했다. 바깥의 칼국수집이 궁금했으나 8시 반이 마지막 주문이었다. 데이 끝나면 먹자,라고 했으나 한 번도 먹지 못했다. 이브닝. 열두 시 또는 열한 시까지 역시 '물보'에 도착했다. 한 시 반부터 '물품카운트'를 하고 밤 2-3시 사이에 퇴근했다. 다섯 시 반에 돌아간 적도 있으며 한 시정도에 퇴근하게 되는 날은 참 행복했다. 나이트. 저녁 여덟 시 반까지 도착. 어차피 '물보'는 못 간다. 데이 때 할 일을 못 끝낸 불쌍한 근무자들이 컴퓨터를 쓰고 있으니까. 퇴근은 열 시쯤. '이걸 나한테 이렇게 넘기면 난 일을 어떻게 하라고? 난 몰라. 가 해, 선생님이 처리하고, 다 노티하고 다 오더 받아 놓고 가세요. 알겠어? 니가 해서 나한테 확인받기 전까지 난 시작 안 해. 알아서 정리하란 말이야.' 같은 말을 듣고 꾸역꾸역 뭔가를 해놓고 병원을 나서면 세상이 하얬다. 뭐, 오전이니까, 아침이니까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곳을 오래 다니지 않았다. 2월부터 8월 마지막 날까지 일했다. 9월부터 그만 나가겠다는 내게 수선생은 '3개월 전에는 말해야 하는 거 몰라?'라고 했다. 나는 그들과 소통할 생각이 없었다.

올해 입사했으니 원하는 날 휴일을 신청할 권리 따윈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병원의 2차 심사에서 통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막무가내로 오프를 달라고 했다. 우겨서 오프까지 받아냈는데 면접 떨어지면 어떡하지, 생각했다. 그러나 걱정보다 매일매일의 출근이 더 독했다. 수틀리면 그냥 때려치울 작정이었다. 객기가 아니고 현실이었다. 전체 간호사 20명 중 8명이 나를 포함한 신규였다. 뽑아놓으면, 나가고, 뽑아놓으면, 나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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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년도에 중도 탈락했던 병원에 다시 지원해 합격했다. 어차피 그만둘 곳이니 돈이나 벌자 하는 생각에 10월까지는 다니려 했다. 그래, 3개월이든 몇 달이든 이젠 다시 안 올 곳이니 힘들어도 뭐 어떻겠나, 하고 넘길 수 있겠다고 느꼈다.

아니었다. 그만두겠다는 내게 수선생은 데이로만 떡칠된 근무표를 주었다. 그곳의 데이 근무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본래 교대시간은 3시였으나 연차가 대충 찬 사람들도 다섯 시를 넘겨야 옷을 갈아입었다. 바깥에서 그 근무표를 확인한 나는, 그제야 다른 곳으로 이직하려 한 다른 사람도 그런 근무를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고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안 볼 인간들이었다. 연줄도 인연도 다 떼어먹을 것들이나 있는 구석에서 있던 사람들이나 갖는 거였다. 이런 개 같은 곳에서 만난 선임이며 수선생 따위 바깥에서 어떤 식으로 어떻게 마주치든 무서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나는 수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녹음을 켠 채 말했다. 아직 병원을 나간 게 아니었고, 나보다 윗사람에게 그렇게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손이 부들거렸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9월부터요. 무슨 소리니, 그게. 왜 같은 말 또 하는.. 근무 일부러 그렇게 주신 거잖아요, 데이 근무 어떤지 모르시는 거 아니잖아요.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내가 느네한테 뭘 편파적으로, 아니라고 하신다고요. 유정언니한테도 그렇게 주셨잖아요. 8월까지만 하겠습니다.  참.. 그렇게 안 봤는데 맹랑한 데가 있네? 괘씸하고. 저번에 오프도 그렇고, 선생님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의 변곡점에 선 기분이었다. 교보문고 앞에서 사람들이 지나갔다. 습했다. 뱉고 나니 시원했다. 어차피, 나간 후에는 죽어도 돌아가지 않을 곳이었다.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8월 첫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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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며칠 후, 데이근무였으나 8시까지도 병동 복도의 컴퓨터 앞에 있던 내게 A4 반만 한 크기의 사직서를 던졌다. 채워서 인사팀에 제출하세요. 나는 앉아 있던 의자 아래로 팔랑인 그것을 주워 감사합니다, 했다.












나와 동기들은 병원에 도착하면, 탈의실 냉장고에 붙은 근무표를 보며 오늘은 누구에게 인계를 주는지 다시 확인했다. 퇴근 때는 내일, 또는 오프 후 복귀해서 누구에게 인계를 줘야 하는지 확인했다.

나는 인계 시작 전에 녹음기를 켰다. 공부 왜 안 해, 이따위로 일하고 월급은 나랑 똑같이 받니, 그냥 때려쳐요, 선생님. 너 그 머리로 대학은 어떻게 졸업했어? 그냥 내일부터 출근 안 하면 안 돼? 나 진심이야. 그만 나와도 돼, 수쌤한테 내가 말할게. 집에 가서 뭐 해? 너 안 무서워? 이것도 모르고 일하는 게? 너 진짜 큰일 내겠다. 난 너 같은 애랑 일하는 게 너무 힘들어, 알아?



둘째 달에 나를 가르친 프셉은 내내 소리를 질렀다. 그녀와 함께 일한 지 이틀째부터 나는 늘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직후 휴대폰은 비행기모드로 전환한 채 녹음기를 켰다. 어차피 일하는 도중에는 받을 수 있는 전화도 연락도 없었으며 중요한 건 그녀가 나한테 말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담는 거였다.

나는 그렇게 오래 사람을 싫어해본 적 없다. 싫어하는 것에도 에너지가 든다. 힘들다. 그러나 그녀는 다르다. 3년이 훨씬 지났다. 지금도 나는 그녀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녀가 심각하게 아팠으면 좋겠고, 결혼을 한다면 상대가 바람을 잔뜩 피우는 더러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으며, 사고라도 당한다면 의식은 멀쩡히 살아서 아주 오래 고통스럽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사는 거처에 불이 났으면 좋겠다. 죽길 바라지 않는다. 어설프게 살아난 불구가 되어 절망 속에 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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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서 오래 있다가 그 병동으로 온 A는 매번 '너네 같은 인력 필요 없어, 하기 싫으면 제발 내일부터 그만 나와. 아무도 안 말리거든'를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전에 은행원이었다던 B는 동기의 사원증을 던진 후 빼앗고 그녀와 나를 새벽 다섯 시가 되도록 퇴근시키지 않았다. '넌 공부를 안 해? 이럴 거면 다니지 마, 그냥. 이렇게 할 거면 인계도 주지 말고. 어? 이거 무슨 뜻인진 알아? 왜 해야 되는데? 알면서,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야? 어쩌라고. 아, 짜증 나. 그러고 앉아 있으면 어쩔 건데요, 니가 다 해 놓고 가라니까?'라고 했던, 수없이 그렇게 말했던 C. 그녀는 그 해에 구찌 가방을 받고 결혼했다. 그걸 늘 떠들어댔다. 혹시 낳게 될 그녀의 아이가 아주 악독하도록 통제불능이길 바란다. 그들 모두가 어딘가에서 각자의 개인적인 불행들에 오래 우울하고 속이 문드러졌으면 한다.












9월, 주민센터를 찾아 할 일을 마친 나는 그 병동의 조무사 선생님을 마주쳤다. 그녀는 내게 거듭해서 '잘했어, 너무 잘했어. 너무 축하해. 여기는 너무너무 힘들어. 가서 오래오래 일해. 고생했어. 아휴' 같은 말을 했다. 비가 오는 날었다. 그분은 내게 우산을 들고 있어 보라고 하고는 내게 약과를 두 개 건넸다. 맛있었다.

며칠 뒤 나는 아빠의 차에 짐을 잔뜩 싣고 6개월간 몸담았던 그곳을 떠났다. 영원히.. 는 아니었다. 배송지 주소를 바꾸지 않아 10월에 서울로 갔을 때 한 번 들러야 했었다. 오프 날이면 울면서 그 기숙사 건물을 나서고 들어오던 내가 살던 곳. 망한 박물관을 보는 기분이었다.


웃긴 건 근무하는 날은 울지 않았다는 점이다. 쉬는 날, 잔뜩 메모한 것을 들고 카페로 가던 길거리에서 울었고, 지하철에 앉아서 울었다. 서울이 너무너무 싫어 입석표를 결제하던 기차역에서 울었다. 겨우 두 시간 있다가 떠나야 하는 본가에서 밥을 먹다가 울었다. 친구와 마주 보며 이야기하다 울었다. 웃다가도 울었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그곳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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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 수 있다. 이 몸 그대로 그때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절대 능숙하게 일할 수 없다는 것을.

매일매일, 몇 시간은 일찍 출근해 '환자파악'을 한다고 해도 그녀들에게 인계를 주는 건 늘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알 필요도 없는 것들을 모른다고 비난하며 을러댔고, 공부하고 가라며 윽박질렀다. 종이로 검사 동의서를 받고, 기송관이 없어 모든 검체를 사람을 통해 내렸다. 어쩌다 몇 가지 항목이 필요한 동의서 중 하나가 누락되면 이송요원은 그대로 환자를 데리고 병동으로 돌아왔다. 전자 동의서로 받고 전산으로 그걸 확인할 수 있으면 그런 일은 충분히 줄일 수 있었다. 사람이 오가다 검체가 없어지면 '내 책임'이었다.



막내라서 일이 미숙했으나 막내라서 해야 할 일은 더 많았다. 그 막내들이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느라 출퇴근은 늦어졌고, 정말로 해야 할 일이 지체되었으나 들은 '니가 이거라도 안 하면 뭘 할 수 있어'라는 반응이었다.

간호사라는 직종이 원래 이런 건지, 이 병원이 이런 건지 아직은 알 수 없으니 일단 이곳이 아닌 곳에서 일해 봐야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그곳의 고됨이, 단지 나의 미숙함 때문만이 아닌 것이 보였다.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나의 프리셉터(사수)들이 답답해하고 성질을 참지 못했던 것도 이해는 한다. 그들에게도 저 환경은 쉽지 않았을 테니까. 중환자실까지 통틀어 그 병원 전체에서 가장 바쁘고 중증도가 높은 곳으로 꼽히는 두 부서 중 하나였다. 본인들이 혼자 해도 제때 끝날까 말까 했던 일을 쓸모도 없인력을 가르치며 처리하는 건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었겠지. 그러나 나는 매 순간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러지 않겠다고. 그들이 나를 '혼낼' 때 일그러지던 표정과 잔뜩 올라가 우스운 목소리, 아무리 언성이 높아지고 부적절한 단어가 나와 눈 하나 깜짝하지 , 세상 엄청난 일을 하는 것처럼 모르쇠 한 채 스테이션을 오가던 다른 인간들과 수선생을 볼 때마다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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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나는 벌어 놓은 돈을 쓰며 매일 카페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죽이 일상을 보냈다. 서점에 갔다가 그 아래의 옷가게들을 구경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읽고 싶었던 책읽었다. 자전거 자주 탔다. 정부청사역에서 나와 엑스포 다리를 건너 신세계백화점까지 쭉 달렸다.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한 대학병원을 지났다. 이마트 근방, 그보다 더 전에는 월마트가 있던 근처. 가족들과 장을 보러 다녀왔던 편안한 주말 저녁 풍경을 이뤘던 그곳. 그 병원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저길 다니는 사람들은 몇 시에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날이 춥다고 느낀 어두컴컴한 오후, 그 병원의 간호사가 자살했다는 뉴스가 떴다.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겠지. 그러나 나는, 도무지 도망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환경의 냄새를 안다. 내릴 수 없는 기구에 올라탄 것만 같은 그 기분을 안다. 차라리 죽이지 왜 죽었어,라고 생각했으나.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일각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걔는 일을 못 했고 말을 어떤 식으로 했고 태도가 아주 나를 화나게 했다고. 사람들은, 어떤 이들은 정말 가끔, 꽤 자주 그런 식으로 악마 같다.  












병원 이외의 곳에서 일해본 적이 없다. 사람을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것이 그 환경의 특성인지, 아니면 어디든 똑같은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걸 모르거나, 알고도 멈추지 않는 나쁘고 멍청한 사람들이 내가 지나온 일터에 너무 많았다.

나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일하고 있든 그 모습을 닮지 않겠다고 다시 생각했다. 그들과 절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적어도 이 일로 월급을 받아 사는 한은 그런 물은 들지 않게 정신 차리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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