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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몫

원한의 대가

by 이븐도





늘 영화를 바깥에서 봤다는 걸 알았다. 재미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이 그새 늦어 지하철이 끊겼다. 매번 달리던 길을 터덜거리며 걸었다.

비가 내리다 말다 해서 미치게 습했다. 집에 오니 발목 뒤축에 모기에 물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다음날인가에 호숫가를 달리며 생각했다. 저 시꺼먼 물 안에 그 사람의 손가락 마디마디? 그러니까, 어딘가 살아있긴 할 텐데.






그 날인가, 아니면 다른 날인가. 세상에 무례해서 죽어 마땅한 놈들은 너무나 많았다. 횡단보도를 멀쩡히 걷다가도 치일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번호판을 보이며 쌩하니 지나가는 승용차 뒤꽁무니를 보며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떠올린다. 저런 새끼들은 왜 안 죽지? 죽고, 죽을 때까지 고통받아도 모자란 개체들이 너무 많았다. 너 아니면 니 자식이라도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니가 사랑하는 어떤 대상?



열받는 사실이었다. 상처를 준 대상들은 멀쩡히 살아가는데 왜 나는 알아서 자생해야 하는가. 영화를 보며 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상한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그 얼굴들을 한 이들을 대상으로 이런저런 상상들을 하느라. 제가, 열한 명을 죽여서요. 하는 컨셉이 꽤나 심한 듯한 목소리의 남자와 특종 쫓는 여자의 독대를 두 시간 동안 보는 동안, 실제로 내 머릿속에서 지나간 건 그런 영상들이었다. 생각보다 원한 살 짓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걸 알았다.


엄청 많던데? 하다못해, 본가 앨범의 노란 줄무늬에 흰 가디건에 노란 바지의 유치원 원복을 입은, 앞머리에 브릿지를 넣은 한 남자애 얼굴까지도. 지금, 그럼 스물여섯인가? 잘 지내려나? 나는 그 누구도 잘 지내길 바라지 않았다.






남자는 사람을 잔뜩 죽인 이답게 미친 것처럼 말끔한 외형으로 등장한다. 너무 전형적이라 뭐야, 했다. 이렇게 재미없게 간다고? 뭔 코스프레야, 뭐야. 놀랍지도 않고 신기하지도 않았다. 저런 또라이니까 그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인터뷰를 하자며 떠들지, 병신. 캐스팅을 잘못 한 거 아닌가 생각했다. 애초에 역할 자체도 센데 저런 인물을 썼다고?


칼정장에 독한 향수를 두 가지 겹쳐 뿌려놓은 느낌. 너무 강하고 피곤할 정도로 거부감 드는 외형. 그랬다. 그런데, 어차피 보다보니 그런 건 눈에 안 들어왔다. 그렇게 스크린 밖에서 팔짱이나 낀 것처럼, 평소 하던 대로 이건 이래서 별로고 저건 저래서 어땠고 하는 식으로 관람할 수가 없어서.




영화 파과를 봤을 때 주인공 남자의 행태가 너무 꼴보기 싫었다. 나는 그 영화를 관람한 게 아니었다. 실컷 욕밖에 안 했다. 방역? 그 개념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던 게 기억났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이 하는 짓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치료. 내담자를 상처입힌 사람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주는 것. 나는 많은 장면들에서 눈을 감고 있었으나 상상은 할 수 있었다. 그 새끼도? 그 놈도?

아직 숨이 붙은 채, 나랑 같은 언어를 쓰면서, 비슷한 시간에 삼시세끼 밥을 먹고 눈을 붙이면서 잘 살아 있을 그 대상들. 보이스피싱범. 어린 내 동생을 괴롭힌 그 유치원생. 왜 파과의 그 남자가 그렇게나 기괴한 방식으로 시체를 도륙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내 상상력조차 묶어놨던 거 아닐까, 사실.






조여정은 중반 이상까지는 냉정한 자세를 유지한다. 자신의 딸이 언급되기 전까지. 나는 그 여자가 한 방에 있는 그 살인범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의아했으나, 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이제 그 여자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시점부터 영화는 흥미로워졌다. 나한테. 나는 많은 이야기를 외부에서 소비했거든. 그 여자처럼. 그러나 화면 속 서사가 개인사와 닿자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 참 간사하다고 느꼈다. 몇 번이고 더 힘들게 죽길 바랐다. 과거형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다음 날도, 이틀 후도 그랬고.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도.


열두 시가 넘어 축축하고 습한 길을 걸어 집으로 오는데, 콘서트를 보고 온 때랑 기분이 비슷했다. 아무것도 안 남은 느낌. 비슷했다. 그 때는 행복해서 그랬고, 그 영화를 본 이후에는? 이유를 딱 잡을 수는 없었으나 기분은 비슷했다. 아직도 생각한다. 그게 정말 있던 일인가, 아닌가. 맞지. 있었던 일이다. 그 일 때문에 죽고 싶었고, 아마 살면서도 자주 그럴 것이다. 그 새끼는 어디선가 멀쩡하게 살아 있겠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감상을 남길 수가 없었다. 보고 온 지 일주일이나 지났다.






죽거나 죽은 사건들. 피해자의 친부는 본인의 딸이 살해당한 방식을 재현했다. 장교는 유서에 자신을 괴롭게 한 이들의 실명을 나열하며 조문을 거부했다. 형이 삼십 년이던가? 사람 하나를 그렇게 죽이고도 60이 되기 전에 세상으로 다시 나올 수 있다니, 창창한 생이다.

떠오르지도 않는 단어들로 고통받았으면 하는 인간들은 살아있고, 죽은 이들은 말이 없다. 정말 없다. 할 수 있는 것도.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영화인 게 아쉬웠다. 좋았거든. 허무했지만 좋았거든. 한 편으로 끝날 게 아니라, 시즌제 드라마로 한 명 한 명을 그렇게 고문하다가 끝장냈어야 했다. 어차피 현실에서는 못 하는 거, 가상으로라도 해 주면 되잖아. 어딘가에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걸 구라로라도 만들어주면 좋잖아. 내가 왜 그들을 잊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고 자책하며 삶을 굴려 가야 하는가. 왜 당한 건 나인데 내가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고 눈물을 닦아야 하는가.




나는 그 모든 이들이 가능한 고통에 몸서리치길 바란다.

그들이 안 된다면, 그들의 자식과 사랑하는 이들이.

이만 원치고 꽤 쓸만한 경험이었다. 그놈의 죄책감. 정말로,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를 가상으로 죽이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게 남은 죄책감의 맛이 개 같았던 것. 그런 놈들은 이런 것쯤은 느끼지도 않고 잘만 살텐데 또 내게 오는 뒷맛이 입을 쓰게 했걸 빼면, 그러니까 내가 그들보다는 멀쩡한 인간임이 남긴, 멀쩡할 여생의 증거만을 빼면.


위로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알았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현재진행형이다. 고맙다. 나한테 알려 줬잖아. 나는, 이런 일을 겪은 내가 싫은 것만큼이나, 당하고도 닥치고 있어야 하며 가해자는 멀쩡한 이 세태가 뭣 같이 싫고, 그들이 모조리 힘들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걸 일깨워 줘서.


왜 나만 스스로를 자책해야 해.

이런 마음도 좀 가질 수 있잖아?

어차피 변하는 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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