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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무엇을 왜

by 이븐도





내가 표현하지 못하는 걸 드러내 줘서 좋아.

속이 시원하다고 해야 하나.


함께 저녁을 먹고 주변을 걷다가 교보문고에 갔다. 그 서점을 그렇게나 많이 갔는데 그 서가에 그렇게나 시집이 많이 꽂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녀를 안 지 6년이 넘었다. 질문을 하는데 아마 이걸 매 해 물었을 것 같다는 자각이 그제야 들었다. 기억하기 위해 쓴다. 알록달록하고 대체로 얇고 작은 그 책들. 시가 왜 좋니? 라는 질문에 대한 답. 그러니까, 시의 매력 포인트.






병원 1층에는 이런저런 그림들이 걸린다. 어디서 어떻게 주관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꾸준히 작품들이 바뀐다. 정해진 요일에는 나름의 도슨트 투어도 하는 모양이었다. 대체로 출근할 때 버스에서 내려 통유리 바깥에서 슥 지나친 후, 퇴근 때 또 통유리 바깥으로 슥 지나친다.


어제는 특별히 봐 줬다. 사람이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고, 나는 3일간은 여기 오지 않을 거니까. 좋았다. 이기광 싱글 앨범 커버랑 닮은 그림이 있어서, 마그리트 그림이랑 닮아서, 색감이 시원시원하고 구도가 안정적이라서. 그리고, 나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는 위안이 보여서. 궁금했다. 맨날 약 주러 가면 자리에 없는 환자들. 이걸 나란히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려나.




상반기의 영화 중 좋았던 걸 꼽으라면.. 음, 많네? 대체로 좋았으나 독보적이었던 건 우행록. 언젠가는 그 감독의 다른 영화도 보리라 생각했다. 영화를 집에서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결제한 대여 기한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끝까지 봤다. 자신의 신분을 말소시켜 살아가던 남자 그리고 그와 엮인 사람들의 이야기. 좋긴 했으나 우행록이 나았다. 감상을 잔뜩 썼다. 세 번쯤 다시 썼다. 그러다가 그냥 때려치웠다. 하고 싶은 말을 추리고 추려도 역해서. 나는 그 영화가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사실은.


지겨웠다. 남자 주인공은 살인자의 아들이 된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한다. 아스팔트 바닥에서 숨 못 쉬는 금붕어마냥 파닥거리며 절규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어떻게 보면 충분히 우스워 보일 만한 것들을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로 어쩌고.. 아무튼 좋았다는 뜻이다. 정말이다. 그러나 감상을 남길 수 없었다. 너무나 지겨워서.




중반쯤 되자 영화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나는 그런 질문이 싫었다. 어차피 답이 없는 질문인 탓에 사람을 공연히 우울하게 만들거나 고양시키기 딱 좋았다. 뭐긴 뭐야, 내가 나지. 나? 피. 뼈. 살. 그 세 가지. 그 형태의 내가 이곳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고 주어진 일을 하고 소리를 듣고 딱히 의미는 없는 생각들을 했다. 때가 되면 먹었고 화장실에 갔고 잤다. 그게 나야. 뭐가 더 있어야 하는데? 이외의 모든 것은 변동성이 컸다. 생각하고 정해서 마음을 둘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단정지은 질문으로 화면 속 주인공은 심히 괴로워했다. 그 영화를 미워하고 싶지는 않아서 화살이 나한테 갔다. 정말 지겨웠다. 왜 나는 이렇게밖에 생각을 못 하지. 일하다 와서 그런가? 병원에서 일해서 그런가? 글쎄. 하여간 스스로 떠올린 그 생각이 너무 지겨워서 짜증이 났다. 영화를 보려고 한 거지 똑같은 스스로를 재확인하려 한 게 아닌데.






한 달 전에 친구를 만났다. 머티리얼리스트, 를 봤다. 다코타 존슨이 나오고 캡틴 아메리카가 나온다. 그리고 한 명 더. 뉴욕의 결혼정보회사에서 일하는 여자 주인공이 전남친인 배우 지망생 캡틴아메리카와 수십억 펜트하우스를 가진, 키 늘리는 수술을 한 금융계 종사자 중 하나를 선택하는 내용.

혼자 봤으면 재미없었겠다 싶었다. 아니, 재미긴 했다. 다코타 존슨이 이런저런 옷을 입고 나오는 걸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재미는 충분했다. 하지만 내 반쪽짜리 뇌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영화가 끝난 후에 흥미로웠던 건, 친구가 '그 남자'를 언급하면 거의 90프로의 확률로 캡틴아메리카였고, 나의 경우 그 펜트하우스 금융인이었다는 것. 친구가 기억에 남긴 장면이나 대사를 나는 기억조차 못 하기도 했고, 그녀가 지나친 것을 나는 인상깊게 봤던 게 드러났다. 단순히 부자냐 빈털터리냐가 아니었다. 나는 그 펜트하우스 남자가 낫다고 생각했다. 한계를 인지하고, 넘으려 노력했고 실제로 결과로 증명했으니까. 그러나 친구는 그것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인간적이지 않다고 했다. 야, 그게 인간적인 거 아니야? 부족한 게 있어서 극복하려 한 거잖아? 라고 항변했으나 그녀의 반응을 보아 아예 나는 다른 맥을 짚은 것 같았다. 그녀는 사랑을 언급했다. 그 사람은 정말 스스로가 말한 대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안 된다고 했다. 아하.




야, 근데 알면 된 거잖아? 모르는 걸 알면 된 건데. 하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말하고 스크린에서 드러내고 있는 사랑은 이런 식의 문장이나 말로 앞뒤를 맞춰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남자가 키 늘리는 수술을 한 걸 알게 되고 그녀는 코 수술을 한 걸 서로가 알게 되는 펜트하우스 부엌 장면에서, 나는 여자주인공이 참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꼈고 그 남자는 아니라고 느꼈다. 근데 싫진 않았다. 나도 그런 것 같아서. 그리고, 모른다는 걸 인지했으니 알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다코타 존슨이 원래대로 그 펜트하우스 남자와 계속 함께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짐을 싸서 그 집을 나온다. 이해되지 않았다. 왜? 아니, 저것 때문에 저 갑부를 버린다고? 가 아니었다. 저걸 고백했으니 더 멋진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친구와 얘길 하다가 알았다. 아, 그건 가르쳐 준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아닐 수도 있겠구나. 사과가 영어로 뭐야, 난 모르는데? 아. 내가 알려줄게. 에이 피피 엘 이. 아하, 이제 알겠다. 하는 것처럼 머릿속에 입력할 수 있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것. 그제야 여주인공의 행동이 이해가 되어 상쾌한 동시에 기분은 조금 찝찝했다. 뭐랄까, 감정적인 불구로 판정받은 것 같아서. 맞잖아? 없는 걸 어떻게 만들어내. 그게 뭔데? 뭐냐니까?


남녀 간의 사랑이라. 그것도 이런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사랑. 연애 말고, 사랑? 진짜? 감정적 불구인 내가 하나 태클을 걸고 싶었던 점은, 그 영화가 끝날 때쯤 오프닝 때 나왔던 '태초의 커플'을 다시 보여주며 나레이션이 지나갈 때 등장했다. 온갖 아름다운 표현은 다 발라 놓으면서 이성 간의 생물학적인 끌림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 나를 바보 취급한 그 영화에 대한 찌질한 복수였다.


사랑 사랑 하더니 결국 제일 중요한 건 안 짚는군요. 믿음이고 눈빛이고 결국은 그거에서 시작 아닌가? 감독이 모르고 안 넣은 건지 일부러 안 넣은 건지 알 수 없어서 더 오기로 자막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8월 중순. 영화보다 그 상영관을 나와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더 재밌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해서일지도. 세상에 나쁜 건 없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을 뿐. 그래서 나는 내가 싫어하게 되는 영화가 싫었다. 내가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거니까. 여러 부분을 들어 얘기하다 보니 알 수 없던 장면들과 대사들이 해독이 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결국 그게 중요한 점이기도 했다. 더 이상의 설명으로 풀어내 입력해 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사랑? 그래. 사랑. 오케이.


생긴 건 허여멀건해서는 입에 넣자 혀 전체가 맵싸했던 허위매물 닭강정과 그냥 그랬던 푸딩과 결국 친구보다 내가 더 많이 먹은 감자칩을 사서 청계천에 앉았다. 주말 저녁의 물가. 날벌레가 많았고 사람이 많았고 나시를 입은 까무잡잡한 아저씨들이 색소폰 연주를 했다. 소리가 적당히 습기 찬 바람을 타고 높은 건물 사이로 퍼졌다. 그 지겨운 대답을 떠올렸다.


넌 어떤 사람이야? 그러니까, 아. 너무 뜬금없나. 일단 대답해 봐. 친구는, 사랑하는 걸 사랑하는 사람, 이라고 대답했다. 이런. 아마 영화에서 질문한 정체성은 이런 걸 말하는 것 같았는데. 그럼 그녀는 그 영화를 나보다는 재밌게 볼 수 있었을까. 나는 영화의 줄거리를 대강 설명했다. 이래서 물어봤엉. ? 아. 나는 뭐라 생각했냐면..






청계천에는 커플이 많았다. 너랑 와서 좋다, 하며 누군가 지나갔다. 좋겠지. 글쎄. 아마 전여친 또는 전남친이랑도 왔을 거고, 당신 다음 사람이랑도 여길 올 거야. 남녀 간의 사랑은 좀 그런 거 아닌가. 비슷할 데이트, 말로 덧씌웠지만 결국 끌려서 만나고 참고 견디고 영원히 동상이몽일 그 과정. 친구는 나와는 비슷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한 단어나 문장으로 찝어서 말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와 함께 가서 뭔가를 보고 함께 걷는 건 그래서 좋았다.


성적 끌림에 애틋함과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의 총합 같은 걸 사랑이라 설명할 수 있다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성욕은 빠진 이 관계. 흥미롭고 무궁무진했다. 내가 모르는 걸 보고 감사하게도 내게 설명해 주고 알려주는 존재. 나는 어떤 것들을 그녀와 함께 봐서 좋았다. 내게는 반쪽쯤인 것 같은 이 지겨운 각도의 초점을 맞추게 될 때가 있어서.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맥락도 설명도 없이 던져놓은 문장과 단어를 굳이 해독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내가 읽고 있는 게 맞게 읽는 건지도 모르겠고, 확인할 길도 없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릴 때도 차라리 동화책이 더 좋았다. 답답했다. 차라리 재미가 없으면 모를까 이해가 안 되어 짜증이 났던 영화들처럼. 분명 글쓴이에게는 의도가, 저런 걸 쓰게 만든 상황이 있었을 텐데 나는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결과 또는 파편만 받아야 하잖아. 오만해서 짜증났다. 시집 책장이 거기에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언젠가는 갔겠지만 한 번도 뭔가를 꺼내들어본 적 없는 구역.


내가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는 게 짜증났다. 어쩌라고. 난 모르겠는데? 근데 나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조차 없지. 나에게 그런 시는, 그녀에게는 그런 기능을 하는 거였다. 스스로는 못 잡아낸 내면의 어떤 것을 언어로 드러내준 도구. 함께 본다는 건 그런 것의 해독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내가 모르는 영역에 뉴런을 더 배치시켜주는 역할.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뭘 어떻게 좋아할지는 더 모르는 일이었다. 그 언젠가는 흐느적거리듯 본인들의 사연을 푸는 노래들만을 듣고 정갈하고 단정한 그 시집들을 늘 지녀서 다니게 될지도 몰랐다. 살아보니 그랬다. 영원한 건 없던데. 그게 설령 내 취향 따위일지라도 계속 변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싫어하는 이유가 확고히 생긴 스스로가 지겨웠고 좀 싫기까지 했다. 모르면 바보잖아. 그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을 거라고. 수요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걸.






아주 예전에, 누군가와 함께 영화를 골라야 하면 이미 봤던 걸 골랐다. 나름 고심 끝의 선택이었다. 이게 그냥 내 꼬인 심보의 어딘가를 건드려 주어서 좋은 건지, 아니면 정말 다들 무난하게 좋아할 만한 건지. 남자친구와 본 영화들이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던 이유의 맥락도 비슷했다. 보고 싸울 일이 없는 것, 아무튼 시간이 아깝지는 않을 만한 것들. 엘리멘탈과 탑건 매버릭과 주인공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중화권 청춘 영화. 또 뭐가 있더라. 하나같이 보는 내내 지겹거나, 역시나 시간이 아까웠다.


감상을 나눈다는 건 그런 선택과는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거였다. 컨텐츠는 단독으로도 즐거울 수 있었으나 그것에 투영된 상대방이 보일 때는 또 색다른 재미를 줬다. 캡틴아메리카의 사랑 이야기를 본 지 한 달이 지나 그 친구를 다시 보는 날이 다시 도래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가다니. 일요일의 오프. 피곤한 상태로 서서 쨍한 그림들을 쳐다봤다. 가까운, 소중한 사람과 병원복을 입고 수액줄을 단 채 보는 그 그림들은 어떤 이야기를 주고 기억을 번지게 할지 궁금했다.






감상이라 이름 붙인 연재를 끝내 간다. 즐겁다. 지겨웠는데 드디어 끝을 보고 있기 때문에.


시작은 일상도 일한 이야기도 아닌 다른 영역의 무언가를 접하는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기 위함이었다. 이제야 느낀다. 정말이었구나. 영화는, 그 시간과 들인 돈만큼의 즐거움을 보장해야 하는 대상일 수도 있겠으나, 상대 또는 다른 세계를 해독시켜 주는 매개일 수도 있겠다고.

사실 안 그런 게 없긴 하지만.





비슷한 걸, 그러나 보장된 뭔가는 없는 것을 보고 예측되지 않은 것을 더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 여전히 모르겠는 사람들. 곱하면? 더 무한한 물음표들인가? 그래도 더 세밀한 물음표들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에서.


감상은, 도피이자 치유였고 자아의 투영이자 반복이기도 했다. 이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다. 그래도 여전히 제자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잘 모르는 영역으로. 더 모르겠는 그 영역으로 말이지.



음. 그러니까? 친구들한테 잘해야겠다.

ㄹㅇ.




정성원. Antic and U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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