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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몸짱이다

빨간 빤스 입고 오는겨?

by 이븐도



슈퍼맨. 2025


1. 16000원 / 2시간
2. 재관람 의향 : X
3. 추천 : 슈퍼맨이 궁금하시면..
4. 같이 볼 필요까진.
5. 나 이런 거 좋아했네.



다 가진 캐릭터를 좋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취향이 아닌 줄 알았다. 근데 아니네. 왜지?









어째 코엑스에 가는 날마다 날씨가 다 똑같다. 하늘이 하얗고, 습하고, 흐리고, 비가 올 것 같거나 정말 비가 오고 있다. 상영이 끝나고 휴대폰을 켜니 비가 많이 오니 우산을 챙기라는 문장이 먼저 보였다. 비가 진짜 많이 오고 있었다. 다 떠내려갈 정도는 아닌데 우산을 안 가지고 온 게 약간 원망스러운 정도. 근데 알았어도 안 가지고 나왔을 것이다. 원래 우산은 좀 그런 거 아닌가. 소개팅이라도 나갈 거 아니면 그냥 맞고 말려야 한다. 길든 짧든 귀찮을 뿐이고 어쩌다 쓰게 되면 '아 이 정도 비 막으려고 이걸 갖고 나왔나' 싶다.


나는 배트맨에게 바라는 게 많았다. 아마 다음 편에서는 당신이 왜 영웅인지를 좀 증명해 달라는 억하심정 같은 걸 가졌던 것 같다. 이 양반에게는 없다. 용인에 있는 제 집에서 입김 불어서 우산 던져 주세요, 도 바라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사람 머리보다 큰 제 양배추 좀 채썰어 주세요, 같은 것도 바라지 않는다. 좋은 거 아니야?


9년 전의 떡밥을 회수할 준비가 됐다. 드디어, 2016년의 '슈퍼맨 대 배트맨'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싸.






왕자님이냐고.


강아지를 - 심지어 나중에 보니 본인 강아지도 아니다 - 신경쓰고, 아기를 보호하고, 노인을 보호하고, 어린애를 보호하고, 또 어린애를 보호한다. 그 난장판에서 잔뜩 으스러질 게 뻔한 본인 몸은 뒷전인, 그 팔만 쭉 뻗은 자세로 작고 어리고 부서지기 쉬운 대상들을 앞장서 지킨다. 너무 전형적인 히어로잖아.


거기다 시작 때는? 엄마 아빠의 사랑 담긴 말을 반복해 들으며 회복의 시간을 갖는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까만 머리, 흰 피부. 슈퍼맨 아니고 그냥 백설왕자 아닌가 싶은 외모는 너무 치트키니까 차치한다고 해도. 너무.. 프로파간다 아닌가 싶을 정도로 좋은 건 다 갖다 썼다. 거기다, 그 엄청난 몸으로 남의 부엌 침입해 놓고 되려 지가 성질 내는 애새끼같은 면모까지? 너무 설정 과다 아니야? 프로파간다 맞지? 이 정도면 슈퍼맨 선전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데. 아냐?




빡빡머리해도 대존잘.


2016년 3월.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배우가 저스티스 어쩌고에 출연했다. 렉스 루터 역으로. 궁금해서 보고 싶었는데 나는 배트맨도 슈퍼맨도 몰랐다. 몇 달이 지나 자유의 몸이 된 후 살펴본 감상평에는 혹평뿐이었다.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마주치는 부정적인 이야기들. 그대로 흡수해버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 영화를 볼 수 있게 되기까지 9년이 지났다. 몇 달 전에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봤고, 오늘은 슈퍼맨이다.


몇 안 되는 히어로 또는 블록버스터 무비를 보면서 느낀 건, 대체 이런 것도 안 보고 뭐하고 살았나 하는 것이다. 거기다,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에 설정까지 다 변주해가면서 수십 년에 걸쳐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이 흥미진진한 것들을 왜 안 보고 살았지 싶다. 그러던 차에 단어 하나로 제목을 때려박은 슈퍼맨? 이걸 어떻게 안 봐.






나는 배트맨이 싫었다. 싫은 건 싫은 거지. 다 가졌는데 혼자 자기연민에 너무 빠져 있었다. 조커와 사랑의 잡기놀이를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싸움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구도도 싫었고, 사람들을 구한다고 하지만 펜트하우스 꼭대기에서 눈물이나 흘리고 있는 그 모양새도 너무 눈꼴이 시었다. 영화 자체는 정말 재밌었다. 이거 말고, 다크나이트 라이즈.



그런데 그건 사실 조커가 다 한 거잖아. 이 영화는 훨씬 덜 정돈되어 있다. 중간에, 뭐더라 저스티스 스쿼드? 아닌데, 하여간 조력자 영웅들이 등장하는 타이밍이며 슈퍼맨이 악당 비슷한 것들을 물리치는 장면들은 그냥 뇌를 빼고 보거나, 아니면 그냥 영화 자체에서 빠져도 될 것 같을 정도로.. 전개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그냥 서비스컷 같다는 말이다. 우리 클락 켄트가 이런 것도 또 해요, 멋있죠. 하는 그런 거. 근데 이미 다 알잖아? 슈퍼맨이 뭐 하는 존재인지.




히어로의 연애?원래 안물안궁이었다고.


하지만 이 재수없을 법한 전개에도 나는 슈퍼맨의 손을 든다. 그런 장면이 훨씬 덜 들어간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배트맨은 정말로 재수가 없었는데 이 영화의 슈퍼맨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사실 반칙이긴 해. 얼굴이랑 피지컬이 다 했다.


배트맨에는 자아가 있고 슈퍼맨에는 사람들이 있다. 슈퍼맨의 슈퍼맨은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게 티가 다 난다. 망토는 휘날리고 있지만 딱히 멋있지는 않다. 잘생기고 몸 좋긴 하지. 그런데 무게도 없고 그렇다고 엄청난 허당도 아니지만 정말 '안 완벽하다'. 차라리 추앙받는 게 배트맨이라면 납득이 될 정도로 허점이 많고 지나치게 귀엽다. 원래 좀 신비감 있고 컨셉이 강해야 팬층이 생기기 쉽지 않나?

왜 여자친구 집에 멋대로 들어와 놓고 언쟁하다가는 삐진 거 못 참고 바쁘다고 내빼려고 해. 덩치만 컸지 그냥 애다. 그런데 그게 짜증은 안 난다. 속된 말로 조금 대가리 꽃밭이지만 그래도, 그 쪼가 본인 스스로를 향해 있지 않아서 그렇다.


혼자 다 해먹을 수 없는 애새끼인 탓에, 영화에는 조력자가 잔뜩 나온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사실상 슈퍼맨을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의 활약을 돕는 존재다. 배트맨? 그 양반 속에는 스스로밖에 없다. 조도도 색감도 낮고 덜 화려해서 더 세련되고 섹시한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배트맨이, 아직도 중2병에서 못 벗어난 도련님같아 보이는 것과 정반대다.




다쳐도.. 고치면 그만이다. 내구성 짱짱맨.


왜 다크나이트보다 이게 나았을까. 배트맨은 혼자 다 하려고 했고, 실제로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나, 너무 속에 감춰놓은 게 많았다. 그렇게 꿍한 상태로 있다가 뭐나 제대로 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사실 아니다.

죄 없는 사람들은 잔뜩 죽었고, 도시는 개판이 됐고, 본인은 좋아하던 여자도 못 지켰다. 뭐, 달라진 게 없다 이 말이다. 무게를 잡을 이유도.




다른 인물들도 안 과하게 귀여웠다.


슈퍼맨은, 뭐든 다 해낼 것 같은 그 이름과 다르게 온정에, 사랑에 움직였고, 마음의 기울기에 토라지기도 했다. 나는 세상을 지배하려는 게 아니고 정의롭게 어쩌고 하는 말을 하는 장면은 좀, 뭐 그렇긴 했지만 그 정도는 좀 봐줄 수 있었다.

도움을 받는 것도 주는 것도, 그리고 그것에 조금은 기뻐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도 귀여워서. 귀엽잖아. 자연스럽고. 뭐 물론, 중요한 순간이면 꼭 입을 열어서 저는 사실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세상이 억까한다구요, 라고 그 덩치로 징징거리는 게..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지만, 사실 쪼끔 꼴보기 싫었고 그래서 여주인공과 그렇게 오래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가 영웅인데 말이야, 하는 자세는 없다구. 대신 남부 사투리를 쓰고 햇빛이 가득하고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시골집에 내려가서 아빠의 이야기를 듣는다. 요전에 어디 가서 부리또를 먹었는데 말이다, 하는 뭐 그런 별 거 아닌 이야기. 자연광 아래서 산만한 덩치로 체크남방 입고 그러고 있으니 어떻게.. 안 멋지지. 그래서 좀 재수가 없을 법도 한데, 안 그렇다. 기했다.




테레픽? 트래픽 맨? 진심 너무 멋있었다. 사실 슈퍼맨보다 더.


배트맨을 보면서는 계속 불안했다. 언제 죽나, 언제 무너지나. 그게 누구든. 그리고 슈퍼맨을 보면서는 그게 없어서 좋았다. 왜인지는 모르는데, 어쨌든 절대 안 죽을 것 같다는 확신을 줬거든. 왜, 그 명칭만 제목으로 딱 박아놓은 거 보면 감이 오긴 하잖아. 이건 누구와 싸워서 누가 이기는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고, 그냥 그 인물에 대해 궁금하면 보라고 써붙여 놓은 드라마라는 걸.


사실 영웅인데, 당연히 안 죽겠지. 다 안다. 그런데도 원래 좀 불안하고 심장이 쫄리고 그냥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지는 게 이런 스토리니까. 아, 너네끼리 다 해결하고 죽었으면 살려낸 후에 나 다시 불러 줘, 하고 싶은 그런 거.




/;-P


영웅이 나오는 영화인만큼, 엄청난 그래픽을 동원해 주인공이 깨나가는 난관과 못생긴 괴물들과 더 징그러운 미션들을 보여준다. 거의, 뭐. 전독시 실사영화에 나온 것만큼이나 화려하고 스케일이 크고 시끄럽고 알록달록하고 멋있다. 그런데 사실은 큰 의미가 없다. 안 봐도, 졸아도 지장없는 장면들이다. 볼라부르? 그리고 뭐더라, 그 또 4글자인, 악당 수장을 둔 동유럽 어딘가의 국가 같은 곳. 수없이 언급되지만 슈퍼맨과 렉스 루터와 그 국가와의 관계 역학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고 딱히 이해하기 편하지도 않다. 내가 봤을 땐 그랬다.




대신 전면에서 느껴진 거? 아, 슈퍼맨의 하루도 이렇게나 비싸고, 피곤하고, 또 피곤하구나, 하는 거. 원래 히어로의 인생에 공감해줄 필요는 없는 건데도, 그렇게 와닿는다. 내려쳐져도, 깔려도, 짓이겨져도, 죽어라 맞아도 안 죽는 몸이라 그런가. 지겹도록 싸움은 반복된다. 그런데 뭐, 그게 불쌍해? 걱정돼? 거기다, 빠지는 게 없잖아. 짜증날 정도라고.


잘생긴 외모, 저런 몸이면 뭘 해도 안 피곤하겠다 싶은 근육질 신체, 와중에 킹받게 유지되는 C컬 애교머리, 취향이든 아니든 예쁜 것임은 분명한 파란 눈, 애 같은 웃음, 현실의 클락 켄트로 지낼 때의 어리버리함과 언제나 엄마아빠의 애정과 추억을 가슴에 묻어둔 인간적임까지. 주인공 서사로 줄 수 있는 설정은 다 넣었다고. 이런 캐릭터의 고난? 내가 왜 공감해 줘야 해, 라고 생각했다.




히어로가 재수없지 않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렇게 외계인이며 어디선가는 항상 배척받는 존재라는 설정이 엄청난 기만같이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이 존재가, 이상하게 연인이 타준 핫초코를 마시고 맛있다고 하는 장면에서 연민 비슷한 걸 느꼈다. 자존심 상하게 말이야.


고생했네. 맛있긴 해? 다행이네, 하고. 아마 배트맨이 그러고 있었으면, 당신 저런 거 당 덩어리라고 안 먹지 않아? 그냥 인사치레잖아. 관둬, 관두고 빨리 나가, 같은 생각이나 했을 텐데. 이상한 일이다.






저 장면에선 민둥머리 안 추울까 궁금했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과연 뭘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은 배트맨이 더 매력적이지 않나. 감내하는 다크 히어로, 조용한 움직임, 혼자 씹는 우울, 내색하지 않는 태도. 그런데 너무 싫었던 걸 어떡해.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재미있는 영화는 뭘까, 하고도 궁금해졌다. 백설공주 실사를 정말 재밌게 봤는데 그건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아마 이 영화도 그렇게 흥행하지는 못한 걸로 안다. 영화적 완성도로 따지면, 모르긴 몰라도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비할 게 못 될 것이다. 안 봐도 그럴 것 같다. 안 들어가도 되는 장면들이 많았고, 어쩌면 그런 것들은 충분히 지루할 만했고, 또 어쩌면 인종차별이나 특정 국가 혐오 같은 문제도 걸렸을 수도 있고. 유치하잖아. 왕유치하다. 유치하고, 뻔..하기도 하고. 그런데 나는 왜 좋았을까. 항상 마음에 안 들었던 영화들을 떠올리면 그런 것들이 주를 이뤘는데.




얼마나 갈까? 헤어지지 말고 잘살아.


뭐긴, 인물 빨이지. 나는 이런 캐릭터를 사랑하는 사람인가보다. 걱정 안 시키는 캐릭터, 그냥 좋은 걸 좋다고 표현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투명하게 드러내는 밝은 인물들. 혼자 계획 세우고 판단하고 복수 꿈꾸고 비탄에 빠지고 이런 거 싫다고.


어차피 세상엔 그런 것 투성이란 말이야. 사람 죽는 것도 싫고 고독 씹는 것도 싫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의 허점을 파고들어서 활개치고 다니는 악당? 더 싫어. 나한테 배트맨이 그랬고 조커가 그랬다.





슈퍼맨? 렉스 루터? 쓸데없이 무게 안 잡잖아. 그래도 가볍다고. 세상을 구해? 개인적인 사연? 아빠가 뭘 어째? 웃긴 일이다. 영화 색이나 인물이나 슈퍼맨이 더 유치한데, 왜 주된 정서는 배트맨과 조커 쪽이 더 짜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둘은 아예 뒤집어놓은 양말, 아니 그냥 아예 짝이 다른 양말처럼 다른 인물들이다. 이런 둘을 붙여놨다고? 아. 그 영화가 얼마나 쓰레기 같던지 간에, 나한테 재미가 없기는 정말 어렵겠다, 싶다. 사람들 정말 부지런해. 어떻게 이렇게 기전부터 다른 캐릭터를 붙여서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보라는 슈퍼맨은 안 보고 배트맨과 비교될 클락 켄트만 잔뜩 보고 왔다. 사실 귀찮아서 미뤘는데, 나는 오늘 정말 피곤했고, 아무데도 나가기 싫었는데. 거기다 이거 상영 끝물이고 사람들 반응도 심심한 것 같아서 기대를 전혀 안 했는데.. 효과적인 관람이었다. 아, 세상에는 재밌는 게 참 많다. 밖에 나간다면. 망할 시도를 감수한다면.


나도 몰랐지, 내가 이렇게 히어로 무비에 관심을 가지게 될지. 그것도 저런 눈갱 당하기 쉬운 코스튬 입은 전형적인 캐릭터의 편을 들게 될지. 진짜.. 살면서 뭐 한거야. 이렇게 재밌는 걸 사람들이 잔뜩 만들어 놨는데.






당신 너무 멋있었어..요.


음. 그러니까 내 양배추 좀 썰어 주실 분. 영웅이라면 사실 그 정도는 껌이잖아. 우산 토스는 됐고, 그것 좀 해 줘. 바라는 건 없는데 그냥.. 나 좀 도와 줘라.


슈퍼맨 또는 배트맨이 아니라면.. 테레픽 맨? 맨이든 우먼이든 뭐, 이 정도는 너무 쉽잖아. 당신들한테. 맞지?





아니다. 슈퍼맨, 도와줘.

배트맨한테는 부탁도 못 하겠어. 뒤돌아서 나 속으로 욕할 것 같거든. 하하. 나는 당신이 더 좋아.

유치뽕짝한 옷차림도 안 우스운 당신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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