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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느냐 묻는다면

지나왔고 향하는 것

by 이븐도





생일. 초를 꽂고 소원을 비는 날. 식탁을 치우고 냉장고에서 케익 박스를 꺼내고, 거실과 부엌 불을 모조리 끄고, 초를 꽂은 후 주인공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는 순간. 후 하고 한 번 두 번 또는 그 이상에 벌써 녹기 시작한 초 위의 불꽃을 끈다. 이어 다시 스위치를 켠 다음 묻는 거지. 소원 뭐 빌었어?



오 분이 채 안 걸리는 과정. 토치 또는 빵집의 후진 성냥으로 붙이는 불. 형광등으로든 무드등으로든 아낌없이 밝아질 수 있는 환경. 구태여 사위를 어둡게 하고서 굳이굳이 켜는 촛불. 약하고, 흔들리고, 여려서 휙 불면 꺼지는 그 작은 빛. 그곳에 담는 바람. 소원. 왜 그렇게나 약해빠진 의식에 소원을 덧붙이게 된 걸까? 소원이라면 좀더 강렬하고 단단하게 기념해야 하는 거잖아. 안 그래? 나는 그래서 촛불을 끄기가 싫었다. 늘. 왜, 더더 말하고 더 빌고 싶다고.






아빠는 소원이 뭐냐고 물으면 '정수 성준이 엄마랑 건강하게 사는 거' 라고 했다. 항상 똑같았다. 거기다 더 붙인다면. '별 탈 없이.' 아, 그게 뭐야. 진짜 소원. 그건 지금도 하고 있잖아. 진짜야,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줄 알아? 어렵다고? 지금 그렇게 살잖아. 아빠. 소원이라니까? 그게 아빠 소원이야. 왜 니가 그러냐? 아빠 생일이야. 내 소원이라고, 내 소원.


가끔은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흙칠을 한 채 정말 영화에서나 보던 얼룩덜룩한 철모를 쓰고, 팔에는 '멸공'이라고 무섭게 쓰인 완장을 찬 군복 차림으로 퇴근했다. 아무튼 고된 일 같았다.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대여섯 시면 엄마는 부엌에서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아빠한테 전화해봐라. 안 받는데? 언제 오냐고 문자 보내, 그럼. 응. 언제 옴? 그럼 전화가 왔다. 오늘은 저녁 먼저 먹어. 왜? 엄마 알아, 그렇게 말하면. 응. 그러면 우리는 셋이서 저녁을 먹었다. 아빠의 몫을 먼저 떠 놓은 접시에 덮개를 씌워 전자레인지 위에 올려 두고.





그렇게 일해서 비는 소원이 이렇게 사는 거라니. 나는 아빠의 삶이 많이 힘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왜 알록달록하고 반짝이는 걸 말하지 않냐고. 어른이라서? 아빠라서? 엄마는 니가 공부 좀 잘 하는 거, 가시나야. 라고 하던데. 차라리 그런 거라도 말한다면 이해가 됐을 텐데. 그러나 아빠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공연이 끝난 자리에는, 그들의 얼굴이 박힌 포스터가 작게 인쇄된 생수병과, 어둠을 찢던 천둥 또는 섬광 같던 조명과 천장을 스피커로 다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던 음향과 괴성 사이에 흩뿌려진 하트 모양 종잇조각과 반짝이와 또 반짝이와 종이쪼가리들이 남아 있다. 영원을 약속하자던 그 말이 적힌 이벤트용 슬로건도 곳곳에 밟힌다.


무대 위의 그들 말에 모두 한마음이던 이들은 정신을 되찾는다. 그 모든 잔해와 흔적을 지나치고, 버리고, 주우며 돌아간다. 밤하늘, 야경이 들어찬 도시, 눈송이가 날리는 심연과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축제 또는 환희의 장이었던 곳에서, 희부옇게 밝은 조명과 멈추지 말고 퇴장해 달라는 안내문이 띄워진 철근 잔뜩 드러난 경기장으로. 원래 그랬던 곳으로. 각자의 행선지로.





한여름, 티켓값, 습한 날씨. 지하철역에서 나오자 내리던 비, 그 앞에서 산.. 굿즈 줄을 서고 나자 벌써 살이 부러져 있던 싸구려 우산, 다른 가수의 공연과 겹쳐 카페든 편의점이든 발 디딜 틈조차 없던 번잡함, 답답함, 정신없음, 또 습기.


너무 화질이 좋아 멤버가 낀 콘택트렌즈 경계선이 눈동자 주변으로 보이던 VCR 영상, 아마 진짜 레이싱을 해본 적은 없을 그들의 카레이서 같던 의상, 다른 데는 손글씨 적힌 컨페티 뿌리던데 저희도 해 주시면 안 되냐던 팬사인회에서의 건의, 네 명의 각기 다른 글씨가 적혀 있던 그 하얀 쪼가리들, 앞인지 뒤인지가 중요하지 않은 자리. 내 앞의 사람이 앉은키가 그제처럼 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응원봉보다는 차라리 컨페티 캐리어가 된 것처럼 종이쪽이 가득 찬 스틱의 전구 모양 대가리, 그들의 핼쓱하고 잘생긴 얼굴. 거울을 삼킨 것 같은 느낌의 성량. 알고 있었는데도 놀라는 것. 소리지르는 입과 심장만 있는 것처럼 존재하게 되는 시간.


뒤를 돌아본 저 가까이에는 까만 화면에 원색의 글씨로 멤버의 이름과 지시사항이 쓰여 있었다. 에어건, 뒤를 돌아서, 함성, 같은 거. 이틀 내내 같은 멘트를 하려니 혀가 꼬이네요, 하던 멤버의 너스레. 모든 합의된 연출과 꾸밈 사이에서 외친 것? 오래보자, 네 글자. 이 힘아리 없고 모양 안 나는 구호.






나는 그들을 오래 좋아한 팬이 아니었다. 왜 아이돌을 다시 좋아하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말이 좋아 덕질이지, 이건 정말 소비적인 활동이니까. 앨범 사고, 콘서트 가고, 굿즈 사고. 소비, 소비, 소비의 연속인데.

거기다? 드는 비용에 비해 사회적 체면이 비루한 활동인걸. 다녀오면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경험과 폼 나는 사진이 잔뜩 남는 여행도 아니고, 어딘가에 모양 내고서 들고갈 수 있는 가방이나 신발이나 액세서리가 남는 것도 아니야. 스스로에게도 항상 해명해야 하는 것 같은 취미 아닌 취미.


웃기잖아, 연애하고 결혼해야 할 나이에 과년한 남자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그들의 외모와 일화와 음악을 소비하는 게. 애초에 그 공연장의 팬들만 가득해 별다를 게 없는 종합운동장역이나 올림픽공원역을 나와 신분당선으로 향하는 환승구부터, 나는 괜히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를 위해 콘서트에 가는 날이면 할 수 있는 한 덜 이상하고 덜 촌스럽고 덜 튀는.. 하여간 뭐, 일 년 중 가장 신경을 쓴 듯 안 썼으나 집으로 오가는 길과 콘서트장 모두에서 후회하지 않을 옷차림을 골랐다. 어쩌면 나는 그 때를 위해 딱히 나아질 것도 없는 외모에 신경을 계속해서 쓰는지도 몰랐다.


아직 공연의 여운을 놓고 싶지 않아 들고 있는 슬로건이나 손목에 묶은 스카프나 생수병에서 내 정체성이 드러나도 그 많은 모르는 이들에게 내가 짜쳐 보이지 않기 위해. 정말이다.





당연히 그들은 항상 멋있었고, 잘생기고, 유명했고, 세련됐다. 그러나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십대 중학생도 아닌데 이 나이에 그 괴리를 알고도 돈과 시간을 쓰는 스스로에게 늘 질문했다. 왜, 언제까지? 좋으니까. 왜 좋은데? 잘생겨서? 그렇지, 잘 생겼지. 그리고 3일간의 공연에 50만원 가까이를 썼다. 어제는 더 놀라울 것도 없는 셋리스트가 끝난 후에 주책맞게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잘생겨서, 맞지. 팬들에게 좋은 말 해줘서. 맞지. 그런데 왜 울어? 내가? 내가 왜.






나는 그들의 무대 위에서의 모습이 좋았다.

말갛고 앳된 얼굴의 연습생 시절 짧은 인터뷰부터 매 해 활동의 대표곡들을 모아 짧게 보여줬다. 십 년은 훌쩍 넘어 십몇 년을 육박한 그 뮤직비디오와 야외 무대와 음악방송에서의 모습. 그리고 무대 위의, 사실은 나이가 이제 좀 든 티가 나는 그들. 정작 장본인들은 울지 않았고, 그들의 '데뷔팬'도 아닌 나는 펑펑 울었다. 본인들도 몰랐던 영상이겠지. 팬사이트에서 준비한 거라니까.


과거에도, 지금도, 멀고 먼 미래에도 나보다 훨씬 어떤 방식으로 잘 살 사람들이었다. 그 영상들의 편집본은 그들의 업적 같은 걸 전시해 주는 영상이나 다름없었다. 꾸밈없는 편집이었지만 결국 그런 거잖아. 그런데 나는 계속 울었다. 나는 그들이 그래서 좋았거든.






그들이 한참 주가를 달리는 탑아이돌이었을 때 나는 다른 그룹을 좋아했다. 그 이후에도, 그 이후에도. 이들은 내 인생의 주축 또는 주된 주제의 근처에도 온 적이 없었다. 그냥 항상 그것들의 주변에 존재했다.


내 친구가 좋아하는 아이돌, 학원 책상과 벽에 낙서된 그룹 로고, 팝송만 골라 듣던 시절 멜론과 벅스 차트에 있던 노래들, 대학에 들어가서야 몇 번쯤 들었던, 이름을 바꿔 재결성한 그들의 곡, 가끔 유튜브에 웃긴 영상이 뜨는 그들. 드라마에 나오는 멤버. 입대. 뭐, 그렇구나. 아직 활동하는구나. 정말 아직도. 그들은 그런 존재였다.




노래가 좋아서? 좋은 노래는 많았다. 잘생겨서? 잘생긴 사람들도 많았다? 세련되어서? 그런 걸 찾으려면 모델 출신 연기자들을 좋아하는 게 나았다. 나는 왜 그들에게 돈을 썼던가. 나는 그들이 지금 건재해서 좋았다.

5년, 10년을 지나 그 모든 활동과 부침과 굴곡을 거치고도 그 자리에서, 어딘가에서 늘 존재하고 있던 모습이 궁금했다. 어떤 곡이 강렬했다거나 가사가 마음을 건드렸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내게는 이미 그런 건 차고 넘쳤다. 그런 위로는 이미 다른 밴드들과 시간에서 잔뜩 축적한 것 같았다.


아직도 활동한다고? 대단하네. 대단하다. 그 사람들이구나. 그래서 궁금했다. 그래, 뭘 하길래 아직까지 괜찮은가 보자.

그렇게 작년에 공연을 예매한 거였다. 정작 뚜껑을 열자 그 밋밋하게 오래가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 모습은 어디가고, 성대가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게으르지 않은 움직임으로 무대에서 뛰는 그들이 있었다. 난 뭘 기대했던가.






어떤 노래를 듣거나 떠올렸을 때, 그 곡들은 십 년은 훌쩍 전에 발매되었거나 정상을 찍은 것들인 게 많았다. 나는 내가 뭔가를 십 년이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겠지, 한다. 해야 한다. 아빠가 그렇고 수많은, 모든 이들이 이미 그렇게 생업을 보전하면서 분투하며 사는 걸. 굳이 공연장에서 확인하지 않아도 증거는 도처에 있었다.


그런데 무대에서, 컨텐츠 안에서의 감정과 표현은 증류된 상태잖아. 믿어도 된다고. 이미 다 거짓이라 믿어도 되는 그 대상을 재현하는 그 무형의 시간들. 거기다, 아이돌인데. 트렌드를 타고, 유행과 시간이 지나면 생명력이 현저히 줄어. 근데 살아남았어. 이렇게.

온 감각을 통째로 찢고 부술 것 같은 소리와 조명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하고. 저렇게? 어떻게?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그냥 저러면 되겠다고 느꼈다.




정점을 찍은 후로 그들은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부정할 수 없지. 그러나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데도 엄청난 노력이 드는 것 같았다. 그 때와 다른 음악을 발매해 활동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내가 느낀 삶을 돌아보면 그랬다.

가만히 있어도 될 것 같은 때는 한 순간도 없었다. 멈춰 있으면 이끼가 끼고 벌레가 붙는 것처럼, 미련이, 우울이, 나를 뒤로 가게 하는 감정과 정서가 일상에 들러붙어 삶을 잠식시켰다. 그들은 아닐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나는 내가 느낀 것들을 그들에게 투사했다.


그들이 지나온 시간, 특정 시기를 거치고 낸 앨범 속의 곡들, 안주하지 않은 모습. 그게 업계 또는 순위의 정상은 아닐지라도 그 자체로 '좋았던' 것들에 나를 비췄다. 나는 그들의 궤적과 현재를 바라봤다. 그리고, 무대에서 사실 그 케이크 앞 촛불 같은 간단한 다짐을 약속하는 그 반짝거림을 사랑했다.

일 년 전 그런 이들이 궁금해 찾은 공연장.나는 정확히 그 모습에 감탄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로 돌아왔다.






녹음본, 프롬프트, 가사, 의상, 안무, 동선. 모든 게 짜여진 그 공연장에서의 약속. 내가 믿는 것은 그런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불을 켜면 쓰레기가 될 것들이 가득한 그 시간에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약속 뒤의 궤적. 훅 불면 꺼지는 촛불 같은 글자. 간단하고 보잘것없는 말. 오래보자.


살아보니 오래 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뭐든 지속을 말하는 것만큼 지나치게 희망적인 게 없었다. 아빠의 그 별 것 없어 보였던 바람이 진짜 소원이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그 구호처럼. 그럼, 이런 삶이 엉켜 만나고 헤어지고 엮이는 도중에 오래 보려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촛불 같은 그 말은 어떻게 따라야 하나.

어떻게는, 똑같이 사는 거지.




저렇게 살면 되는 거잖아. 어쨌든 뒤안길은 두고서, 앞으로 나아갈 미래에는 촛불 같은 약속만 꽂아두고 현재에 잔뜩 힘을 다 하는 거. 그 약속은 그렇게 짧아도 되는 거였다. 중요한 건 뭘 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해낸 내가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지라고. 그들의 자취와 당장 코앞에서 멋진 옷을 입은 채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구는 짧았고 할 일은 많았다. 나는 그렇게 나의 모든 문장과 단어들을 투영해 거기 앉아 있었다.

잘생긴 얼굴이 전광판 가득 나오고, 사방에 나와 같은 응원봉을 든 타인들이 가득한 거기서, 나는 혼자 너무 많은 것을 투사하느라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생판 남인 무대의 그들은 멀쩡한데 말이지.


신기하고 어쩌면 우스운 일이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고 나아가는 거. 그런데 인생이, 일상의 집합들이 전부 그런 것 같았다. 아빠가 바란 식구들의 안녕. 이제 각지에서 같고 다른 공연을 펼칠 그들의 일정. 지나간 시간. 내일의 출근. 나의 생업.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들.




미래는 힘이 없어 가벼운 동시에 무거웠다. 오래 보자는 그 간단한 구호와 강렬히 연출된 것들 뒤의 현실처럼.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게 다 현실이었다. 왜, 힘들게 번 돈으로 티켓 사서 거기 앉아 있었잖아. 습기와 피로와 벌써 지겨울 내일을 향해서. 현실 속 비현실. 비현실 속의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래서 어디나 존재하는 것.

그래서 나는 믿는다. 그 무대를 보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의 시간을 믿기로 했다. 미래와 소원은 짧게 빛내듯 바라고, 현재에 최선을 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웃기지. 하지만 정말이다.

그걸 믿기로 했다. 그 경기장, 아니. 그 곡들을 위한 장치와 조명과 의상과 메이크업과 동선과 대본으로 연출된 그들이 약속했고, 무대 아래의 그들이 해낸 것들이 말해 주는 것을.


촛불은 꺼질 거고, 꺼지겠지만 그게 지나간 누군가가 세상에 등장한 날이었고, 앞으로도 가능한 계속될 사실은 남으니까. 그렇게 내년의 생일은 당연히 또 오는 것처럼.

그러니까, 그걸 향해 스스로가 걷고 있는 당장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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