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가 9일밖에 안 남았다고 친구가 호들갑을 떨었다. 춘추복 마이에 니트까지 모두 입은 차림으로 주황색의 커다란 쓰레받기를 들고서. 점심때, 패딩조끼를 늘 입고 다녔던 누군가가 '야, 배가 가라앉고 있대'라고 했다. 나는 '폰 안 낸 거 들키면 어쩌려고 저러나'라고 생각했다. 오후에 그들은 계속해서 제주도와 구출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저녁 급식 시간, 사실은 오보였다는 게 입에 잘 붙지도 않는 항구 이름과 함께 다수의 입에 오르내렸다. '몇백 명이 가라앉았다는데? 너 왜 몰라.'라고 아침 청소를 함께했던 친구가 말했다. 야자 때도, 애들은 계속 휴대폰을 숨겼다가 몰래 꺼내 들었고 쉬는 시간마다 구조가 어쩌니 저쩌니 언급했다. 귀가한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방에 처박혀 기사를 계속 새로고침했다. 왜인지 머리칼이 다 젖은 기자가 난리통인 항구를 배경으로 상황을 전달했다. 이불이 잔뜩 깔려 너저분한 학교 체육관 같은 곳에서 또래들이 인터뷰를 했고 부모들은 황망해 보였다. 거실의 뉴스에서 나오는 실종자 숫자는 휴대폰 기사에 업데이트되는 것과 차이가 있었다. 스크롤을 올렸다가 내리면 자꾸자꾸 숫자가 올라갔다. 무서웠다.
몇 년이 지나 나는 기숙사에 짐을 풀어준 엄마아빠를 환송한 후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갔다. 아무튼 그곳을 좋아했으니까. 광장은 기억했던 것과 달리 넓게 비어 있지 않았다. 삐죽삐죽하고 거대해 흉한 구조물들과 노란 리본들이 잔뜩 붙은 뭔가와 사람들의 사진들이 모인 간이 분향소와 하여튼 노란색이 테마가 된 많은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과 커다란 사옥들이 뿜는 웅장한 기운 가운데에 그 상징물들이 있었다. 추웠다.
아침 출근 시간의 빡빡한 1호선 안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자주 노란 리본을 형상화한 키링을 나누어 주었다. 몇몇은 그것을 받아 메거나 들고 있던 가방에 달았고, 나는 그것을 상당히 오랜 기간 거리와 강의실에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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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복 위에 패딩을 걸친 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상적으로 추운 11월이었다. 가져왔던 두꺼운 식빵을 우적우적 씹었다. 손이 시렸고 노을이 차갑게 졌다. '엄마, 죽었대. 봤어?' '봤지, 그럼'. 엄마는 뭔가를 쉽게 동정하거나 말을 얹고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 어떡해?' 나는 정말 나는 어떡해,라고 했다. 그 사람이 한 선택과 나의 인생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도 할 수 있었으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기는, 그냥 살아야지. 밥은, '이라고 했다. 엄마는.
그리고 그날에 대해서는 더 떠오르는 게 없다. 기숙사로 돌아가 잘 먹고 잘 잤을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씩 떠오른다. 일이 있기 이전, 네이버뮤직에 그녀의 추천곡 포스팅이 올라온 적 있었다. 넬과 콜드플레이의 곡이 몇 개 있었다. 그중 내가 좋아하던 노래도 있었다. 그것이 연결되어 나는 꽤 자주 그들의 노래를 들을 때 일면식도 없고,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들 그 이후로도 친분이 생길 턱이 없었을 그녀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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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라운딩을 돌고 자리에 앉았다. 동료들이 휴대폰을 보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수선생님이, 말하자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공지 같은 걸 올린 줄 알았다. '야, 계엄령이래.' '그게 뭔 소리야.' '진짜야, 봐봐.' 그들은 똑같은 표정을 하고 각자의 휴대폰을 나에게 들어 보였다. '열 시 반이었대.' '뭐?'. 우리는 그때 인계를 받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틀 후 만나기로 했던 친구에게서는 '강남인데 탱크 다녀'라는 카톡이 와 있었다. '구라치지마'. '진짜야.' 사진이 한 장 왔다. 정말로 그 거대한 차가 눈에 익은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자정이 되었고 우리는 아무튼 그날의 정규 일을 시작했다.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중간에 보호자 한 명이 나왔다. '네, 어머니. 뭐 필요하세요.' '아니, 아니에요. 아..'그녀는 필요한 것을 알리지 않았고 우리 셋 모두를 보기만 하다가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진짜. 어떡해요?' 아.
응급실에서는 아무도 입원하지 않았다. 옆의 동료는 계속 한숨을 쉬었고, 망했다, 망했어,라고 했다. 이제 이브닝 퇴근은 어떡해, 나 오늘 영화 보러 가기로 했는데, 아. 같은 말들. 망했다. 그녀는 계속 망했다는 말을 했다. 망했다는 느낌이 든다기보다는 믿기지 않았고 심란했다. 퇴근한 동기들은 코인 어플에 접속이 안 되고 환율이 급락했다며, 미국 간호사 자격증을 가진 B가 승리자라고 카톡방에서 장난을 쳤다. SNS에는 어떤 추산과 예상과 당부들이 가득했다. 와중에도, 근무 시작 직전에 요로감염으로 입원한 환아는 갑자기 심박수 200을 넘기며 경련을 일으켰다. 담당은 바빠졌다. 어딘가에 헬기가 뜨고, 잠옷차림에 외투를 걸친 사람들이 한새벽에 모여들고, 담화가 발표되는 것을 새벽 내내 지켜봤다. 상황은 일단락되어 가는 듯했으나 여전히 긴가민가했다.
여섯 시 반이 되어 데이번 근무자들이 출근했다. 다른 의미로 그들의 출근이 반가웠다. 우리는 눈이 온 그날처럼 '어떻게 오셨어요'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단 집에 가고 싶었다. 옷을 갈아입는데 재난 문자가 와 있었다. 길이 얼었으니 조심하라는 알림이었다. 그게 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몰랐을 것이다. 밤새 이런 걸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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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건물을 나오자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층의 채혈실과 바깥의 버스정류장은 똑같이 붐볐고 지하철역에서는 사람들이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잔뜩 이동하고 있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똑같네?'라고 함께 퇴근하는 동료도 그랬다. 우리는 정말 이게 똑같은 건지 속으로 아리송해했을 것이다. 일반 직장을 다니는 친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출근했다고 했다. 전날 일찍 잔 그녀는 밤새 있었던 일을 나와 다르게 체감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일이 바빴다면 다른 감도로 오늘을 기억했을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아빠는 비슷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늘 보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의 당부 카톡을 전했고 나는 아빠가 걱정하는 그런 일들을 할 기운도 생각도 없었다. 다만 궁금했다. 이제 무엇이 나를 지켜 줄 것인지. 무엇을 믿고 지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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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방점을 찍어볼 수 있다. 그전까지는 무엇을 어느 정도로 믿었느냐고. 글쎄, 모르겠다. 뭔가가 나를 지켜준다는 생각도 한 적 없는데. 그러나 나는 밤을 의도치 않게 새우며 줄곧 그런 생각을 했다. 유치한 발상 같아서 일부러 억누르고 있었으나 집에 돌아와 자리에 앉자 그 생각이 짙게 났다. 물론 나는 빨리 자야 했다. 밤을 새우지 않았는가. 시간은 아침이었지만 나는 아직 '밤 사람'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분히 감상적인 잡념일 가능성이 높았다.
살면서 마주한 수만 개나 될 장면들 중, 강하게 기억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외면하고 깊이 이입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어떤 형태로든 기억에 남은 그 시간들. 경계선 안팎, 이쪽이 아니면 저쪽으로 파악되고 어느 쪽에 어떻게 서든 질타를 받게 되는 양상이 지겨워 항상 떨어져 있으려 했던 것들. 어찌 되었든 나의 삶은 아직 대체로 안온하니 함부로 동정하고 분노할 권리가 없다고 결론지었던 장면들.
나이트 때 밥을 먹으며 나는 저금해 놓은 잔고를 확인했고, 이럴 거면 좀 더 되는 대로 -뭘 어떻게?- 살았어야 했나, 생각했다. 동기는 '오늘 볼 영화를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고 했다. '언제 디질지도 모르는데'라고 덧붙이고 웃었다. 나는, 그 시간의 그녀들과 나는 생쇼를 하거나 드라마틱하게 이입했던 게 아니었다. 닥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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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고도, 완전하지 않은 채로 살아갈 법을 익혀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쓰는 것은 결국 잊기 위함이다. 짙게 눌러 놓고 잊은 후 다시 나아가기 위해서. 물론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오늘도 출근을 한다. 여차하면 깰 뻔했던 저녁 약속은 원래대로 진행될 것이다. 달라진 게 없다 말했고 당장 내 눈에 보이는 것 역시 그렇다. 정말로 무언가 '망했다'면 이십 대 여자들 셋이 근무 중 둘러앉아 탈 없이 밤 식사를 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에 조용히 남은 장면들처럼 이 역시 자취를 남길 것이다. 균열이다. 이제야 느끼는 것이다. 무언가 늘 일어나고 있었으며, 나는, 우리는 정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지내야 한다는 점을. 기실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지만 간지럽게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