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읽고 계신다면, 눈이 오거나 오지 않는 그곳에서 모두 무탈한 하루 보내시길 감히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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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아니 새벽에는 버스를 놓친 것 같았다. 보통은 그때의 전철을 타면 '7분 후 도착'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늘 장렬히 실패했던티켓팅 예매창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를 반복하거나 바뀐 계절을 입은 나무들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는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집을 나섰을 때 찬비였던 그 무언가는, 세트장의 가짜 그것을 방불케 하는 수준으로 변해 있었다. 왜, 가끔, 잘 그린 그림을 보면 '사진 같다'라고 하고, 잘 찍힌 사진을 보면 '그림 같다'라고 하는 것처럼. 너무 잘 구현된 풍경은 차라리 가짜를 연상시켰다.
내가 타야 하는 번호의 버스가 어두운 거리에서 지하철역 입구에 선 나를 지나쳐 갔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아직 까만 거리에눈이 엄청나게 오고 있었으니까.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그냥 그런 건 저기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는 구름 위로 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환상적으로 눈이 오고 있었다. 조금도 아쉽지 않을 만큼, 그 무엇보다 아낌없이 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풍요로울 만큼 흩날리고 있었다.
펑펑, 막 거꾸로 뒤집은 스노볼 속 세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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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가 고개를 언제 돌려도 눈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가끔은, 저게 눈인지 그냥 하얀 바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보라 비슷한 게 몰아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눈에 대해 몇 마디들을 더 얹었다. 이번에는 빼빼로데이가 평일이라 그 제과 회사의 매출이 올랐다는 뉴스가 생각났다. 쏟아진 눈이, 아닌 척하지만 늘 안간힘 써서 짜내야 하는 스몰토크의 난이도를 낮춰 주었다. 좀 드셨어요? 무슨 맛 좋아하세요, 이거 하나 드세요, 같은 말을 나눴던 것처럼.
직원식당 창가 자리는 평소보다 더 추웠지만 그래도 만석이었다. 식당 안의 뉴스 화면도 대체로 하얬고, 그걸 보는 사람들의 얼굴도 하얀 것 같았다. 하얗지 않은 건, 눈 때문에 이래저래 모여 있어야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사실상 눈이 얹힌 나무와 건물을 뺀 모든 것들이기도 했다.
그 시간에 버스에 그렇게 사람이 많았던 적이 없었다. 외래 주사실 앞의 인파는 사람들의 시커먼 겨울옷 때문에 더 몰린 것처럼 보였다. 풍성하게도 흩날리는 눈을 뒤로하고 몇 중 추돌 사고가 났다는 뉴스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퇴원하는 사람들은 '집에 언제 가죠'를 인사말처럼 덧붙였다. 이브닝 근무자들은 아주 일찍 오거나 간신히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데이 근무자들은 '내일은 대체 몇 시에 나와야 돼'를 또 다른 인사처럼 교환하며 헤어졌다.
차라리 걷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차는 느리게 갔다. 자전거에는 에어백이 올려진 것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도로 위의 많은 것이 빵빵거렸다. 퇴근 후의 눈길은 새벽보다는 덜 환상적이다가도, 이제껏 본 적 없는 풍경이라 마음이 들떴다. 나는 대체 오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열심히 생각했다. 달리기가 두 번 남았다. 그러니까, 스스로 한 약속이 두 번 더 남았다. 나 공원 아래 설빙에서 빙수 먹어야 하는데, 이대로 간다면 11월 안에는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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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날 뛰면 큰일 나겠죠?"
내심 스키 리조트에서 달리는 기분이 날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며 선임 간호사에게 물었다. 인력은 어떤 날은 넘치는 기분이었고, 어떤 날은 정말 그 누구라도 붙든 채 이걸 좀 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게 없었다. 오늘은 전자였다.
"당연하지. 너 또 병가 내면 내가 가만 안 있는다. 또 절뚝거리면서 일할래?"
나는 복층에서 내려오던 중 넘어진 것을 방치하다 일주일의 병가를 받고 한 달간 깁스를 한 채 다리를 질질 끌며 일해야 했던 전적이 있다.
멍청하게도, 아니면 이런 눈을 접한 게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이 그새 흐려진 건지, 둘 다인지, 나는 못내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걸어오는 그 백 미터 남짓한 거리를 걸으며 그제야 약간 절망했다. 아. 이런 거였지. 눈은 아름답지 않았다. 신고 있던 신발이 원래 좀 거뭇하고 더러워진 것 같은 모양새라 다행이라고 느꼈다. 바닥은 온통 시커멓고 축축했다. 이 길이 내일은 잔뜩 얼겠지. 장갑을 끼고, 손을 바깥으로 다 빼고 뒤뚱뒤뚱 잘 걸어야만 하겠구나, 싶었다. 이런. 나는 더 자주, 열심히 달렸어야 했다. 호수공원의 그 나무 산책로는 진작 다 까맣게 얼어서 얼음길이나 다름없게 변모했을 것이다.
오피스텔 입구가 무슨 일본 영화 속 스틸컷처럼 아늑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눈을 치웠다. 치운다기보다는 밀어 놓았고, 그 밀어 놓은 더미에서 한 중학생 커플이 장난을 쳤다. 남자애가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연보라색 목도리를 한 여자애의 정수리에 올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니 여친 정수리 춥겠다,라고 생각했다. 귀여웠다. 나도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스키장갑이 없었다. 눈오리든 눈사람이든, '적절한 장갑이 지금 없다'는 생각부터 하는 스스로를 돌아본 후, 괜히,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무릇 놀이는 '노빠꾸'여야 하는 것이거늘. 없었던 건 스키장갑이 아니라, 없는 게 그 무엇이든 그냥 돌진하지 않는 객기였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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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년 만에 가장 눈이 많이 온 날이라고 한다. 평소보다 길었던 퇴근길을 함께했던 동료와 '강원도 같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강원도를 떠나온 게 2011년 겨울이었다. 어쩌면 딱 이때. 그때 집에는 거실에 컴퓨터가 있었다. 기억하기로 당시 가장 히트한 곡은 아이유의 '너랑 나'와 장현승과 현아의 '트러블메이커'였는데, 후자는 거실에서 틀기가 조금 그렇다고 그때의 나와 동생은 생각했다. 가족들이 나름 다 모여 앉아 있는 거실에서 혼자 헤드셋을 끼기는 역시나 조금 그래서, 우리는 인터넷을 할 때 '너랑 나'를 참 많이 틀었다. 그 해에 눈이 많이 왔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우리가 막 떠난 강원도는 여전히 눈이 많이 오고 추운 곳이었던 건 떠오른다. 5월에도 고개를 들어 지겹도록 둘러싸인 산을 보면 꼭대기가 하얬던 그곳. 시간이 잔뜩 지나 스스로 난방비를 감당해야 하는 겨울을 맞는 내가 그때를 생각한다. 별로 옛날 같지 않다고 느꼈는데 돌아보니 잔뜩 옛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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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코앞의 기숙사에 살던 때에는 눈이 오건 말건 일찍 나올 필요가 없었다. 왜 나는 내가 항상 겨울을 따뜻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제야 재고하게 되었다. 야외 달리기를 떠올리면서 양가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그것도, 못 하는 동안 체력이 빠졌으면 어떡하나, 같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눈오리 메이커 같은 건 이사를 다니며 어차피 다 버리게 될 테니 살 필요가 없다고 먼저 생각하게 될 줄도.
아직도 바깥에는 눈이 계속계속 내린다. 하고 싶은 것은 그래도 아직 많은데, 나이가 든 것 같다고 우습게도 생각한다. 그래, 이런 생각. 할 수는 있잖아?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5학년, 6학년이 되면 저학년 애들을 갸륵하게 바라볼 때가 있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학원 가는 길에 맨손으로 눈을 뭉쳐 온몸에 묻히고, 엄마아빠가 보일러를 틀어주는 집에 살고, 제도의 혜택 비슷한 것을 받아 가까운 곳에서 적응을 했던 입장에서, 눈이 쌓인 공원을 구경하고 싶지만 퇴근 후 집에 와서 바로 쓰러지지 않을 수 없고, 이 방보다 버스와 지하철이 더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냥 좀 더 껴입자고생각하는 '어른'이 되었다. 어떤 방점을 찍는 기분이다. 이미 주변에서는 나를 학생 이상으로 본 지 한참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야 내가 내 삶을 쥐고 있다는 그런 웅장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쥐고 있다? 이 표현은 적절치 않다. 더 축소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나만이 나를 온전히 쥐고 있다는, 덧붙여 나를 무엇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그런 느낌.
지나치게 비장한가? 그런데, 비장해야 한다.
밀릴 버스를 생각해 30분 일찍 일어나기 위해 이제는 이틀에 한 번은 달려 체력을 만들어야 하고, 너무 춥거나 덥지 않은 곳에서 지내고 싶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쩌면 나를 돈 벌게 하는 대상을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 그 대상을 좋아하고, 그 일터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서는 날씨와 각종 예보에 설레기만 할 것이 아니고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어, 눈이 온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호들갑을 떨고 안부를 물을 정신력도 남겨 놓아야 한다. 이게 쉬운가? 나에게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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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주제에, 나는 이 눈 오는 날을 기억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이 기념비적인 폭설의 날에 어떤 재밌는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잔뜩 들떴지만, 결국은 '두 시간만' 하던 잠에서 새벽 한 시에 깨어 키보드를 두드리는 어른이 되어, 오늘의 데이 근무가 너무 피곤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 설레는 마음을 뒷받침할 몸과 마음의 체력을 내가 언제까지나 유지하기를 또 원하면서.
그러니 이 글을 모두 읽으신 여러분들도, 미끄러지지 말고, 안전하고 좀 더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