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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필 Aug 23. 2021

해변가에서

밀물.썰물.

 밤하늘을 바라다 보면서 나는 진정으로 행성간의 움직임을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돌고 돌면서 수천년 수만년 동안 만나지 않는 그 행성들은 멀리서 보면 가깝지만 또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하며 태양계의 궤도를 돈다. 그들은 한없이 무겁고 한없이 거대하기에 그 무게를 견디느라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면서 무한하고 완전한 고요를 세월동안 쌓아갔다. 나와 타인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나비가 가만히 공기를 딛고 날개짓을 하던 순간 알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과 너라는 사람은 이 세상을 우주처럼 궤도를 그리며 떠도는 행성들 같다. 수천광년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면 가까워 보이더라도 '나와 너' 사이에는 미세한 틈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미세한 틈을 사람들은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 머리 위에 드리운 우주의 거대함과 수천억개 빛들의 고요가 잊히듯. 그 잊혀버린 틈새를 다시금 두 눈으로 확인할 때에서야 우리는 나와 동등한 생명체를 바라볼 수 있다. 생명이라는 권위로 정말 동등하게 세워진 두 존재를 말이다. 그때가 천천히 돌아가는 우주의 진동이 파도가 되어 우리 발목을 간지럽일 때이다. 


 소복소복 함박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가로등이 길을 따라 줄지어 서서는 밤하늘을 거울 삼아 수면위에 반짝이는 듯한 모습의 장관을 자아내고 있었고 그 위로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걸음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겨울 부츠만큼 쌓여있는 눈이 소복소복 소리를 내었는데 정말이지 보기 드문 폭설에다가 찬바람까지 불었다. 차 몇대가 깜빡이며 느릿느릿 지나갔다. 마치 곤충처럼 엉금엉금 기어가는 속도가 내 걸음보다 늦었는데도 나에게 태워주겠다고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거절했다. 노란색 가로등 아래로 들어서니 눈이 하염없이 빗발치는 것이 보였다. 마치 오르골 속에 있는 물을 한번 내려친 것 처럼 눈송이들은 겨울바람에 휩쓸려 신비롭게 반짝이는 나무 주위를 휩싸고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몇 시간을 더 걷자 산비탈에 걸쳐 위태롭게 앉아있는 건물의 창문으로 불빛이 조금 내비치는 모습이 보이는 곳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꽁꽁 얼어붙어 끼익 소리가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텅 빈 건물의 밑바닥에 내 겨울 부츠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얼었다 녹으면서 빨갛게 튼 손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곤 위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다른 사람들은 폭설로 거의 아무도 오지 못했어. 이렇게 산비탈에서 장례를 치르는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눈이 이렇게 많이 올줄은 꿈에도 몰랐지. 선생님께서 네가 온 것을 아셨더라면 많이 기뻐하셨을 거야.” 그녀는 나의 팔에 부축을 받다 싶이 하면서도 나를 사진 앞으로 질질 끌고 갔다. 돌아가신 선생님의 동료분이셨다. 돌아가신 선생님은 나의 안부를 4년 넘게 물어왔고 때때로 내가 찾아뵙기도 했던 분이었다. 딱히 가르친 내용이 인상깊거나 명강의를 하신 분은 아니셨지만 선생님은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는 분이셨다. 이렇게 춥디 춥고 눈이 멀도록 밝은 세상에서 찾기 어려운 사람. 따스함이 적절히 감도는 분이셨다. 나는 몸의 중심을 오른 발에 두고는 기우뚱이 서서 선생님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꽃다발이 하나도 없었다. 하긴 몹시 추운 겨울에 교통도 꽉 막혔으니. 선생님의 웃는 얼굴이 조금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누군가의 얼굴이 가물가물 떠오르려다 말았다.

 “차라도 마실래?” 그녀가 주름진 얼굴에 창백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하얀 백열등 아래서 보니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마음이 한꺼풀 벗겨진 듯 보였다.

 “한 잔만 주세요. 선생님도 같이 드셔요. 너무 힘들어보이세요.”

 “그러니? 거의 12시가 다 되어가긴 하네. 어제 잠을 잘 못잔 것 같아.” 선생님이 값싼 가루 차 봉지를 두개 들고 오셨지만 추위에선지 공포에선지 덜덜 떨리는 손이 갈피를 잡지 못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가루봉지를 내 손에 쥐었다. 가루가 물로 솔솔 들어가면서 기분 좋게 녹아갔다.

 “제가 나머지 손님을 기다릴테니 들어가서 주무시고 계세요. 손님들이 좀 많아진다 싶으면 제가 깨워드리면 되잖아요.”

 “그래주겠니? 정말 고마워. 한동안 잠을 잘 못 자서 말이야.” 중얼거리는 소리가 방 한켠으로 사그라들자 나는 의자에 앉아서 내 두 손에 담긴 종이 컵 속을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작은 미동을 할 때마다 물결이 일었다. 

나는 왜 굳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와 인연을 엮는 선택들 말이다.

물결이 움직이면서 물에 비친 전등빛이 자글자글 요란하게 움직였다.

사적인 이야기들과 사적인 행동들.

빛들이 조각조각 수면 위로 떠오르더니 산산이 부숴졌다.

어떤 면에서는 나 또한 그런 작고 따뜻한 일들을 좋아하기도 한다.

부르르 떠는 종이컵.

그러나 가끔 내가 너무 완벽해지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나에게 완벽함을 기대할때마다 기대감은 발가락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강력한 추위처럼 몸을 꽁꽁 얼려버린다.

 나는 전등을 바라보다가 창 밖을 바라보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창밖으로는 눈보라가 갈 수록 잦아들고 있었다. 가끔씩 바람의 감정이 거칠어질 때면 창문 틈으로 으시시한 비명소리가 세어 나오기도 했는데 어렸을때 듣던 나그네 이야기가 떠올라 오히려 마음이 포근해 지기도 했다. 아주 예전에 이러한 폭설이 한 번 더 있었던 날에 침대 속에 들어가 보들보들한 감촉의 이불 속에서, 또 주황색 등의 신비로운 빛깔을 내리는 눈처럼 맞으면서 이야기를 듣던 밤.

 문이 끼익 열리다가 멈칫 하는 순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잠깐 졸고 있던 사이에 또 한 사람이 장례식을 방문하기 위해 눈과 졸음을 헤치고 도착한 것이다. 나와 같이 한 반에서 수업을 듣던 또 한명의 제자였다. 우리 둘은 그다지 친한 적은 없었지만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똑같이 차 한잔을 대접한 후 말을 붙였다. 몇가지 형식적인 말들. 그 사이에 종이컵에 담긴 차를 대접하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 되어갔다. 

 “글쎄, 나는 조금 더 공부해 볼 생각이야.” 그가 대답했다. 형식적인 질문에 맞는 형식적인 답이었다. 나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좀더 개인적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는 질문 말이다.

 “예전에는 나비를 채집하지 않았니?” 내가 물었다. 학교에 걸려 있던 채집된 나비 컬랙션은 그의 작품이었다. 거기에는 정말 희귀해 보이는 것들도 몇 마리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나비들을 그가 잡을 수 있었는지는 언제나 미스터리였다. 그러나 내게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파란색 은은한 빛깔의 나비였다. 자기가 어떻게 이렇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은채 은색 반도롬한 핀셋에 꽂혀 굳어버린 날개를 부들부들 지탱하고 있던 나비. 내가 그 근처를 지날 때마다 나비의 애처로운 눈이 나를 쫓는 것 같았다.

 “아직도 하고 있어.” 그의 대답은 예상 외로 짧았다. 그 뒤로 이어지는 길고 긴 침묵 또한 감당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나는 10분만 더 참다가 방 안에서 자고 있는 여선생님을 깨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손님들이 도착하고 말았다. 이번엔 여러 명이었기에 어차피 여선생님을 깨워야 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굉장히 말이 많았다. 그들은 서로 오는 길에 차가 많이 막혔네, 어쩌네 떠들면서 연신 고개를 흔들어댔다. 세상의 모든 슬픔을 그 설레설레 힘 없는 고개가 밀어낼 수 있다는 듯이. 나는 방 구석으로 옮겨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고인의 사진과 빈 책상 앞을 바라보며 보내는 눈빛을 지켜보았다. 엷은 눈과 딱딱한 입술들이 세차례 지나쳤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이제 정말로 집에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여선생님은 이미 부탁을 한 이상 남아달라고 이야기 하기 부담스러웠는지 다시 피곤한 미소를 지었고 마음 한 꺼풀이 다시금 벗겨졌다. 오는 길에 선생님에게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조금은 더 남아 있었어야 했는지. 그러나 나는 계속 걸었고 방향을 틀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가로등으로부터 멀어지자 어두컴컴했던 숲이 점점 밝아지더니 청명하고 깊은 파란색으로 맑게 빛났다. 저 멀리 밝은 별들 몇몇이 찌르르 찌르르 떨고 있었고 달은 울창한 숲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적막하고도 칙칙했던 하루가 지나갔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날을 기점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된 듯 느껴졌다. 집에 도착할 때 즈음 숲속에서 해 뜨는 모습을 지켜본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뭔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던 것 같다. 어느 순간 더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느낌, 뒤돌아보면서 화들짝 놀라는 느낌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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