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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작가 Aug 06. 2018

겨울이 내리면 도시는 빛난다

러시아_상트페테르부르크

이 도시에서 눈이 내리는 것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몇 날 며칠 내린 눈이 그치고 안개마저 자욱해지면 도시는 지난 계절의 그곳이 아닌 듯 뿌옇게 얼굴을 감추고 만다. 이곳에서 겨울을 견뎌낸다는 것은 황홀한 외로움을 맞닥뜨리는 일. 그래서 조금은 용기가 필요한 곳,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누구나 한 번은 이 길을 걷는다_넵스키 대로

모스크바에서 탄 첫 고속 기차는 4시간 남짓 걸려 나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내려놓았다. 모스크바에서 북쪽으로 700킬로미터, 나는 조금 더 겨울의 나라로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이미 시간은 오전 11시가 되었는데 여전히 사위는 어둡기만 하다. 


해가 뜨지 않은 것일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지만 나는 아직 여행을 시작했다고 할 수 없다. 여행의 시작점은 바로 그리스도 부활성당에서 부터이기 때문이다. 피의 사원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리스도 부활성당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이다. 넵스키 대로변이 아닌 운하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 위치한 까닭에 처음 방문한 여행자는 느닷없이 피의 사원을 만나게 될 확률이 높다.

홀린 듯 넵스키를 걷다 보면 나타나는 그리스도 부활성당. 


나타난다고 하는 말이 틀리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갑자기 맞닥뜨리는 그리스도 부활성당은 여행자를 놀라게 하기 충분하다. 그리스도 부활성당을 보고 나서야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놀라움과 안도감 그리고 설렘. 이 순간을 위해 나는 굳이 넵스키 대로를 걷기로 한 것이다.


회색빛 도시에 불을 밝힌 듯 빛나는 그리스도 부활성당을 돌아 나오자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눈은 분명 네바 강을 물기를 품어 오는 눈일 것이다. 이 도시를 돌고 도는 운하의 물줄기가 결국 닿는 네바 강은 일찍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특별한 도시로 만들었다.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는 핀란드만으로 흘러가는 네바 강을 품은 이 지역을 러시아의 새 수도로 지정했다. 낡은 세상에서 벗어나 유럽의 중심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황제의 꿈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루고자 했다. 유럽으로 향한 창, 북구의 베니스를 꿈꾸던 표트르 대제의 꿈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네바 강을 향해 손짓하는 표트르 대제의 기마 동상은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듯 역동적으로 보인다. 

황제에겐 야망 가득했던 네바 강이지만 여행자에겐 감수성을 자극하는 풍경일 뿐이다. 소리도 없이 내리는 눈은 소복소복 얼어붙은 강에 쌓이고 강 건너엔 뭐가 있는지 지붕들만 아스라이 보인다. 다리 위 초록 신호등만 반짝 보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의 오후. 

해는 뜨지 않은 듯 이대로 날이 저물 모양이다.      


당신의 도시, 나의 여행_에르미타주 박물관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수많은 방들을 돌며 그림들을 보다가 문득 창밖에 눈이 간 건 어두운 실내 탓이었다. 그림에만 집중하라는 의도인지 아니면 옛 궁전의 전기 시설이 낙후되었기 때문인지 눈이 침침해질 만큼 어두웠다. 

창밖엔 바로 네바 강이 흐르고 있었고 황금색 첨탑이 홀로 반짝였다. 


어차피 오늘 안에 다 보지도 못할 그림들. 

나는 미련 없이 박물관을 나왔다.   


놀랍게도 첨탑의 정체는 성당이었다. 그동안 양파 모양의 지붕과 알록달록한 색감이 익숙했던 러시아 동방정교 성당이 첨탑 모양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서유럽 양식을 따라지었다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은 러시아에서도 드문 형태라고 하니 유럽을 향해 가고자 했던 그들의 집념은 이렇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표트르 대제가 잠들어 있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은 
이 도시의 주인 자리를 내어 주지 않을 듯 어디에서든
황금빛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도시의 명칭마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황제의 영혼은 여전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는 여행자에게마저 이곳은 자신의 도시라는 것을 이렇게 각인시킨다.

     

예술가의 계절_예카테리나 궁전

백야(白夜)의 화려한 여름을 지냈던 도시는 이제 흑주(黑晝)의 기간으로 오랜 동면에 들어간 듯 어두웠다. 새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난히 많은 예술가들이 탄생된 것이 이해가 된다. 


이 계절을 견딘다는 것은 누구라도 외로움을 마주하는 일. 
무엇이라도 만들게 되는 예술적 감수성을 부여하는 이 계절은
형벌과도 같은 축복일까. 


불현듯 러시아의 예술을 이해해 버린 것 같은 여행자의 감상은 버스가 멈추면서 끝이 났다. 작은 마을버스 같은 545번 마르쉬르투카의 종점은 예카테리나 궁전 앞이다. 

궁전 앞에 서서 나는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나기를 계속해본다. 한 프레임에 담기지 않을 만큼 큰 궁전은 겨울에도 빛이 난다. 오버스럽도록 화려한 이유는 이런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쌓인 눈 속에 그 모습이 더없이 어울린다. 그 옛날 궁전의 색깔을 파랑과 골드를 선택한 이는 이 계절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궁전 안에 들어가기 위해 몇 시간을 추위에 떨었던 것은 들어가자마자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궁전 외부의 화려함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듯 궁전 주인의 취향은 상상 이상으로 화려함을 자랑한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그 옛날에 촛불 몇 개만으로도 방 전체가 빛나게 하려면 이 정도 금장식은 필요했을 것도 같다. 말로만 들었던 호박방은 직접 보기 전에는 실감이 안 난다. 고작 목걸이, 귀걸이로 만들어진 호박만 보았던 사람이 방 전체가 빼곡히 호박으로 꾸며져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상상하기는 힘든 일이니까 말이다. 

어느 나라 어느 궁전이 화려하지 않겠냐만 이곳처럼 주인의 취향이 적나라한 곳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래, 여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니까

그러고 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소박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이든 크고 넓고 화려하다. 눈이 부신다는 말이야 말로 여기에서 통한다. 세계 3대 박물관이라는 에르미타주, 세계에서 4번째로 크다는 이삭 대성당, 나폴레옹을 이긴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지은 나르바 개선문 등 이 어마어마한 크기를 대륙적 기질이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여행자의 감상을 조금 보태 이 어둡고 흐릿한 계절을 위해서는 아닐는지 생각해 본다. 나는 여전히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까. 


그래서 넵스키 어디에서든 보이는 이삭 대성당의 황금 지붕과 
알록달록한 그리스도 부활성당은 여행자에게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 같다.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보다 겨울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더 특별하다. 춥고, 흐리고 쉴 새 없이 내리는 눈 사이에 빛나는 도시라니. 스스로 존재감을 뽐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나친 과시욕도 어느새 수긍하게 된다. 

그래 상트페테르부르크니까, 하고 말이다.      


본 글은 현대자동차 사외보 <현대 모터> 2016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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