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단상

9월 3일

by 감성토끼

난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가 오면 모든 사물들은 비를 머금어 본연의 색이 더 짙어지고, 깊어진다.

그 진하면서 음습한, 밝은 날과는 다른 분위기와 비 오는 날 흙 속 세균들이 만들어내는 지오스민의 냄새, 그리고 다양한 빗소리 ......

이 모든 요소들이 합해져 비가 주는 그 느낌을 사랑한다.


살면서 내리는 비를 온몸이 흠뻑 젖도록 원 없이 맞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한 번은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의도적으로 비를 맞았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세차게 내리는 비를 한 번쯤 일부러 실컷 맞아보고 싶은 것이었다.

비 오는 밖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 빗속으로 뛰어들고픈 충동이 이따금씩 들었지만, 늘 억눌러왔다.

언제나 FM인 내 성격에 스스로도 지겨워져 일탈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몇 년 전 여름에 그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던 것이다.


한참 만보 걷기 한 달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어서 퇴근 후 동네 산책로를 두 바퀴씩 돌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날씨가 비가 왔다가 개었고 비 예보가 없어서 우산 없이 공원을 걷고 있었다. 한 바퀴를 돌았는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내렸다.

여기서 운동을 멈춰야 할까 생각하다가 비 오면 맞지 뭐~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이루는 거잖아? 하는 생각에 계속 운동을 했다. 산책로 반바퀴를 돌았을까? 갑자기 비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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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온몸이 젖어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우왕좌왕하며 달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여유롭게 빗속을 거닐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물이 얼굴에 닿아 눈을 뜨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순식간에 옷들이 달라붙어 조금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 순간 세상 속에 온전히 비와 나만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초록을 머금은 나무와 발끝에서 튀는 물방울들, 마치 처마인 양 눈두덩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으로 훔쳐내며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빗방울이 따가울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다. 하지만 얼굴에 닿는 비는 세차지만 부드러웠다. 그냥 속으로 자꾸 웃음이 났다. 집으로 가는 신호를 기다리는데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를 사람들이 흘깃거렸지만, 뭐 어떤가~




어쩔 수없이 비를 맞았던 건 결혼 전의 일이었다.

결혼 전 나는 나름 산 아가씨였다. 한 달에 한 번 직장 동료들과 산행을 하곤 했었다. 전문적인 산악회나 동호회는 아니었고, 그저 산을 좋아하는 동료들끼리 시간이 맞으면 배낭을 메고 떠났었다.

날씨를 체크하고 산행을 하지만, 자연의 이치를 인간이 다 예측할 수는 없는 법, 관악산을 등반했을 때였다.


과천으로 해서 등반을 하던 중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예보에 없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급하게 근처의 절로 대피를 하게 되었다.

절의 툇마루에 앉아 쏟아지는 비와 빗속에 흔들리는 물고기 모양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중 누군가 커피를 타서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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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고요한 산사에서 마시던 진한 커피의 향과 온통 회색빛에 둘러싸인 아스라한 분위기가 비가 오면 생각이 난다.

그런데도 세찬비는 도무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여 어쩔까 하다가 우리는 그냥 비를 맞고 내려가기로 했다.

그렇게 불가피하게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안양 쪽으로 하산을 했다.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서 내려온 기억이 난다.

신발에서 나던 맹꽁이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비를 맞아본 분은 무슨 말인지 아시리라 믿는다.





비가 오면 온몸으로 맞은 비의 추억들이 더해져 난 비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매일 산책을 하지만 비 오는 날이면 투명 비받이(우산의 우리말)를 펼쳐들고 즐겁게 길을 나선다.

토독, 토독, 토도독, 쏴아아~~

산책길에 비꽃(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성기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토독 토독, 토도독 내리다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비받이 밖으로 느끼며, 대롱대롱 나뭇잎에 달려 있는 물방울 투명 진주들의 향연을 두 눈에 담는다.


비를 마음껏 음미하며 돌아와 마침 가게 통창 밖으로 퍼붓는 모다깃 비(뭇매를 치듯 세차게 내리는 비)를 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내리는 비에 몸과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 들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마저 감미롭다.

행복한 순간이 궂은 비(오랫동안 내리는 비)와 함께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블로그 댓글 중>

- 우산 없이 비를 흠뻑 맞은 적 없는데..

신발 속 맹꽁이 소리는 뭔지 알 것 같아요^^

비받이, 비꽃,모다깃비, 궂은비 등은 사실 처음 접하는 단어입니다. 처음 봤을때 이게 무슨 말일까? 했는데

이런 뜻이 있었군요. ㅎㅎ

정겨운 우리 말이네요~

- 저는 비오는 날을 싫어하긴 해요^^

근데 나이가 들 수록 싫어함과 좋아함의 경계가 물감을 섞듯 부드럽게 섞이는 경향이 있어서 좋아함과 싫어함이 덜 분명해지긴 하더라구요

그래서 가끔은 비오는 풍경도 매력적으로 보여서 이게 나이드는 거구나.. 하는 중입니다 ㅎㅎ

- 비와 내가 하나가 되는 멋진 경험을 하셨군요.

여름 산행을 하다보면 가끔 비를 쫄닥 맞게 되는 상황이 생기더라구요.

감성토끼님 덕분에 예전의 추억을 떠올려 보게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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