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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푸른색 Apr 21. 2023

잠깐! 빨리 아이 이름이랑 생년월일 좀 불러봐

서울을 떠나게 되는 순간


월드컵 16강 경기도 이렇게 손에 땀을 쥐게 했었나?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손바닥을 보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서 눈으로 보일만큼 반짝인다. 테이블 위에 옮겨 적은 전화번호를 움켜쥐종이가 금세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아이 이름이 뭐야? 생년월일 좀 불러봐"

그렇게  잔잔한던 일상에  누군가 돌을 던졌다.



신점을 사랑하는 최측근들 사이에서 용케도 39살까지 줏대 있게 버텨왔다. 궁금하고 묘한 신점의 세계는 누구나 혹 할만한 이야기들이 가득했고 미래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생은 개척하는 거야. 마음속의 내가 큰 소리로 외치면 '그래 맞아'하며 순간순간 꽤 괜찮은 선택을 했던 나를 토닥이며 위안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이라는 이름의 여러 갈래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그  선택이 어떤 결괏값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 채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친구인 와사비에게 카톡이 왔다.

010으로 시작되는 번호. 무슨 번호지? 의아해하던 찰나.

카톡이 연이어 도착했다.

“친정엄마가 업데이트해 주신 최근 신점 번호야.

엄마도 나도 너무 잘 맞더라고 혹시 몰라서 번호 남겨놔 

궁금하면 연락해 봐.”

코로나로 많은 것이 비대면으로 변했지만 신점도 전화로 심지어 카톡으로도 된다니, 갑자기 솔깃했다. 무엇보다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있는 부담감을 줄일 수 있다니, 지금까지 버텨왔던 마음이 간질간질하게 요동쳤다. 평소 저지르고 수습하는 타입인 나는 이미 손가락으로 번호를 누른 채 숨죽이고 전화기 건너편의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렸다.

그렇게 30대 마지막 12월 첫 신점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면 어쩌지. 동점 상황에서 승부차기를 앞둔 선수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동시에 무서운 불안감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머릿속에는 화려한 신당 이미지가 그려졌다. 잡아먹을 듯이 큰 눈으로  내려다보는 불상과 붉고 화려한 색상의 제사도구들, 탐스러운 과일이 올라간 제사상과 여러 개의 촛불이 놓인 재단. 그리고 그 앞에 진한 눈썹과 붉은 립스틱으로 매서운 화장을 한 아주머니가 부채를 촤라락 피고, 쌀을 한 움큼 착-하고 내던지며 나를 째려보는 그 상황. 온갖 상상과 물음표만 남긴 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티브이를 너무 많이 봤나? 무서운 훈장 선생님처럼 혼나면 어쩌지?

바로 그때 뚜뚜뚜하던 신호음이 끊겼다.


“네, 여보세요”

어? 이상하네. 생각보다 차분한 느낌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제가 멀리 이사를 가야 하는데요”

“수전이 계속 바뀌네 가는 게 맞으니깐 아무 생각 말고 가.

그리고 대주님이 평생 일할 팔자인데? 죽을 때까지 계속 일을 해.”

사실 올해 남편은 1년의 안식년을 준비 중이다. 지쳐있는 남편에게 선뜻 쉬어가기를 제안했었다. 그런데 1년은 무슨 평생 일을 해야 한다니 난감해할 남편 표정과 이 소식을 전해주는 나의 모습이 그려져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남편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잠깐, 아이 둘 중에 누가 그림을 그리네?

빨리 이름이랑 생년월일 좀 불러봐!”

“2013년. 1월.. 김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가지 색이 여러 가지로 보여 이 아이의 눈에는, 그리고 그림 그릴 때만 앉아 있어서 이거 아니면 할 게 없는데?

놀랄 준비를 해 엄마는, 상을 계속 받아올 거야.”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이의 눈에 붉은색이 붉다 불그스름하다 발갛붉디붉다 뭐  이렇게 보인다는 건가.

그것보다 미술에 드는 어마어마한 돈은 이제 막 안식년을 가지려는 우리 집 상황과는 상반되는 결과였다. 이제 공부도 해야 하고 미술학원은 이쯤에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게다가 아이를 예체능 계로 보낼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말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데, 해외로 나가서 공부하게 되겠어, 그래서 가족이 다 같이 나가겠는데”

점점 일이 커졌다. 덩달아 나의 동공도 함께 커져갔다. 해외에는 연고도 없고, 아직 이민 계획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미술에 재능이 있다니 이로 인해 해외로 이주를 한다니 처음에는 이 모든 말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내심 역시 딸 가진 엄마는 비행기를 타는 건가 하며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그러나 아이가 잘 된다는 말이 나의 모든 결계를 풀어내게 했다. 아이의 성공만큼 부모의 가슴을 데우는 일은 없으니깐.




옆집 이모 같은 상담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꽉 뭉쳐있던 마음의 덩어리도 한 겹 털어내니 가벼워졌다. 신점의 무서웠던 편견에서 벗어나 민트향 가득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막상 이야기를 듣고 나니  30대의 마지막 시간도, 앞으로의 마흔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제, 제주떠난다.





사진출처_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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