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특하다

아름다운 어른

by 혜일

수영을 시작한 지 벌써 3개월이 다 되어간다. 하루는 함께 수영을 하시는 회원님들과 티타임을 갖게 되었다. 체육 센터 2층에 마련된 카페에 앉아 두런두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보다 30여 년의 인생을 더 살아내신 두 분의 여성 회원님들은 수영장에서 만큼이나 에너지 넘치는 대화를 이끌어가셨다. 한 분은 눈썰미와 운동 신경이 좋으신지 강습도 없이 연습만으로 수영을 터득했다고 하셨다. 그분은 젊은 시절, 영어 선생님을 하셨는데 자신이 쌓아온 삶의 경험과 지식들을 다른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아름다운 어른이었다.



또 다른 한 분은 손녀와 함께 수영하려고 강습을 시작했다고 하셨다. 두 달 동안 혼자서 발차기만 연습할 때는 외로웠는데 이렇게 함께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서 좋다고 하셨다. 뉴질랜드에서 15년간 자녀들을 키우신 이야기, 어릴 때 수영을 배워서 학교 대표가 되었다는 손녀 이야기, 즐겨 보시는 유튜브 채널 이야기 등을 나눠주셨다. 마주 앉은 나는 다른 세대, 다른 공간에서 사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멋진 인생을 살아오셨고 지금도 살고 계신 두 분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는데 한 분이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3개월이나 그렇게 열심히 안 빠지고 하는 걸 보면... 기특해요, 기특해!"


"안되는데 너무 열심히 하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기특하다'는 말. 아마도 어른이 되어 처음 들어본 말이지 않을까. 이 말을 듣곤 엄마뻘 되시는 회원님들 앞에서 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기특하다는 말은 보통 예쁜 짓을 하는 아이들에게 붙여주는 말이니까.




실상 다시 아이가 된 것이 맞았다. 수영을 시작하면서 물에서 꼭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다른 운동과 다르게 수영은 호흡부터 배운다. 땅 위에서 자연스럽게 숨 쉬고 걷던 내가 물 안에서 생존할 방법을 익혀야 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호흡을 틔운 아기가 걸음마를 하다가, 이내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은 채 뛰는 아이로 자라듯 수영도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친다.



회원님 말씀처럼 나는 3개월 동안 강습을 거의 빠지지 않았고, 시간이 되는대로 자유 수영도 하고 있다. 어릴 적에 수영을 배웠거나 물에서 좀 놀아보신 회원분들은 한 달이면 초급반에서 중급반으로 진급하셨다. 하지만 나는 같은 진도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짜인 강습 스케줄대로 실력이 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수영을 하며 나 스스로 느끼는 변화는 분명하다. 그것은 눈에 띄게 빠른 변화가 아니다. 배운 대로 몸을 움직여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작고 느린 변화들. 하지만 노력하는 만큼 정직하게 드러나는 변화들이다. 그런 것들이 느껴질 때마다 온몸으로 즐거움을 누린다.



한동안은 물 먹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자유형 영법을 배우는데 오른팔을 돌리며 호흡을 할 때마다 자꾸 물을 마셨다. 콧 속이 맵고 입 안에서 소독된 물 맛이 날 때마다 물이 다시 무서워졌다. 머릿속으로는 영법이 훤히 그려지는데 물속에만 들어가면 몸이 균형을 잃고 허우적댔다. 물 안에서 긴장을 하니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앞으로 잘 나아가지 못했다. 물은 몸의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거나, 괜스레 잔뜩 힘을 주고 있는 나를 비웃듯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팔 돌리기에서 진전이 없자, 이제 그만 수영에 종지부를 찍고 다른 운동으로 바꿔야 하나 고민했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강습 시간을 견디던 어느 날. 이런저런 일정들로 자유 수영도 나오지 못했고, 주말까지 끼어 며칠 만에 물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습 시간, 선생님은 자유형 동작을 한 명씩 시켜보셨다. 내 차례가 되었다. 수영 선수들처럼 좋은 기록을 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영법을 빨리 습득해야 할 이유도 없는데 속으로 '할 수 있어!'를 세 번이나 외쳤다.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 언제쯤 '못 해도 돼. 안돼도 괜찮아.'를 나 스스로에게 외쳐줄 수 있을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몸을 일직선으로 만들고 발차기를 3초 정도 했다. 오른팔을 돌리는 동시에 고개도 같은 방향으로 돌려 숨 쉬기를 시도했다. 몸이 가라앉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엎드린 자세로 물 위에 그대로 떠 있었다. 엇, 이게 되네! 희열을 느꼈다. 물을 먹지도, 몸이 균형을 잃지도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시던, 나의 처음을 알고 계시는 선생님은 "엄청난 발전이에요, 발전!"을 외치셨다. 내가 기특해지는 순간이었다.



수영장에 가면 나 말고도 '기특한 어른들' 이 많이 보인다. 강습을 시작하기 전, 준비 운동이 끝나면 모두가 수영장 레인을 걸어서 한 바퀴 돈다. 왕복 50m를 물속에서 함께 걷는 시간이다. 첫날에는 물 안에서 덜덜 떨며, 걷기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옆 레인의 회원분들과 웃으며 눈인사를 한다. 이른 시간이지만 피곤해 보이거나 짜증스러운 기색은 그 누구에게서도 보이지 않는다. 맑은 물 위에서 만나는 이들의 표정 역시 아침 해처럼 밝다. 그런 좋은 기운을 받는 순간엔 수영장이 아늑하게 느껴진다. 이전까지 모르던 무언가를 깨닫고 온 몸을 던져 한 동작, 한 동작을 시도해보는 모습들. 배움에 대한 그 순도 높은 열정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카페에서 회원님들과 헤어진 후, 입가에서 '기특하다'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기특하다는 단어의 유의어가 '아름답다'였다. 그러니 기특한 어른은 아름다운 어른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 그런 어른으로 살고 있는가. 안 되는 날들이 끝없이 지속될 것만 같은 답답함. 그런 안갯속에서 헤매는 것이 두려워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을 때가 많지 않았던가. 평온함을 가장한 지루한 삶. 그런 삶을 이제는 경계한다.



먼 훗날, 오늘 만난 두 분의 회원님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나눠줄 수 있을까. 한 가지, 다짐을 해본다. 내 앞에 나와 같은 젊은이가 앉아있다면 그에게 적어도 지루한 어른은 되지 말자고. 그때에도 무언가, 아이처럼 새로 배우고 익히느라 눈을 반짝이는 어른이 되어 있자고. 그렇게 아름다운 어른이 되기를 꿈꿔본다.


이전 18화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