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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1부✧예의 있는 반항✧빛을 잃은 일상의 언어05화

책 속으로 들어가, 세상 밖을 잊다

by bluedragonK

민규의 전화는 일주일째 울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재하가 받지 않았다.

메시지는 몇 번 왔지만, 읽지 않았다.
알림창에 뜬 이름만 봐도 가슴이 눌리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는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세상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알바 구하기도, 자책도, 불안도.
모든 걸 일단 내려놓았다.

그 대신, 다시 꺼낸 건 책이었다.
고시원 한쪽, 작은 책장에 조용히 꽂혀 있던 낡은 책들.
몇 번이고 펼쳤던 문장들이었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조용히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
와인보다 깊고 느린 호흡,
삶을 오래 씹게 만드는 이야기들.

철학의 문장을 따라가다 멈추고,
감각적인 소설 속을 미끄러지듯 헤엄쳤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한 문장을 붙잡았고,
어떤 날은 다섯 권을 연달아 넘기고도 허기가 졌다.
그 허기마저도, 묘하게 충만했다.

책 속으로 들어갈수록 세상 밖은 희미해졌다.
마치 물속에 잠긴 듯,
바깥의 소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재하는 조금씩 자신을 다시 듣고 있었다.

“세상을 잊고, 책 속으로 도망친 건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도망이 아니었다.
이건 그의 방식이었다.

재하는 어릴 적부터 ‘조금 다른 아이’였다.
다들 취업을 위해 자격증을 따고 학원을 다닐 때,
그는 철학서와 시집을 읽었다.
입시가 끝난 날,
그가 가장 먼저 산 책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도서관보다 중고서점이 편했고,
공모전보다 거리의 생각이 더 솔직했다.
누군가는 그를 공부를 포기한 아이라 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단지, 길을 고른 아이였다는 걸.

그리고 지금,
그 길의 어디쯤에 서 있는 걸까.

오전엔 책을 읽었다.
오후엔 한강으로 향했다.
핸드폰은 무음,
노트북은 닫아둔 채였다.

5월의 햇살은 봄이라 부르기엔 조금 따뜻했고,
강물 위엔 연한 바람이 흘렀다.
벚꽃은 이미 져 있었지만,
그 잎새의 잔향이 여전히 공기 속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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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예의 있는 반항〉을 연재 중인 창작 스토리 작가입니다.일상의 언어와 사람 사이의 온도를 다루며,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깨우는 세계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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