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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1부✧예의 있는 반항✧빛을 잃은 일상의 언어10화

보이지 않는 위계, 서연의 시선 너머

by bluedragonK

오후의 빛이 창문 틈을 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재하는 천장을 바라본 채 천천히 눈을 떴다.
한밤의 기억은 희미했고,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스쳤다.

“그 얘기는 그냥 다음에 하자.”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엔 묘한 무게가 있었다.
잠은 깊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현실과 생각이 교차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작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얼음을 컵에 담고 인스턴트커피를 붓자, 투명한 얼음이 딸그락거리며 부서졌다.
짧은 소리 하나에도 머릿속은 다시 이틀 전으로 돌아갔다.

아르바이트, 부모님 매장, 그리고 관리비 고지서.
단순한 숫자라 생각했던 항목들이 이제는 낯설고 섬세한 구조처럼 다가왔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더 많구나.”

그는 중얼거리며 노트북을 열었다.
빈 문서 위에 짧게 타이핑했다.


관리비, 전기세, 수도세 — 항목 세분화 필요.
다음 방문 시 관리사무소 확인.
아버지 고지서 사본 요청.


글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창밖 햇살이 더 강해졌다.
시계는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책꽂이에서 한 권의 만화를 꺼냈다.

《신의 물방울》, 총 44권 중 7권째.
책을 펼친 손끝에 와인의 향 대신 문장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이 만화는 언제 봐도 따뜻해.”

몇 장을 넘긴 뒤 그는 샤워기로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어깨를 타고 흐르자 머릿속의 복잡함이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다시 외출복을 챙겼다.
오늘은 두 번째 ‘필로소피’의 밤이었다.

그곳은 단순한 바가 아니었다.
도시의 욕망이 한 공간 안에서 향과 조명, 음악으로 증류되는 곳.
누군가는 그걸 ‘감각의 성전’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자본의 무대’라 했다.

재하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저 낯선 구조 안으로 발을 들인 한 사람일 뿐이었다.

민규의 목소리가 무전기로 들려왔다.
“형, 오늘은 차 직접 몰아야 될지도 몰라.”

“왜? 어제까진 그냥 옆에 탔잖아.”

“오늘 발렛 한 명이 급하게 빠졌어. 형이 대신해야 돼.”

“……알겠어.”

짧은 대답 뒤, 그는 숨을 고르며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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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예의 있는 반항〉을 연재 중인 창작 스토리 작가입니다.일상의 언어와 사람 사이의 온도를 다루며,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깨우는 세계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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