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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1부✧예의 있는 반항✧빛을 잃은 일상의 언어11화

그녀의 여름은 너무 일찍 도착했다

by bluedragonK

새벽 세 시 반.
재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룸미러에 비친 그의 얼굴이
서연의 마음 한켠을 오래된 기억처럼 스쳐 지나갔다.
책만 읽던 시절의 자신, 모든 걸 잃고 울기만 하던 자신, 그리고 지금.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의 상처를 따라 걷는 일일지도 몰라.’

차창 밖으로 스치는 도로의 불빛들이 길게 흘러내렸다.
거리엔 아무 소리도 없었고, 새벽 공기엔 아직 식지 않은 여름의 열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늘은 미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주 먼 옛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서연의 어린 시절은 고요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 미술을 전공했던 다정한 어머니, 그리고 책을 좋아하던 자신.
그 집에는 언제나 잔잔한 평화가 흘렀다.
아침이면 세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햇살을 받으며 식사를 했고,
주말이면 근교 서점이나 공원으로 나가 바람을 쐬곤 했다.

아버지는 꼼꼼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직원과의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었고, 어떤 일에도 원칙을 지켰다.
어머니는 그런 남편 곁에서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채 살아갔다.
그녀는 집안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예술처럼 여겼다.
서연은 그 사이에서 자랐다.
세상은 따뜻했고, 믿을 만했고, 사랑은 오래도록 이어질 거라 믿었다.

책이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
서연은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사랑했다.
책 속 인물과 대화하듯 읽었고,
가끔은 그들의 문장을 베껴 노트에 적으며 위로를 얻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인문학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었고,
자연스럽게 국문학과 진학을 택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평일엔 학교 수업을 듣고, 주말엔 집에 내려와
어머니와 요리를 하고 아버지와 와인을 나누며 인생 이야기를 했다.
그때 그녀의 눈빛은 맑았다.
하지만, 평온은 언제나 가장 짧게 머무른다.


대학 3학년 봄, 아버지의 회사에서 횡령 사건이 터졌다.
처음엔 단순한 회계 실수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드러난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회계 담당자가 수십억을 빼돌려 해외로 도피한 것이다.
언론은 연일 아버지를 의심했다.
“대표가 몰랐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서연은 그 문장을 아직도 기억한다.
신문의 활자보다 차가운 말투였다.

어느 아침,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말없이 영장을 내밀고,
아버지의 두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장면을 지켜봤고,
서연은 몸이 굳은 채 서 있었다.
그날 이후 집 안의 공기는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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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예의 있는 반항〉을 연재 중인 창작 스토리 작가입니다.일상의 언어와 사람 사이의 온도를 다루며,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깨우는 세계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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