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적 위로는 오래가지못한다.
나는 정신승리를 좋아한다.
그저 단순한 감정적 위로는 힘이 없다. 그 순간 아주 잠시 통증을 잊게 해 줄 수는 있지만, 결국 내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단순 위로로는 어떠한 일의 중심 원인을 건드리지 못한다.
정신승리는 머리로 이성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이해라는 것은 원인-결과를 납득했다는 것이다. 뭔가를 납득하면 내 삶에 적용할 수 있고, 내 삶을 바꿀 수 있다. 감상적 위로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이다.
예를 들어, 아 나는 돈이 없어 우울해.라는 감정에 돈은 행복에 중요한 게 아냐.라는 단순한 허상적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돈이 행복에 중요하지 않은지 직접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돈이 없건 있건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중심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돈은 많이 벌어도 만족을 못 하지만, 정신승리를 하면 내 삶에 대해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정신승리로 심리의 기저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승리'를 가져오는 그 포인트가 바로 내 심리의 정확한 약점이자 아킬레스 건이기 때문이다. 자꾸 패배하는 느낌이 들고, 자꾸 우울해진다면, 반사작용으로라도 자연스럽게 정신승리를 시도하게 된다. 그 승리하고자 하는 지점이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인 것이다.
정신승리로 집요하게 문제를 파고들다 보면 어느샌가 원인이 되는 부분에 맞닿게 된다. 이 원인을 제대로 공략해야 나의 감정을 제대로 위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리에 골육종이 생겼을 때, 통증에 대해서 진통제를 백날 아무리 센 것을 쓴다고 가정해보자. 그 통증을 잠시 잊게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그 통증을 영원히 없애 줄 수는 없다. 마취를 하고 다리를 째고 직접 그 원인이 되는 암 덩어리를 절제해야, 통증이 없어진다. 결국 정신승리는 그 암 덩어리를 파악하고 절제하는 작업이다.
정신승리는 나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게 한다. 정신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논리가 필요하고 논리가 필요하려면 정확한 파악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논점에 대해 파악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논리도 세울 수 없다. 그 논점은 바로 나의 감정이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 생기는 우울함, 못 생겨서 생기는 자괴감, 친구가 없어서 생기는 외로움, 성공하지 못해 생기는 불안감 등등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맞닥뜨렸을 때, 단순히 그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감정만으로도 벅차서 그 원인은 들여다볼 엄두조차 못 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감정을 망각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보고, 유튜브를 틀고, 넷플릭스와 왓챠를 시청하고, SNS를 구경한다. 잠시 잊을 순 있지만,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이는 더 큰 허무함과 더 부정적인 감정을 가져올 뿐이다. 이때 정신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회피가 아닌, 적극적으로 원인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내 감정 해결의 첫걸음이다.
정신승리는 주제에 대해 다방면으로 생각하게 된다. 정신승리라는 것부터 일단 일차원적으로 떠오르는 단순한 생각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신승리는 제2, 제3의 방법으로 이 논리를 이겨내고자 노려한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관점으로도 분석하게 된다. 내가 괴로운 원인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나에게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통상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을 '내'가 납득하기 위해 고심하다 보면 전혀 몰랐던 부분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이 부분에서 힘들어했구나, 나는 이 부분을 신경 썼구나. 나의 여러 가지 면들을 분석하고 깨닫게 된다.
이를 통해서 나만의 철학이 생긴다. 나 스스로에 대해 분석하고 파악하면서 여러 가지 논리를 펼치는 그 모든 과정이 철학의 시작이다. 다른 사람들의 논리와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대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 시작은 매우 중요하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세상에 대한 나의 관점을 만들게 되고 이는 철학이 된다.
세상이 강요하는 일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과 세상이 원하는 것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되,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부할 수 있다. 나만의 철학이라는 단단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분석과 평가와 논리 도출의 과정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만의 철학은 곧 나의 주체성이다. 몸은 나 일지라도, 나의 생각은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만든 것이라면 나라는 존재의 주체성은 없어진다. 예를 들어 내 몸에 다른 사람의 뇌를 이식한다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아니고 이식된 뇌의 주인이 된다. 나만의 생각이 없다는 건 세상이 만들어놓은 인공지능 로봇과 다를 게 없다.
나의 주체성은 내가 느끼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위해 나 스스로에게 집중한다. 이는 나만의 삶으로 가는 길이 된다.
나만의 철학에 책과 독서토론은 큰 도움이 된다. 책은 정보에 있어서 가장 퀄리티가 높은 매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글을 내긴 하지만, 그래도 보통은 가장 전문가라고 공인된 사람 혹은 유명한 사람이 자신의 주장과 근거와 논리의 핵심을 적어놓은 것이 책이다. 물론 책이라고 해서 모두 맹신해서는 안 되겠지만.
독서 토론은 다양한 사람들과 논리적인 대화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별 시답잖은 대화로 보낸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우정을 잃을 각오가 필요하다. 속으로는 다르게 생각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겉으로는 공감해주는 경우가 많다. 또한 각 잡고 논리적인 대화를 하기도 쉽지 않다. 또한 아는 사람들의 범위는 보통 자신과 비슷한 위치, 상황, 직업, 환경에 놓여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독서 토론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것은 대체할 수 없는 큰 장점이다. 다른 상황에서 오는 생각의 차이는 나의 관점을 넓혀준다.
유튜브나 SNS보다는 책과 독서토론 모임에서 얻는 정보의 질이 훨씬 높았고, 나의 관점을 만드는 데도 훨씬 도움이 되었다.
정신승리는 의지력과 행동력을 상승시킨다. 세상이 강제로 설정해주는 목적이 아닌, 나로부터 기원한 내 삶의 목적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정신승리를 통해 나만의 철학이 생기고, 이는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판이 된다. 내가 스스로 목적을 깨닫고 나면, 과정을 걸어가는 데 있어 훨씬 덜 힘들다. 내가 납득하여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와, 남이 시켜서 하는 의지의 차이는 크다. 직장에서는 작은 보고서 하나 쓰기도 귀찮았는데, 집에 오면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면서 힘을 얻는다. 일찍 출근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피곤하지만, 휴가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다. 나 스스로 이해하고 나면 에너지도 생기고 힘이 난다. 힘을 내서 조금씩 작은 일들을 해 나가게 된다. 그러면서 삶에 대한 의지와 애정이 생긴다.
또한 역경과 고난에도 좀 더 쉽게 이겨낼 수 있다. 나의 중심이 단단히 서 있기 때문에 덜 휘둘리기 때문이다. 당장 이 고난이 나에게 왜 왔는지, 납득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쉽게 무너진다. 하지만 내가 나만의 정신승리와 철학으로 무장한 상태에서는 힘들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삶의 주체가 나라는 것은, 살아나가는 데 있어 정말 큰 힘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내가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안다면, 역경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정신승리는 누가 대신해주지 못한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 해야지만 정확하게 이해된다. 나 역시 브런치에 여러 가지 삶의 주제들에 대해 나만의 정신승리들을 적지만, 그것도 다른 이에게는 참고용일 뿐이다. 이런 생각도 있구나, 이런 관점도 있구나, 라는 마음으로 읽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절대적인 정답은 없다. 각자만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정신승리는 시작한다. 그러니 누가 대신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최소한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만의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고 생각해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우리 모두가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나 또한 나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