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만 쉬어도 100만 원

우리 딸, 사람 됐네

by 도시 언니

숨 만 쉬어도


퇴직 후에 일을 쉬고 있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수다를 떠는데 친구가 푸념처럼 "아무것도 안하고 남편이랑 나랑 숨 만 쉬어도 xx만 원 들어......"라고 말했다.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되었으니 가계가 휘청거린다고.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 생각보다 고정비가 커서 걱정이라는 고민을 듣자 귀가하는 나의 발걸음도 절로 무거워졌다.


곧장 집에 돌아와 가계부 파일을 들춰보며 나도 '한 달 고정 지출비'를 살펴봤다. 전세자금 대출 이자, 각종 보험과 청약저축, 관리비, 수도세, 전기세, 도시가스세, 핸드폰 통신비까지. 합쳐보니 얼추 백만원에 달한다.


'나는 한 달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숨만 쉬어도 100만 원이 나가는구나...'


누군가에게 얼마 안되는 돈 일 수도 있지만 1인 가구의 가장인 나에게 100만 원은 꽤 큰 돈이다. 지금 같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다달이 최소한 100만 원, 1년이면 1,200만 원이 드는 셈이다.



나 홀로 새마을 운동


사실 대출이자나 보험 같은 돈은 지금 당장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물론 대출 원금을 빨리 상환하면 이자액은 줄겠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적금 대신 일정 금액을 다달이 원리금을 상환하는 일명 '우선 빚부터 갚자' 전략을 취하고 있지만 요즘 워낙 저금리 시대라 원리금을 다달이 상환해 나가도 줄어드는 이자폭이 눈에 띄게 크지 않았따.


그렇다면 남은 건 공과금이다. 고정 지출 중에 정해진 금액의 관리비를 제외하고 한 푼이라도 아낄 수 있는 영역은 공과금 뿐이다. 그래서 요즘 '나홀로 새마을 운동' 중이다. 외출 할 때 반드시 집 안의 불을 모조리 끄고 집에 있을 때도 되도록 불필요한 조명을 켜지 않는다. 한 칸씩 On/Off 할 수 있는 멀티탭을 이용해 평소 잘 쓰지 않는 기계들의 전원을 차단해 단 돈 1원이라도 아끼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다.


부모님 댁에서 삼시세끼 따순 밥 먹고 무더위와 한파를 피하며 편안하게 생활하던 시절에는 단언컨데 전혀. 1도 신경도 안썼던 부분이다. 아무 거리낌없이 더우면 에어컨을 틀었고 한겨울에도 몸에 땀이 많다는 이유로 두꺼운 옷 대신 얇은 실내복을 입고 난방을 세게 돌렸다. 물소리가 좋다며 샤워하면서 물 낭비도 많이 했다. 생활비 한 푼 내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누렸다니, 그 시간이 꿈만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깊이 반성의 목소리가 울린다.


잠시 같이 살던 막내 동생을 쫓아다니며, '방에 불 끄고 다녀라' '양치하면서 물 틀어놓지 말아라' '휴지 펑펑 쓰지 말아라' '난방 세게 하지말고 옷을 더 입어라" 등등 나도 모르게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대자 참다못한 동생이 핀잔을 주었다.


"언니 잔소리좀 그만해. 꼭 엄마 같아."


아직 대학생인 늦둥이 막내의 세상 철없는 소리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너도 나중에 니가 벌어서 써봐라. 그런소리가 나오나!' 라고 소리 지르고 싶다. 물론 나 역시 독립하자마자 절약 운동에 돌입했던 것은 아니다. 자취 4~5년 차까지는 부모님과 함께살던 시절의 생활 습관을 고치지 못해 고정비가 꽤 높았다. 하지만 요즘 정말 많이 변했다. 이런 나를 보고 부모님은 "우리 딸 드디어 사람 됐다." 라고 하시는 거 보면 부모님께 사람됨을 인정받는데 1인 가구 독립만한게 없다는게 요즘 내 지론이다.



딸, 사람 됐구나!


가끔 안온한 보금자리가 그립고, 자취하면서 지출하는 비용이 아까워 부모님 집으로 철수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이 목돈도 빨리 모으는 것 같아 부러웠다. 물론 부모님께 생활비를 따로 드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어찌 됐든 그건 생판 모르는 남이 아니라 혈육에게 드리는 돈이 아닌가. 부모님들이 자식들이 준 생활비를 살뜰하게 따로 모아 나중에 목돈으로 되돌려 주시는 훈훈한 사례들을 왕왕 목도하며 금이라도 이 자그마한 집에서 철수해 하나 고민했던 순간이 많다.


다달이 100만 원을 허공에 날리기만 할 뿐인가. 식비를 포함해 기타 생활비로 소소히 지출되는 돈도 상당했다. 자취를 하다보면 1명의 인간이 살아가는데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놀라게 된다.


취향에 따라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한 사치품은 제외하고 세탁 용품부터 화장실 용품까지 어찌나 수시로 사야하는 생필품들이 그렇게 많던지! 샴푸는 왜이렇게 빨리 없어지고, 분명히 산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키친 타월과 물티슈는 왜이렇게 빨리 사라지며, 섬유유연제는 언제 다 쓴건지 놀랍다. 쇼핑을 좋아하긴 했지만 자취하고나서 생필품 쇼핑은 정말 원없이 했다.


어쩌면 종잣돈이 될 수도 있었던 월 100만 원이 못내 아쉽긴 해도 요즘은 독립해 살아보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살벌한 서바이벌의 세계를 모르고 살지 않았을까? 지금의 고생이 언젠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지혜로 재탄생 할 것이라 믿는다. 하다 더 보태자면, 독립을 통해 부모님께 철딱서니 없고 세상물정 모르던 딸내미에서 어엿이 성숙한 인간로 인정 받게 된 어마어마한 사건이 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독립은 한 번쯤 인생에서 도전해 볼만한 제법 값진 경험 같다.


<독립하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어>
제 2장.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 2번째 글
도서 출간: 2021년 1월 예정



keyword
이전 03화눈물 젖은 샤인머스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