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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하면 처음 얻은 작은 원룸은 회사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10분 거리에 있었다. 그곳은 내게 '정식 집' 이라기보다 그저 잠시 스쳐가는 '임시 거처' 같은 느낌이었다. 52시간 근무가 일반화되기 전, 소위 '라떼는 말이야' 시절의 신입 사원이었던 나는 입사 1~2년 차까지 제법 야근을 많이 했다.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인 정규 근무 시간을 마치고도 오후 6시쯤 선배들과 구내식당에 내려가 식사를 하고 돌아와 다시 업무에 임했다. 이르면 오후 7~8시, 늦으면 오후 10시~11시까지 야근하다 귀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때는 그렇게 일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꼬꼬마 막내 사원이었던 나는 회사에서 궁금하고 배우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바늘구멍 같은 좁은 취업 문을 통과해 어렵게 취뽀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 허공에 이불 킥 두어 번 날릴 생각이지만 어렸고 열정이 넘쳤다.
야근하면서 선배들 몰래 동기들과 메신저로 떠드는 수다도 재미있었고 회사에서 저녁 먹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집에 가면 오히려 조그만 원룸에서 혼자 뭘 해먹기도 애매해서 회사에서 균형 잡힌 식사를 그것도 '공짜로'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가뭄에 콩 나듯 일찍 끝나는 날은 대부분 미혼이었던 동기, 선후배들과 어울려 밤늦도록 온갖 곳을 쏘다니다 자취방에 들어갔으니 사실상 그곳은 거의 잠만 자는 숙소였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모든 것이 임시인 상태일까?'
나의 잠만 자는 숙소 생활은 막연히 내가 결혼을 하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언제 결혼하나? 20대 후반,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는 결혼을 인생에서 특별히 다른 일들보다 최우선 가치로 놓지 않았다. 다분히 방관자적 태도였던 것 같지만 비혼주의자가 아닌 이상 100세 시대에, '관 뚜껑 닫기 전 언젠가 한 번은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소위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어도 운명의 반쪽을 만나지 못한 채, 어쩌다 보니 나는 30대 중반의 1인 가구가 되었다. 그 사이 친구들도 입사 동기들도 대부분 결혼을 하고 심지어 후배들도 나를 추월해 기혼자 대열에 합류했다. 서울 하늘 아래 내 집 마련이 '하늘의 별따기'라지만 혼자보다 그래도 둘이 힘을 합치니 다들 어찌저찌 보금자리들을 구하는 것 같았다.
물론 손바닥 보듯이 빤한 우리들의 고만고만한 연봉과 월급으로는 자기 주택 마련은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본본인과 배우자의 신용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최대로 받으면 번듯한 전세집 정도는 구하는 것 같았다. 물론 형편이 넉넉한 친구들은 양가 도움을 받아 어엿한 자가 소유주가 되기도 했다.
그런 신혼 집들이에 초대받으면 기분이 좋다가도 막상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점점 허탈해졌다. 신축이면 모든 것이 반짝반짝 새것이어서 좋은 게 당연했지만 구축이어도 그 못지 않게 부러웠다. 내부를 리모델링하여 당장 온라인에 소개되어도 손색없도록 예쁘게 꾸며놓은 그들의 '정식 주거지'가 1인 가구로 임시 거처 생활중인 내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줬다.
절대적으로 내 공간이 작은 건 차치하고, 언젠가 청산할 임시 거주지 생활을 하고 있어 5년 넘게 자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세간 살이랄 것이 없었다. 주방 용품이나 생활 용품은 주로 다O소에서 값싼 것들을 구매했고 홈 인테리어는 꿈도 꾸지 않았다.
찬기들은 조악했고 그나마 부모님 집에서 틈날 때마다 한두 개씩 몰래 가져온 주방 용품이 그나마 봐줄만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2% 부족해 보였다. 제각각인 가구들도, 알록달록한 수건들도, 하다 못해 들쭉날쭉한 물컵들까지 무엇하나 서로 어우러지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그 모든 것을 인식하지 않았을 때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는데 한번 신경이 쓰이자 계쏙 거슬렸다. 그간 혼수용으로 값비싸고 세련되었으며, 동시에 예쁘고 기능까지 좋은 신혼 집 살림살이들을 보며 다져진 내 심미안에 올망졸망한 내 살림살이는 한없이 초라하고 남루해 보였다.
만약 결혼을 하기 전까지 이렇게 임시 거처 같은 1인 가구 생활을 계속한다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만약 결혼을 아주아주 늦게 하거나, 혹은 영혼의 단짝을 못 만나면? 그럼 나는 예쁜 테이블에 쳐다만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릇들에 숟가락 젓가락 가지런히 받침대에 올려놓고 정갈하게 밥을 담아 먹는 순간을 평생 누리지 못하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대로 된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커지자 엉뚱하게도 결혼이 너무 하고 싶어 졌다. 결혼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하고 초조하여 잠 못 드는 밤이 늘어났다. 이 조급증은 동갑내기 친구 집들이에 초대받은 이후 전혀 다른 생각으로 변했다. 오래 전 나처럼 최근 독립의 첫발을 내딘 친구였는데 친구의 초대로 집들이를 가보니 '세상에나 마상에나'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우리는 분명 똑같은 1인 가구이자, 전세 세입자였지만 알맹이는 매우 달랐다. 워낙 감각이 좋기도 한 친구지만 자취집을 아주 세련되고 안락하게 꾸며놨다. 언젠가 자기 공간을 가지게 되면 쓰겠다며 어릴 때부터 하나둘 모아두었다는 식기며 주방용품들, 인테리어 소품들은 여느 신혼집 못지않게 예쁘고 고급스러웠다. 친구는 나처럼 막연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대충 사는 것이 아닌 지금의 삶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요즘 나는 정식 주거지에 안착하기 위해 잠시 스쳐가는 임시 거처라고 생각했던 마음을 고쳐 먹는 중이다. 내가 지금 사는 공간과 그곳에서 삶은 온전히 내가 결정하는 때문이다. 비록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현재를 충실히 보내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퇴근 후 리빙샵에서 마음에 쏙 드는 커틀러리 세트와 과거의 나였다면 쳐다도 안 보았을 고급 찻잔 세트들을 주문했다. 물론 나 혼자 쓸 거니까 한 세트씩만 샀다.
그렇게 나 혼자라도
그게 임시일지라도
어쩌면 반영구적일지라도,
바로 지금,
현재를 잘 살아보기 위해 노력 중이다.
<독립하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어>
제 2장.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 3번째 글
도서 출간: 2021년 1월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