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럭셔리로 최상급 과일을 사먹습니다.
20대의 나에게 '스몰 럭셔리'란 내 월급에서 감당 가능한 명품들이었다. 언감생심 감히 넘보았다가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초고가 명품들 말고 명품 화장품이나 향수 같은 것들. 아주 가끔 인센티브가 후하게 터지는 해에 큰맘 먹고 사봤던 1-2백만 원대 명품 가방 정도가 전부다.
어릴때부터 워낙 옷이라면 사죽을 못써서 명품이 아니더라도 철철히 구매했던 옷과 가방, 신발들을 가지고 신나게 멋도 내봤고 소위 '기본 아이템'이 웬만큼 갖춰진 30대가 되자 꾸밈에 대해 예전만큼 열정이 솟구치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요즘 '스몰 럭셔리'란 백화점에서나 팔 법한 '최상급 프리미엄 과일들을 사먹는 것'이다. 어릴때부터 식사하면 엄마가 자연스럽게 후식으로 과일을 내주셔서 식후 과일을 챙겨먹는 것은 내겐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독립하면서 제철 과일을 챙겨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다. 의식적으로 과일과 채소를 구매하지 않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 배달 음식이나 인스턴트, 간편식의 무덤에서 신선한 제철과일은 사막의 오아시스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다. 나는 과일중에서도 가장 최상급 품질의 과일들을 소량으로 사먹는다.
물론 처음부터 최상급 과일을 사먹은 건 아니다. 미숙한 요리 솜씨에 라면 물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해 컵라면만 먹었던 필자다. 그러다 자취 4~5년만에 '아, 이렇게 살다가는 몸이 정말 쓰레기가 되겠구나' 싶어 좀 아찔해졌다. 실제로 그때쯤 내 몸에서 각종 이상 증후들이 꽤 심각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더이상 각종 영양제나 수액으로 버틸 수 없다고 느껴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각성했다. 그 이후로 유튜브 쿡방도 열심히 챙겨 보며 어설프지만 집밥도 해먹고 과일과 채소 같은 신선 식품들도 주기적으로 사먹으며, 나름의 보식 활동을 하고 있다.
각성하기 전까지 나는 어떤 과일이 제철인지 전혀 몰랐다. '여름에는 수박, 겨울에는 감귤' 이것이 내가 제철 과일에 대한 가진 지식의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막상 과일을 사먹긴 하는데 전혀 요령없는 '폭망구매'를 자주했다. 제철이 아니니 당연히 비쌀 수 밖에 없는 과일을 별 생각없이 턱턱 구매하거나, 맛있는 과일 고르는 요령이 전혀 없어 무턱대고 겉만 번지르르한 과일을 덥썩 집어왔는데 맛이 제대로 들지 않아 떫거나 맹탕인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설상가상으로 집 근처에 맛있는 과일을 싸게 파는 곳도 없어 어설프게 동네 마트 매대를 서성이다 '겉만 보고 구매 -> 맛 없음 -> 처치곤란해서 일단 방치 -> 상해서 버리기' 루트를 계속 반복했다. 전략을 바꿔 온라인 구매도 해봤지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분명 사람들이 다 맛있다고 후기가 엄청 달린 상품인데도 배송물은 실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외근하러 방문한 백화점에서 팀장님이 직퇴하라고 하시길래 신이 나서 오랜만에 아이쇼핑이나 할 겸 백화점 안을 무작정 떠돌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하 식품관까지 흘러가 있었다. 식품들을 워낙 예쁘게 진열해두기도 했지만, 한 눈에도 그곳에 있는 과일과 채소들은 지금껏 내가 구매했던 상품들과는 분명 '퀄리티', 일명 '떼깔'이 달라 보였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복숭아 2개짜리 소포장 상품을 담아 계산하고 집에와서 먹어보니 세상 그렇게 달콤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거지!' 싶어 눈이 번쩍 뜨였다. 물론 복숭아 2개 가격치고는 매우 비싼지만 내 기준에서 팍팍한 삶에 가끔 이정도 호사는 누려도 괜찮겠다 싶은 가격이었다.
오히려 소량으로 조금씩 사먹을 수 있어 1인 가구에게 최대의 적인 '음쓰(음식물 쓰레기)'도 많이 안생기고, 일석이조 아닌가! 그 후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백화점이나온라인 프리미엄 식품관에서 최상급 과일을 조금씩 사먹곤 했다. 집에서 제일 예쁘고 비싼 식기에 최대한 예쁘게 플레이팅해서 먹는 것이 현재 내 삶의 스몰 럭셔리요, 스스로를 위로하는 힐링 타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에게 '사내 갑질'로 된통 당한 일이 있었다. 그는 그저 만만한 분풀이 상대가 필요했고 그 상대는 바로 하급자인 나였다. 억울하고 슬픈 마음이 들어 큰맘 먹고 요즘 유행한다는 비싼 포도. 샤인머스캣을 처음으로 한 송이 샀다. 포도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내가 걱정되어 갇은 부서 선배들이 나를 쫒아왔다. "괜찮아?"라고 묻는 선배의 한마디에 애써 회사에서 꾹꾹 눌러왔던 서러움이 폭발해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당황한 선배들이 안되겠다 싶었는지 근처 카페로 데려가 따뜻한 차 한잔 사주며 진정시켰다. 그러나 한 한 번 터진 눈물샘이 쉽게 마르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눈물콧물 흘리며 서럽게 꺼이꺼이 울었다. 훗날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렇게 대성 통곡하면서도 끝까지 샤인머스캣 한 송이를 소중히 꼭쥐고 있는 내 모습이 선배는 참 짠한데 좀 웃겼다고 했다.
그렇게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집에 와서 소중한 샤인머스캣을 씻어 먹는데 또 어찌나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듣던대로 참 달고 맛있긴 했다. 몇 개 안 먹은 것 같은데 순식간에 포도 송이가 팍팍 줄어 아쉬우면서도 앞으로도 이걸 계속 사먹으려면 또 회사에 가서 아무 일도 없는 듯 일해야 하는 내 처지가 안쓰러워서 한 송이를 다 먹는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샤인머스캣'이었다.
요즘도 가끔 최상급 과일을 주문해 먹는다. 그 사이 요령이 제법 생겨서 꼭 백화점에서 구매하지 않아도 농장에서 직접 주문하거나, 기타 여러가지 경로로 질 좋은 과일들을 사먹는 방법을 체득했다.
오늘은 지금쯤 집에 배송되어 있을 나를 위한 스몰 럭셔리 '노란 수박'을 기대하며, 발걸음도 가벼운 퇴근길이다.
<독립하면 저절로 되는 줄 알았어>
제4장. 생각보다 제법 잘 살고 있어요- 1번째 글
도서 출간: 2021년 1월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