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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Mar 21. 2024

잿빛 속에서 태어난 어중간한 아이

잿빛은 하얀색에도 검은색에도 가까워질 수 있다. 될 수는 없지만.

나의 세상에는 화려한 원색이 없다.


새하얀 빛도, 깜깜한 어둠도 나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잿빛의 시야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다양한 색깔로 가득 차있더라도 내 눈에는 전부 탁한 빛깔로 보일 뿐이었다.



나는 그런 세상이 두려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려움은 무관심으로 변해갔다. 왜냐하면 나랑 상관이 없는 것들투성이였으니까.



나는 평온과 고요 속에서 태어났다. 


감정의 변화가 별로 없고, 이성적이며, 불합리에 대해 화를 내기 전에 왜 불합리한지 한번 생각을 해보며, 나와 관련된 것이 아니면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사람.



나는 그것을 '우울'이라고 부른다.





나는 어려서부터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를 문제라고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나도, 나의 부모님도. 그래서 '조금 특이한 아이' 정도로 불렸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반 친구가 말을 걸어도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을 정도로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특이한 아이 정도로 여겨졌다. 내가 이상하게 밖에 나가기 싫어하고, 밖에서 혼자 밥을 먹지 못해도, 마음에 담은 생각을 하지 못해도, 다른 사람 눈치를 지나치리만큼 보는데도,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걸 싫어하는데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티나지 않았으니까. 



애매했다. 어중간했다. 나는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시키는 공부도 제대로 했다. 나의 침묵은 해결해야 할 정도로 민감한 문제가 아니었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할 뿐 나는 완벽하게 돌아버린 이상한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보통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괴로웠다.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됐으니까.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을지에 대해서 강박적인 고민을 했다. 



왜 나는 말을 안하지?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나는 실제로 저런 생각을 반복했다. 


나는 내가 친구가 없다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가 없는 아이'라는 평가에는 민감했다. 보통은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니까.




주변 사람들, 부모님, 친척들이 나를 조금 이상하게 보기는 하지만, 대놓고 욕을 하거나 꺼지라고는 하지 않았다. 말 똑바로 하라고 혼내지 않았다. 뒤에서 호박씨를 깐다면 모를까, 아버지에게 '니 새끼 데리고 저리 꺼져'라고 막말을 한다면 모를까, 내 앞에서는 다들 '착한' 분들이셨다.



"우리 딸은 안 그러는데. 뭐 그럴 수 있지." 

"크면 정신 차리겠지." 

"가끔 저런 애 있어."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나를 이렇게 평가했다. 



"사주에서 그러는데 넌 나중에 해외를 밥먹듯이 드나드는 큰 사람이 될 거야."

"보통 이런 애가 커서 크게 되더라고."

"너는 엄마아빠 딸이니까 당연히 능력 있지."

"넌 네 오빠랑 다르게 돈 잘벌게 생긴 상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을 고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 한 명뿐이었다. 

기대에 맞게. 올바르게. 정신 차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


사회에 알맞은 인간으로, 적응력이 뛰어난 인간으로. 규칙을 잘 지키고 주변에 민폐 끼치지 않는 정상적인 사람. 누구나 친해지고 싶어할 만한 능력 있고 착하며 매력 있는 사람.



정상적인 사람. 그것이 나의 일차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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