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고 못생긴 아이의 입 밖으로 나온 언어가 내 귀를 거쳐 심장을 후비고 지나갔다.
지금이라면 정색을 하든 돌려까든 한마디 해줬겠지만, 미숙했던 시절의 난 그럴 수 없었다. 그냥 분해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상처 입은 아이는 비난의 화살을 상대방이 아닌 엄마에게로 돌렸다.
비참했다.
원망과 분노가 몸 안에 가득 차 올랐다.
슬픔을 연료로 바꾼다면 우주까지 날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엄마는 나의 유년 시절에 띄엄띄엄 존재했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났다가 예고도 없이 불쑥 돌아왔다. 한두 번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18년 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그랬다. 그래서 난 엄마를 믿을 수 없었다.
나중에 가서는 함께하는 순간에도 온전하게 행복하지 않았다.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마음속에 항상 그런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난 진실로 그렇게 믿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이 나에겐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그래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왜 떠난다 말인가?
엄마에겐 그게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온 것뿐이다.
그걸 나중에 알았다.
내가 상처 입어 누더기가 된 후에야
그제야 알았다.
조울증이란,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정신질환이다.
조증땐 지나친 자신감, 지나친 과다 활동, 수면 욕구 감소, 너무나 고양된 기분이 증상으로 나타난다.
우울증일 땐 지나치게 우울한 기분이나 초조감, 인생에의 지나친 허무감, 자살 욕구의 증상이 나타난다.
어느 쪽이든 극단으로 가면 감정이 '지나쳐'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내 삶에 공백으로 존재했던 구간동안 엄마는 병원에서 살았다. 어찌 보면 엄마의 삶 또한 멈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엄마는 사는 동안 나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엄마가 없는 동안에도 나의 삶은 '엄마 없이' 이어졌지만, 정작 엄마의 삶은 정신병동 안에서 멈춰 있었으니까.
다 알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엄마를 미워했다.
왜 엄마는 그런 병에 걸려서 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삶을 사는 걸까.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답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조울증은 유전병이니까.
그렇게 태어난 건 결코 엄마의 탓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종종 엄마가 밉다.
상처 입은 아이는
여전히 종종
비난의 화살을 엄마에게로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