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살던 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
고양동 시골로 내려오기 전까지
우린 강남 한복판에서 살았다.
엄마의 권유로 살게 된 그곳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설고 별로였다.
놀만한 곳은커녕 저녁 10시가 넘으면 먹고 싶은 음식을 배달시키기도 못했다.
24시간 뭐든 배달되고, 언제나 복작복작했던 없는 게 없던 곳에서 살던 우리는
그곳에 영 적응을 못했다.
이사한 초반, 우리는 심하게 방황했다.
난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언니는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시간이 갈수록 우린 그곳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언니가 불쑥 선언을 한 것이다.
이 집에서 나가겠다고.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언니의 사정은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나는?'
그게 문제였다.
언니가 없는 이곳에서 딱히 살 이유가 없었다.
'나도 이 집을 나가겠어!'
아빠를 벗어나기 위해 서울에 있는 대학을 알아볼 때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집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그 다음해 여름
우리는 하루 차이로 이사를 나갔다.
차가 있는 언니는 개발 중인 신도시로,
장롱면허인 난 교통이 좋은 구도시로
엄마는, 그곳에 혼자 남겨졌다.
아니, 남자친구랑 둘이 남겨졌다.
그게 문제였을까.
엄마는 우리가 떠난 지 4년 만에 조증이 왔다.
가까이 살았다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신호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이따금씩 들었다.
엄마가 입원을 하고
퇴원을 하고
남자친구를 바꾸고
혼인신고를 했을 때도
내 마음 한쪽엔
아주 작은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으로는 부족할까.
사실, 그게 부족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매일 엄마를 살피고 함께 살아야 한다면
엄마는 살아도 난,
못 살 것 같다.
성인 여자 3명
넉넉지 않은 살림에 같이 사는 게 훨씬 이득이건만
우리가 따로 사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그걸 원하기 때문에
내가, 같이 살기 싫어서
내가, 나부터가 살아야겠어서.
나는 너무도 쉽게 타인의 기분과 감정에 휘둘린다.
아마, 너무도 어릴 때부터
피라미드의 맨 아래, 최약체로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나는 3대가 같이 사는 대가족 사이에서도
평범함을 가장했던 4인 가족 사이에서도
엄마랑, 아빠랑, 언니랑 살았을 때도
언제나 자기주장을 할 수 없는 최약체였다.
늘 남의 눈치를 보기 일쑤였다.
그게 몇 해전, 공황장애를 앓고 난 후에는
더 심각해졌다.
여전히 갑작스러운 연락이 무섭고
이따금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난 아직 괜찮지가 않다.
그래서 우린 따로 산다.
온전히 나 하나 감당하기에도 벅차서
모두가 그러해서
겨우 버티고 살고 있다.
그러다 힘들면 서로에게 기대고
심심하면 만나서 놀고
안쓰러우면 전화를 건다.
사람은 혼자 오롯해야 누군가를 감당할 수 있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면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혼자라서, 따로 살아서,
우리는 각자 오롯하게 삶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누군가 한 명 힘들 때
내민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아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따로 또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