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간을 떼 줄 사람이 저밖에 없거든요
나밖에 없다. 그에게 간을 내어줄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시댁에도 마땅한 사람이 없고 친정 식구에게도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친정 부모님은 물론 남동생도 이식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를 받아보겠다고 했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내 부모는 고령이라 검사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목숨을 건 수술을 하겠다는 딸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잘 안다. 남동생 역시 안 될 일이다. 딸 셋을 두고 얻은 막내아들인 데다 아직 장가도 안 간 동생, 말만이라도 사무치게 고마웠다.
애초에 주치의도 날 지목했었다. 요즘은 혈액형이 달라도 가능할 정도로 의술이 발전했다는데 남편과 나는 혈액형도 같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난 어렵고 힘든 이 일을 쉽고 간단하게 결정한 씩씩한 모습이어야 했다.
남편의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한시가 급했다. 이미 간이 딱딱하게 굳고 기능을 잃어가는 경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일이라도 당장 내 배를 열어 간을 떼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이식 수술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절차 또한 복잡한 일이다.
장기이식에 관한 모든 절차는 장기이식센터 코디네이터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 상담 시간이었다. 코디네이터는 남편보다 간 공여자인 나에게 닥칠 안전에 관한 문제, 그러니까 멀쩡한 사람의 간을 70% 떼어내는 데서 오는 위험과 후유증 등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당시만 해도 막연하게나마 아이를 둘이나 낳았는데 할만할 거라고 생각했다. 큰아이는 두상이 크고 양수가 일찍 터지는 바람에 제왕절개를 했던 터라 불가피하게 둘째까지 두 번의 수술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가졌다는 게 몹시 든든했다. 코디네이터는 상담을 마무리하며 이식 수술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공여자의 자의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여러 번 강조했다.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면 얘기를 하라는 거였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정성을 다해 챙겨봤다. 어디까지나 드라마일 뿐이지만 온전히 내 얘기였고 내가 본 병실 사람들의 얘기, 내겐 극사실주의 다큐멘터리였다. 조정석은 극 중 간담췌외과 교수이자 저명한 간이식 수술 전문의, 이익준으로 나온다. 당연히 간이식 사례가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누가 누구에게 간 공여를 하는지도 주요 갈등 요소이자 감동 포인트가 됐다. 특히 간암에 걸린 장남의 이식을 앞두고 며느리에게 기증을 강요하는 시댁 식구들의 에피소드는 마음 아픈 내용이었다. 난 결코 누구의 강요를 받은 적도 없고 등 떠밀려 선택을 한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며느리로서 감정이입이 돼서 꺼이꺼이 울어가며 봤던 기억이 있다.
이익준은 시댁 식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며느리에게 본인의 의사가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누차 강조하고 여러 걱정으로 간 공여를 망설이는 그녀를 지지한다. 결국 이식 부적합이라는 선의의 거짓말로 그녀를 구해주었고 다행히 남편은 뇌사자 간이식으로 무사히 수술을 받는다는 아름다운 결말이었다.
간 기증이 본인의 자발적 의사인지를 재확인하고 언제라도 그 의사는 번복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제2의 이익준’을 나 역시 여러 번 만났다. 그들은 외로운 길을 걷고 있는 나의 결심이 쉽지 않은 것임을 일깨워주었고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본인만 생각하라는 응원과 격려도 잊지 않았다.
간기증자는 간이식 적합성검사를 통해 최종 이식 가능 여부가 결정되지만 못지않게 이식승인이라는 절차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생체 간이식은 자발적인 기증 의사를 기본으로 하되, 배우자를 비롯해 8촌 이내의 혈족, 4촌 이내의 인척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제삼자의 경우 오랜 기간 이식자와의 친분관계가 유지되었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 절차가 워낙 까다롭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가급적 가족 간의 기증이 수월하다. 때문에 기증의사와 순수성을 확인하기 위한 의료사회복지팀과의 상담 절차도 있다.
“남편께 간 공여를 하기로 하신 게 본인의 자발적 의사가 맞나요?”
“네”
“양가 가족 중 간 공여를 하실 만한 분이 안 계신 가요?”
“네”
“친정 부모님은 본인의 결정에 동의를 하셨나요?”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네. 제 결정에 따른다고 하셨어요”
“본인만큼 어려운 결정 하셨네요”
“네. 이것밖에 방법이 없으니까요”
“아이들이 두 명 있네요. 아직 어린데, 수술 후 회복할 때까지 양육을 맡아주실 분이 계신가요?”
“네, 친정 부모님이 맡아주실 거예요”
“혹시라도 수술이 잘못될 경우 아이들 양육에 대해서는 말씀 나눠보신 적 있으신가요?”
“네?”............
“부모가 모두 수술을 하게 되는 경우라 여쭤보는 겁니다”
“아, 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라”
“네, 이 문제도 고려해 보셔야 합니다. 더불어 본인의 의사를 언제든지 철회하셔도 됩니다. 남편이라고 해서 아내라고 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수술하기 직전까지는 본인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여러 번의 절차를 통해 간 기증이라는 것이 오로지 자발적 의사로 결정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발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기도 하다.
아예 처음부터 ‘난 간을 떼주지 않을 거다’고 더 이상 기대조차 않게끔 선전포고를 한 게 아니라면 간이식이라는 종착역에 가는 기차에 올라탄 이상 중간에 내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식받을 당사자를 비롯해 그 가족 (보통 우리나라 생체 간이식은 가족 간의 이루어지는 것이니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다)의 원망을 견뎌낼 자신도 없고, 혹시라도 내가 기증을 결정하지 못하고 지지부진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에 병이 악화되어 손도 쓰지 못할 상황에 다다르게 되는 상황을 감당할 용기도 없다. 더군다나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뇌사자의 것이 나타나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 될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저런 이유로 누차 ‘자발적 의사’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는 것은 어쩌면 '분명히 당신 스스로 선택한 거야'라는 걸 반복적으로 확인받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구석지고 어두컴컴했던 복도를 빠져나와 건물 밖으로 나오니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쨍한 햇살이 쏟아졌다. 뭔가 다른 세상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수술이 잘못될 경우 아이들 양육’이라는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한 선택이 맞는 걸까. 나 역시 죽음에 한 발 가까워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때서야 내가, 아니 우리 부부가 하려는 수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