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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연못 Aug 19. 2022

가을의 창공

2022.08.17

택시를 타자 쾌쾌한 담배냄새와 텁텁한 모래 냄새가 났다. 라디오에서는 부드럽고 밝은 음색의 바이올린 독주곡이 흘러나왔다. 닫힌 창문을 통해 거리를 바라보았다. 임대 현수막이 붙은 가게들이 여럿 지나갔다. 가구와 전등 그리고 벽지와 장판도 뜯긴 채 깨끗하게 비워져 버린 속을 드러낸 상태였다. 굶다가 죽어버린 짐승의 내장처럼.


병원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짧은 터널 앞에서 택시가 급정거를 하자 운전석 쪽에 있는 생수병이 흔들리며 삼분의 이 정도 남아있는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택시비는 팔천 원으로 천 원 단위로 깔끔하게 떨어졌다. 나머지가 없다는 것이 개운했다..


담당의사의 진료실인 2번 방에는 내 앞으로 스물한 명의  대기환자가 있었다. 비에 젖은 고무 깔창을 미끄러운 바닥에 문지르는 신경질적인 소리, 원무과의 타자기 소리, 진료 대기 번호와 투약 번호를 알리는 짧은 알림음이 반복되는 소리,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환자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뭉쳐서 만들어진 웅성거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체취가 한정된 공간에서 바쁘게 섞이고 있었다. 천장에 달린 체스판 모양의 창백한 조명까지. 내 심장은 불안한 박동으로 뛰기 시작했다.


감각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주변의 청색들을 찾아 눈동자를 움직였다.

균열이 있는 터키석 같은 청색의 인조가죽 의자, 해초류처럼 습기가 느껴지는 청색의 타일, 나무껍질 색깔의 오래된 진료실 문 테투리를 감싸고 있는 녹색에 가까운 청색, 공황장애의 증상에 관하여 적혀 있는 알림판의 배경색은 맑은 바다의 빛이 나는 청색, 그리고 그 바닷가의 근처에서 발견될 것 같은 따뜻하고 매끈한 조약돌 같은 청색의 작은 선풍기. 청색을 기록하기 위해 집어 든 펜의 검은색 잉크가 종이에 자취를 남길 때마다 예민했던 신경들이 조금씩 안정되어갔다.


한 시간 사십삼 분을 기다려 진료실에 들어가자 흰색 바탕에 파란색 줄무늬가 세로로 들어간 빳빳한 셔츠를 입은 담당의사가 앉아 있었다. 삼분 남짓의 대화 동안 잠시의 정적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이 몇 번 반복되었다. 피로한 눈. 내게 다른 문제가 생긴 것일까.


수납을 할 때는 대기를 하지 않고 바로 수납을 할 수 있었다. 영수증은 푸른색이었다. 의사가 입었던 줄무늬 셔츠와 비슷한 종류의 푸른색이었다. 바다나 하늘을 표현할 때 많이 사용되는 푸른색 말이다. 접수증도 푸른색이었는데 비취와 비슷하지만 더 우울하고 물 먹은 색이었다.


어려운 일이지만, 무뎌지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요. 때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쉬어야 해요.


의사의 조언은 어려웠다.

나는 무딘 칼날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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