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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화일 Oct 18. 2023

귀한 곳에 누추한 제가

05. 택시 타고 페즈 체크인

갑자기 차를 세운 기사는 여기서 내리라더니 옆의 차로 갈아타라고 했다.

그리고 무슨 계약서에 싸인을 하라고 내밀었는데 아랍어도 프랑스어도 모르는 까막눈은 그저 심장이 떨릴 뿐이고.



다행히 수메르인들의 축복으로 단어를 어림짐작해 보니 대충 출발일, 도착일 따위가 적혀 있는 듯했다. 마지막엔 TOUR 회사의 도장이 찍혀 있으니 싸인을 하라는 게 그냥 네 이름을 적으라는 얘기였던 듯.

물론 물어 확인해 볼 수는 없었다. 기사는 영어를 전혀 못했고 우리가 그나마 할 줄 아는 외국어는 영어였으니. 런던으로 돌아가자마자 프랑스어를 배워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마도 페즈에서 셰프샤우엔까지 기사를 보낼 수는 없고(물론 요금은 왕복을 받았지만) 페즈로 갈 일이 있거나 페즈에 사는 기사 중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을 연결해 주는 식이다 보니 이런 경우가 발생한 게 아닌가 싶다.


새 기사는 굉장히 난폭운전을 하긴 했지만 무척 친절했다.


가는 길에 휴게소에도 잠시 들렀는데 우리처럼 꼬질한 채로 봉고 택시를 타고 도시를 이동하는 외국인들이 간간히 보였다.



간이 식당에 기사들이 하나씩 들고 있는 빵이 보여 우리도 하나 주문했다.

웨이터에게 빵 이름을 물어보니 빵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답답한 마음에 옆에 있던 우리 기사에게 빵 이름을 물어보니 또 빵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영어로 물어도 빵

스페인어로 물어봐도 빵


겉은 맛동산 맛에 안에는 후렌치파이의 잼 같은 게 있어서 혀가 졸아드는 것처럼 달달한 빵이었다.


다시 이어지는 여정


도로 위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보내기는 했지만 중간 중간 깨는 사이에도 경찰이 자주 보였다. 땡볕 아래서 속도계를 들고 있는 사람도 간간히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기사가 약삭빠르게 속도를 줄였다.

은근히 오르막 내리막이 잦았고 뻗은 길만 보면 고속도로 같은데 2차선이 겨우 아슬한 너비였다. 그 좁은 도로에서 전방이 내려다 보일 때마다 추월을 시도하던 우리 차.


기사님 성격이 급한 게 롤러코스터 같은 봉고의 승차감으로 느껴졌다. 한국인으로서 스릴과 속시원함이 동시에 드는 순간.


황무지 같은 고속도로를 약 네 시간 달려 도착한 페즈의 첫인상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봉고 밖 창문으로 도시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예전에 가로세로 낱말풀이를 하다 머리를 싸매게 했던 동음이의어들이 떠올랐다.

Chaos, pandemonium, riot, uproar, rampage.


페즈에서는 셰프샤우엔에서 우리가 묵으려고 했던 바로 그 호텔 체인에 묵는다(이번엔 정말로).


짐을 들어준다며 숙소 바깥까지 호텔 매니저가 나와 주었는데 정신 없는 페즈의 바깥 상황과 반대로 나긋하고 서두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간드러지는 영어 발음에 어학원에서 만난 사우디아라비아 친구가 생각났다.



모로코에서 처음으로 묵는 호텔에 거지꼴로 입성했다.

호텔 안은 그저 으리으리. 전날 제대로 준비도 안된 단칸방에서 셋이 자고 나니 로비가 한층 더 호화로워보였다.


매니저가 웰컴티라며 모로칸 민트 티를 따라주는데 주전자를 든 팔이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그런데 모로코 어딜 가든 다들 이렇게 따르고 있었다. 곁들여 준 빵도 너무 맛있고.

역시 빵 맛집 모로코.



우리 방은 테라스 바로 밑, 제일 윗방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었지만 아주 다행스럽게도 종업원들이 짐을 올려다 주었다.

침대마다 얼룩무늬 이불이 있어 독특한 컨셉에 웃음이 나왔다. 어찌 됐든 무려 샤워가 가능한 깨끗한 방이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테라스가 가까운 게 아주 좋았는데 방을 나와 계단 하나만 오르면 페즈의 전경이 보였다. 건너편 옥상에는 히잡을 두르고 빨래를 널고 있는 여성과 헬멧을 쓴 아이가 있었다. 장난감총으로 혼자 장난치던 아이랑 눈 마주쳐서 인사하다 내친 김에 매트릭스까지 해 주고 내려왔다.



저 멀리 사막이 보이는 믿기지 않은 풍경. 내일이면 갈 곳이라는 생각에 속절없이 설레왔다.


택시에서 오래 잤어도 피곤했다. 4시간 동안 놀이기구를 탄 기분.

그래도 먹어야지.

먹어야 살지.


더 늦기 전에 나가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터넷을 제대로 못 쓰고 있는 상태였는데 Voxi에서 로밍만 신청해 왔다가 탕헤르에서 터지지 않아 취소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페즈에서 낮에 유심 가게를 보는대로 사야겠다 하고 있었는데 숙소를 나서자마자 옆에 보인 환한 오렌지 간판.


밤 9시에도 영업하는 Orange, 감사합니다.

나중에 뒤늦게 온 문자들을 확인해보니 탕헤르가 스페인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보니 GPS가 위치를 스페인 영토로 인식해서 로밍이 불가능했던 것 같았다.



도시 전체가 평화롭고 그나마 붐비는 사람들이라 해 봤자 카메라를 든 유럽 관광객들이었던 셰프샤우엔과 달리 무질서가 질서인 페즈.


길거리에 화려한 모스크가 갑자기 튀어나오고 사방이 어수선하다. 다 같이 택시를 기다리는 로터리에서는 새치기는 기본이고 바가지는 덤이었다.

고작 10분이나 될까 짧게 서 있는 시간 동안 택시와 현지인의 싸움을 목격했고 당당한 새치기를 당했으며 험악한 인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거친 목소리로 택시 탈 때 얼마 이상 달라 하면 안된다고 하라는 친절한(?) 아저씨의 충고까지 받았다.



마침내 한 무리 여성 분들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택시를 잡아 타고 마트로 출발.

우리가 타자마자 기본 요금 2.1 디르함을 6 디르함으로 올려 미터기를 켠 택시 기사… 부디 큰 부자 되시길 바랍니다.


앞에서 페즈 오는 길에 운전이 거칠었다고 적었던 것 같다. 기사님께 실례다. 심심한 사과를. 이제 보니 그보다 젠틀한 운전은 없었다.

범퍼카처럼 운전하는 택시를 탄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러다 제때 세워달라 하지도 못하는 건 둘째치고 당장 도로 위에서 죽을 것 같아 몰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일단 세워달라고 거의 소리를 질렀다. 거스름돈이고 자시고 돈을 던지다시피하고 튀어나오니 그 앞에 기다리는 것은 4차선 무단횡단.


드넓은 도로를 차들은 사정없이 달리고 있고. 주위에는 횡단보도 하나 보이지 않고.

그런데 사람들은 건너고 있고(?)

설마 정말로 여기를 그냥 건너겠어 하는 중에도 몇몇 사람들이 빠르게 도로를 스쳐 건너가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소리를 지르며 도로를 냅다 뛰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들어온 몰은 페즈도 런던도 아닌, 무려 한국이었다.

탕헤르 공항에서도 본 적 없었던 이 현대적인 디자인과 깔끔함. 아프리카에서 찾은 고향의 분위기에 신이 났다. 이참에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마트 구경까지.



아르간오일뿐 아니라 대추도 유명한 모로코.

마트에 대추 제품이 아주 많다. 여기저기에 대문짝만하게 Date라고 써 두었는데 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의미를 다시 찾았다. 손발이 너무 부지런해서 머리가 일을 안 하는 케이스.


마트 중간에 노란 게 눈처럼 쌓여 있었는데 뭔가 해서 가까이 갔더니 파스타면이었다.

땅콩 삽 같은 것으로 퍼 담는 파스타면. 저렇게 퍼 담아간 면으로 만든 파스타는 왠지 더 맛있을 것 같은 느낌.

파스타면 너머 귀퉁이에는 색색깔 향신료 통들이 기와집 뒷마당에 나란한 장독대처럼 서 있었다. 번지르르한 타일이 박힌 마트에서 현지와 전통의 특색이 보이는 나무통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 신기했다.



정신차리고 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는데 다행히 마트 안에 문 연 가게들이 몇 있었다.

한국보다도 더 늦게 일하는 모로코, 감사합니다.


드디어 숙소에 돌아와 먹은 저녁 식사는 타코 가게에서 팔았던 치킨 버거. 아는 맛이라 좋았고 같이 준 매운 소스가 취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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