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아니길 바라며 검색해 보니 페즈에는 정말로 가죽 염색 공장이 두 개였다. 심지어 우리가 간 곳은 지역 소개가 attraction으로 표기되어 있었고 진짜 공장은 다른 하나.
어쩐지 작더라니.
어쩐지 냄새가 안 심하더라니.
피곤해 정신을 놓을 것 같은데. 서로 눈치게임하는 시간. 우리 중 한 명은 눈에서 ‘안 갈 거라고 말해’ 빔을 쏘고 있었다. 하지만 페즈를 우리가 다시 올 일이 있을까요?
어느 새 셋 다 주섬주섬 나가 택시를 잡고 있었다.
“가볍게, 가볍게만 보고 가자.”
“SNS에서 사람들 하는 것처럼 공장 위 걷기 그런 거 하지 말자.”
택시 기사가 공장이라고 세워 준 곳은 확실히 우리가 갔던 곳과 달랐다. 기사가 여기서부터 직진만 하면 된다길래 무슨 설명이 그래 했는데 굳이 방향을 말해 줄 필요도 없었다. 냄새를 잘 못 맡는 나마저도 음, 저쪽이 공장이네 할 정도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가죽 냄새가 코를 찔렀고 메디나 성벽 바깥에서부터 길 안내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안내꾼이 나눠준 박하로 코를 틀어막고 진짜 공장으로 입장.
“우리 왜 이러고 있지?”
분명 피곤에 찌들어 위에서 가볍게만 보고 돌아가자고 했던 것 같은데…
작은 공장에서보다 훨씬 친절한 안내꾼을 만났다. 흰 건 암모니아라 탈색을 시키는 것이고 비둘기 배설물이 연화제 역할을 한다는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홀린 듯 따라가던 중이었는데 어느 틈에 공장 위를 걷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을 다시금 귀로 확인하니 정말 빠질까봐 두렵다. 코어 근육을 미리 길러 놓을 것을.
암모니아로 가득 찬 통들 사이를 어설프게 뛰어넘으며 겨우 겨우 안전한 테라스로 진입했다.
확실히 이전에 봤던 풍경보다 훨씬 컸다. 하지만 뭔가 아쉬움. 안내꾼에게 다른 방향 테라스로 가고 싶다 하니 가게 번호 10번으로 가야 한다며 자세히 말해주었다. 안내꾼에게 얼마를 드리면 좋겠냐 먼저 물어보니 주고 싶은만큼만 달라고 했다.
서로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안내꾼이 알려준 10번으로 가니 그 건물 가죽 가게를 지키던 할아버지가 이번엔 새로운 가이드를 자청했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 그림 속 그 풍경.
할아버지가 가죽 제품을 강매할 것 같아 조금 꺼려졌는데 여기가 모로코에서 가장 큰 가죽 공장이라며 무척 열심히 설명을 해 주셨다. 우리가 가죽을 살 생각이 없다 하니 무척 아쉬워하시긴 했지만 가게가 문을 닫기 직전인데도 사진 찍는 것도 다 기다려 주셨던 분.
내려가는대로 팁을 드려야겠다 생각하고 1층에서 할아버지가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젊은 남자가 나타나 할아버지에게 팁을 줘야 한다며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돈을 주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니 곧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팁을 드리니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너무 기뻐하셔서 우리가 민망할 정도였다.
페즈의 메디나는 염색 공장이 있는 중심부로 갈수록 지형이 낮아지는 콜로세움 형태다. 그 말인즉슨 내려갈 때는 쉬웠지만 다시 올라가는 길은 그저 웃음만 나온다는 얘기. 페즈에서의 일정을 정말로 완수했으니 이제는 늦기 전에 숙소에 도착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아주 조용히 걷기만 했다.
가는 길에 골목에서 만난 아이들이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신나게 인사를 해 댔다. 아이들 중 하나가 자기 티셔츠에 이름을 써 달라길래 우리는 한 사람씩 SON, HEUNG, MIN이라고 써 줬다. 미안합니다, 손흥민 선수. 하지만 아이가 축구복을 입고 있었어요.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러 부랴부랴 야간 버스를 타러 왔다.
전날 세 명이 달려들어 고군분투한 후에야 예매에 성공했던 야간 버스는 한번 결제를 실패하면 20분간 차단되어 버리지만 결제만 누르면 에러가 뜨는 극악의 시스템이었다. 우리처럼 결제에 난항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지 좌석들이 계속해서 떴다 사라졌다. 콘서트 티켓팅이 따로 없다.
(물론 이번 임영웅 콘 티켓팅도 실패했다. 엄마. 그렇게 됐슈.)
셋이서 번갈아 결제 버튼을 연타하다 얼떨결에 두 번 성공되어 급하게 취소를 했지만 취소 수수료를 20% 떼이고 말았다. 이 사이트, 일부러 이렇게 만든 거 아닌지.
이런 쓰라린 기억을 안고 온 정류장이었지만 이 곳에서 보이는 기차역과 그 너머 노을진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다. 급하게 오는 바람에 마음껏 감상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이제 마음 편히 버스에 몸을 싣고 메르주가로 달리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버스에 타니 예매 좌석 번호와 실제 좌석 번호 위치가 다르다. 정말이지 그냥 넘어가는 순간이 한 순간도 없다.
의외로 상태가 매우 좋은 버스.
이제 이 버스를 타고 9시간을 달려 사막으로 향한다.
신나!
중간 휴게소에서 잠시 깼는데 건물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겁해서 나가봤더니 사람들이 기웃기웃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자욱한 연기를 뚫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버스 창 밖 풍경이 조금씩 변해갔다.
별로 안 잔 것 같은데 벌써 동이 트기 시작했다. 별도 보고 바깥 구경도 좀 할 걸 그랬는데 차만 타면 잠들어 버린다.
차츰 드러나는 황량한 들판.
야간 버스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처음이다. 유레일패스를 가지고 여행했을 때도 야간 열차는 안 탔는데 야간 버스를 타게 되다니.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정류장에 내리면 숙소에서 픽업 차가 나오기로 했다.
바깥 풍경이 광활해질수록 여기서 길 잃으면 쉽지 않을 것 같다. 잘 내린 것 맞겠지. 방금 전 일출을 본 것 같은데 짐을 챙겨 내렸을 땐 벌써 하늘이 파랬다.
메르주가는 건물부터 사구를 닮아 있다. 네모 반듯한 건물들이 레고 블럭 같았다.
우리를 아라비아 리조트 같은 곳에 내려다 주곤 바로 쿨하게 떠나버린 픽업 기사.
숙소는 한국인들에게 핫산네로 잘 알려진 곳이었는데 핫산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워낙 흔해 이 핫산이 저 핫산과 다르고 저 핫산은 이 핫산과 다른데다 핫산네는 우리가 편하려고 부르는 이름일 뿐 실제 숙소 이름은 달라 간혹 잘못 찾아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선생님 여기가 우리 숙소가 아니면 어떡하나요, 붙잡고 싶었지만 다행히 잘 찾아왔다.
구글맵의 숙소 이름과 간판의 숙소 이름을 몇 번 확인했는지.
여기서 오후까지 잠시 쉬었다 4시에 다시 사막으로 출발한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으로 소화했나 싶은 일정.
대기실에서 잠시 쉬고 있으니 막 일어난 듯한 핫산네들이 잠에서 덜 깬 상태로 맞아주었다.
혹시 여기서 아침을 먹을 수 있냐 물었더니 저기 차려져 있는데 당연한 걸 왜 묻지? 하는 표정. 체크인하자마자 밥을 주다니.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버스에서 8시간을 구겨 자고 난 후의 꿀 같은 아침 식사. 전병 같은 모로코 빵이 너무 맛있었다. 크림치즈와 딸기잼을 같이 발라 쫀득하게 한 조각을 뜯고 나면 천국의 문 세 번쯤 두드리고 온 기분.
탄수화물을 충전하니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사막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쉴 방을 배정받아 들어갔는데 고작 쉬다 갈 방으로 너무 좋은 방을 줘서 놀랐다. 뚱해 있다 잠에서 깰수록 활달해지는 핫산네들도 너무 웃겼다.
세탁실의 아기 고양이들과 잠시 놀다가 테라스로 나오니 비현실 같은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현실 같지 않아서 그림 같았던 사막의 풍경.
내가 윈도우 배경화면을 보고 있는건지 영화 세트장을 보고 있는건지.
명암이 갈라지는 고운 모래가 꼭 그래픽 같았다. 처음 마주한 사막의 풍경은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소품 하나 하나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찾을 수 있는 디자인이겠지만 이들이 붉은 모래색 벽과 사막을 마주하고 있으니 물건 고유의 분위기가 배가 된다.
별 것 아닌 가구 하나도 눈에 세세하게 들어와 넋을 놓고 있다 이러다 마을 구경을 놓치게 될까봐 우선 밖으로 나왔다.
모래바닥이 콘크리트가 섞인 것처럼 검어 단단해 보였는데 걸어 보면 부드럽게 밟혔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콘크리트 바닥이 옆으로 밀려나는 것 같아 가상 세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래 위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도 보였다.
메르주가 마을의 문 색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메로나 색이다.
모래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차가운 초록빛이 의외로 무척이나 찰떡이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사람들이 아주 드문드문 보였다.
창틀을 보수하는 아저씨가 있었고 보호자 손에 이끌려 학교에 가는 아이도 있었고.
다만 누나로 보이는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있어 씁쓸했다. 아직도 모로코에서는 시골에 사는 여자 아이들 중 6%만이 학교에 등록한다.
히잡을 쓴 여성의 눈을 여기 저기서 광고 메시지로 많이 쓰고 있었다.
호텔 간판뿐 아니라 자석, 엽서 등에도 보였는데 억압의 상징이 오히려 지역의 홍보 이미지로 쓰인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나같이 반듯한 건물도 그 뒤로 보이는 사막도 어디 게임 속 풍경 같아서인지 실제 집이 아니라 영화 촬영장에 견학 온 느낌이 자꾸 들었다.
어디선가 지미집이 나타나고 누군가 자, 이제 현실로 돌아가세요 외칠 것 같다.
이런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살까 토론했는데 짧은 지식으로는 관광업 말고 특별히 떠올릴 수 있는 게 없었다.
감상에 젖었어도 한국인이기에 밥심이 필요하다.
사막으로 떠나기 전에 먹을 점심을 미리 사러 갔던 장난감 같은 가게.
주인 아저씨가 여기서는 와이파이가 된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손님이 적어주고 간 것으로 보이는 귀여운 한국어 메뉴판도 있었던 곳.
포장해 온 샌드위치는 한참 뒤에야 먹었지만 너무 맛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감자튀김까지 서비스로 들어 있었는데 눅눅해진 상태에서도 너무 맛있어서 더 아쉬운 기분. 런던에 살면서 한없이 높아져 있던 감자튀김 기준을 눌러 버렸다. 가게에서 먹었다면 나도 공익을 위해 메뉴판을 흔쾌히 번역해 드리고 싶을 것 같았다.
초코우유 맛집 모로코.
밍밍한 제티 맛을 기대했다가 혀 끝을 감도는 진한 맛에 깜짝 놀랐다.
몇 번이나 눈에 발라도 아쉬운 풍경이지만 저 안으로 직접 들어갈 몇 시간 후를 기약하며 체력을 충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