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회장이 되려는 자!
[17년 전, 봄 – 어느 작은 도시의 초등학교 등굣길]
성찬은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났다.
새 교복 위에 가지런히 손수건을 달고, 왼쪽 가슴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이성찬 / 1학년’
“삼촌, 다녀오겠습니다.”
현관문을 닫는 순간, 바람에 벚꽃이 후드득 날렸다.
햇살은 수채화처럼 따뜻했고, 하늘은 연보라였다.
성찬은 오늘도 그 형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형. 초6 강시후.
몇 번이나 아침에 마주쳐서 인사도 했고, 사과도 줬던 형.
처음으로 자기를 ‘귀엽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오늘은 말도 걸어봐야지.’
사과를 조심스레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손바닥만 한 빨간 사과.
닦고 또 닦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 안녕?”
저 멀리서 교문으로 향하던 시후가 성찬을 발견했다.
지각생이지만 태양처럼 여유롭고, 늘 웃는 얼굴이었다.
성찬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앞으로 내밀었다.
“형, 이거요…”
“…사과?”
“네. 어제 엄마, 아니… 저희 집에 사과가 들어왔어요. 그래서…”
“우와, 고마워. 진짜 잘 먹을게!”
강시후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그 순간, 성찬은 마음속에 작고 따뜻한 무언가가 움튼 것을 느꼈다.
‘나도… 이 형처럼 웃고 싶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형이 우리 형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밤, 삼촌의 호출]
잠자리에 누운 성찬은, 창문 너머의 별을 바라보며 시후 형을 떠올렸다.
그러다 옆방에서 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찬아, 안 자면 이리 와보거라.”
성찬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이태석, 그의 삼촌.
STAR그룹 지역지사 중역으로 일하던 삼촌은, 임시 근무를 마치고 본사 복귀 명령을 받은 참이었다.
“내일 당장 서울로 간다. 짐은 오늘 싸놓거라.”
“…내일이요?”
“그래. 학교는 전학 절차 밟아놨다.”
말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성찬은 당황했고, 벚꽃 핀 등굣길에서 다시 시후 형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인사는… 하고 가도 되나요?”
이태석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감정 낭비 말거라. 넌 특별한 아이야. 그런 따뜻함은 약점이 된다.”
성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드렸다.
그리고 밤새 악몽을 꿨다.
시후 형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삼촌의 말대로, 약한 아이는 도태되는 꿈.
[현재 – 성찬의 독백]
“그래서… 난 형을 미워하기로 했어요.”
커피를 내려 마시던 성찬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야 잊는 게 쉬우니까요.”
[3일 전 – 새벽 2시, STAR그룹 지하 3층 비인가 실험실]
※ 이 장면은 5장에서 정하윤과 강시후가 ‘세 번째 캡슐’을 열람하기 3일 전.
성찬이 그 캡슐을 시스템에 주입하던 시점이다.
지하 3층.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어두운 복도 끝, '비인가 실험실'이라는 표식이 희미하게 빛났다.
문은 내부에서 잠긴 상태였다. 내부 조명 하나 없이, 어둠 속에 딱 하나의 빛만이 존재했다.
타임캡슐 본체. 정면에 서 있는 작은 남자, 성찬.
그의 눈에는 미묘한 떨림이 깃들어 있었다.
“초기화 완료… 인증 계정 삽입.”
성찬은 태블릿을 기계와 연결하고 관리자 모드로 진입했다.
이 기계는 상무 이태석이 쓰던 기체 중 하나였고, 일반적인 직원은 접근조차 불가능한 보안 등급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삼촌인 이태석이 만든 임시 루트 계정, 그리고 자신이 ‘몰래 만들어둔’ 비인가 백도어 인증키.
그는 익숙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3rd Capsule: 인증번호 Ω-3 / 사용 키: S.CHAN / 메시지 삽입 시작.”
기계가 낮은 소리로 진동하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성찬은 가만히 서서, 메시지를 하나하나 입력했다.
“이 캡슐을 연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과거를 바꿀 자격이 있는가?”
그는 입력을 멈추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파일 세 개를 첨부했다.
2025년 AI상담센터 내부 보고서 (삭제된 파일 복구본)
2026년 STAR그룹 이사회 회의록 발췌
2021년 정지윤 실종 사건의 ‘비인가 수사자료’
“...이건 단서이자 경고야. 그리고 선택지.”
성찬은 타임캡슐의 전송 예약을 설정했다.
‘정하윤, 강시후 — 두 명에게만 열람 권한 허용’ 이라고 명시하며.
“형…”
그는 작게 중얼였다.
“그때 넌 내 사과를 받아줬지.
그런데 이젠… 이 캡슐을 열고, 날 시험해야 해.”
잠시 멈춘 성찬은 기계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손끝에는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결심에서 오는 긴장감.
“시작하자.
이건 단순한 타임캡슐이 아니라, 내 첫 번째 ‘선전포고’니까.”
성찬은 마지막 확인을 누르고, 조용히 뒷걸음질쳤다.
타임캡슐이 천천히 삽입되고, 금속 커버가 덮였다. 그 순간—
작은 화면 위에 숫자 하나가 점멸했다.
[D-3 / 수신 예정자: 강시후, 정하윤]
어둠 속에서 성찬의 눈빛은, 기묘하게 차가웠다.
그리고 동시에… 어딘가 쓸쓸했다.
[2일 전 – 오전 9시, STAR그룹 상무실]
“성찬이 들어옵니다.”
조용한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이태석 상무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날카롭고, 차분했다.
“들어와. 앉아.”
성찬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소파에 앉았다.
자기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성찬의 시스템 접근 기록이 인쇄되어 있었다.
이태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젯밤. 루트 경로에 접근한 기록이 있더군.
관리자 키는 내 이름으로 발급돼 있었어.”
“…네.”
성찬은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AI상담센터 통계 테스트 중, 예전 시스템 패치 경로를 우회한 것 같습니다.
백업 로그를 확인하려다 실수로 루트 권한까지 진입했어요. 경고 창이 떴지만... 늦었죠.”
이태석의 눈매가 좁아졌다.
“네가 실수할 녀석은 아니잖아.”
“….”
“혹시 누가 시켰나?”
“아닙니다.”
이태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의 도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시스템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넌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래서... 더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시스템을 무너뜨리려는 자가 있다면, 그 앞에 먼저 서야 하니까요.”
이태석이 돌아섰다.
“…뭐?”
성찬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담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삼촌. 이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찬.”
“저는 절대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제가 움직인 이유는 오로지, STAR그룹의 안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이태석은 성찬을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는 약간의 의심, 그리고 동시에 흐릿한 자부심 같은 게 섞여 있었다.
“…너, 이 판을 너무 빨리 올라타는 거 아니냐?”
성찬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누군가는 먼저 시작해야 하잖아요.
그게 저라면—괜찮습니다.”
이태석은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좋아. 한 번만 더 내 이름을 건 권한을 쓰면, 나는 ‘삼촌’이 아닌 ‘상무’로 널 엄격하게 대하겠다.”
“…명심하겠습니다.”
성찬은 자리를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이태석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눈빛… 뭔가 숨기고 있군. 하지만 지금은, 이용할 수 있을 만큼만 믿어보자.’
성찬이 문을 닫고 나가자, 사무실엔 다시 고요가 흘렀다.
[2일 전 – 오후 11시, STAR그룹 연구개발 백업 서버실]
성찬은 어두운 서버실 내부에 홀로 앉아 있었다.
복도 조명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오직 그가 마주한 모니터만이 푸른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정지윤이라는 이름을 입력한 뒤, 검색 범위를 넓혔다.
검색 조건: 사용자 로그 / 4년 전 / 수신 실패 / 삭제 취소 로그 포함
"……."
결과는 없었다.
공식 서버에서는 이미 그녀의 흔적이 완벽히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성찬은 알고 있었다.
‘지워졌다는 건,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는 키보드를 두드려, 회사의 폐기된 백업 서버 목록에 접근했다.
이 목록은 상무조차 모르는 사내 보안 사고 조사용 로그 서버였다.
성찬은 타자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서버 주소를 직접 입력해, 그가 숨겨놓은 경로로 진입했다.
경로: /OBSOLETE_ARCHIVE/SC_LAB/CAPTURE_BACKLOG/
파일명: USER_JIYOON.J_TIME-CAPSULE_SEQ034.MKX
“…찾았어.”
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흔들렸다.
화면엔 4년 전, 정지윤이 마지막으로 접속한 기록이 떴다.
그녀가 보냈던 타임캡슐. 그러나 보내진 시간이 이상했다.
발송 시각: 4년 전 오전 10시 14분
도착 설정: 10년 후, 2034년 10월 14일
현재 상태: 대기 중 (Pending)
"아직 살아 있을까..."
성찬은 천천히 화면을 스크롤하며, 그녀가 남긴 메시지의 제목을 읽었다.
[제목: 누군가 이 메시지를 본다면, 부탁이 있어요.]
그는 클릭하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열 자격이 없어. 아직.”
그의 손이 마우스에서 떨어졌다.
[내면 독백]
시후 형은 순수했다. 그래서 따뜻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사람을 가장 먼저 삼켜버린다.
하윤 선배는 현실적이었다. 금수저의 여유 속에서도 정의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끌어들이고 싶었던 거다.
그 둘이 함께라면, 어쩌면 내가 풀 수 없는 방식으로 사건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찬은 스스로를 믿고 있었다.
내가 이 판을 만들었고,
내가 최종 승자가 될 거란 걸.
[모니터 꺼짐]
그는 파일을 그대로 두고 로그아웃했다.
지금은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현재 시각 – 밤 11시 40분 / STAR그룹 기밀 시스템 보안서버]
기계의 낮은 팬 소음이 규칙적으로 공간을 진동시켰다.
성찬은 캄캄한 서버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모니터 앞에는 단 하나의 타임캡슐 로그 파일이 열려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만 미세하게 빛이 깜빡였다.
[LOG_ACCESS]
사용자: S.CHAN
권한: 관리자 우회 키 사용
대상 로그: RECORD_DELTA_10Y
수정 대상: 2021년 5월 18일 캡슐 메시지
수신자: 정지윤
메시지 상태: 변조됨
성찬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창을 하나 더 열었다. 창에는 자신이 이전에 삽입해둔 ‘특수 응답 트리거’ 코드가 떠 있었다. 그 코드는 정지윤이 향후 캡슐을 열게 될 경우 자동 응답을 생성하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걸로 마지막 조율은 끝났어.”
사실, 이 조작은 이태석 상무조차 알지 못하는 계획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누군가의 그림자도, 감시 카메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찬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 판을 먼저 짜놓았고,
이제 그는 그 위에 새로운 룰을 얹는 중이었다.
[이틀 전 – 회장 서재 / 해외 전화통화 녹취 중]
“회장님, 최근에 캡슐 시스템의 인증 로그에서 약간의 이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비서가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회장은 손끝으로 태블릿 화면을 넘기며 눈썹을 찌푸렸다.
“인증 로그?”
“네. 사용자는 성찬. 상무 이태석의 조카입니다. 문제는 그가 루트 권한을 일시적으로 소유한 기록이 있다는 점입니다.”
회장은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오래전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17년 전, 짧은 시간 함께 있었던 아이.
지나가듯 “형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 수줍은 눈동자.
“…그 아이가 이 시스템을 이해할 정도로 자랐다?”
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회장은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입가를 일직선으로 다물었다.
“시스템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담는 그릇일 뿐이지. 그리고 사람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어.”
[다시, 서버실 – 성찬]
파일을 닫은 성찬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손으로 ‘과거의 기록 하나’를 바꾼다는 건, 단지 정보 조작이 아니었다.
그건 ‘운명’에 개입하는 일이었다.
그는 웃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중얼거렸다.
“시후 형, 정하윤 선배… 당신들이 진심이라면, 이 판에서 살아남아 봐요.”
그러고는 마지막 명령어를 입력했다.
[타임캡슐 회신 타이머: 72시간 후 자동 실행]
[화면 전환 – 강시후 & 정하윤 / 사무실 복도]
그 시각, 둘은 야근을 마치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문득, 강시후의 스마트폰에 알림 하나가 도착했다.
[타임캡슐 회신 예고 알림 – 72시간 후, 새로운 응답이 도착합니다.]
시후는 멈춰 섰다.
“하윤아… 세 번째 캡슐, 아직 끝난 게 아니었나 봐.”
정하윤이 그의 어깨 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다음은, 진짜 시작일지도 모르겠네.”
둘의 발걸음이 다시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임캡슐에 숨겨진 조작의 흔적이 공개된다.
그리고 강시후는 뜻밖의 인물에게서 과거의 진실을 뒤엎는 메시지를 받게 되는데…
과연, 그가 ‘진짜 승자’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