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두 번째 타임캡슐, 그리고 상무의 호출

자작극은 이미 시작됐다

by Song 블루오리온


#1 – 자작극은 이미 시작됐다


STAR그룹 AI상담센터 17층. 조용한 새벽.

업무용 메일함에 올라온 메시지 한 통이 전 사내에 퍼졌다.


[공지]

제2차 타임캡슐 이벤트, 당첨자 발표


이름: 유성찬 (STAR AI상담센터 인턴)

주소: 서울시 강서구 마곡동


메일 수신시간: 06:17 AM


사내 메신저에는 조용한 파장이 일기 시작했다.


“헐, 이번엔 우리 팀 인턴이 당첨이래.”

“이거 진짜 무작위 추첨 맞아?”

“와... 상무 조카라던데, 우연치고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그 시각, 당첨자 본인은 책상에 앉아 묵묵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성찬.

상무 이태석의 조카이자,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복잡한 계획을 실행 중인 인물.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책상 서랍에서 얇은 USB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타임캡슐 인증 시스템에 연결했다.


"제어 코드 삽입 완료. 타임스탬프... 가속 설정."


그가 기계 안에 집어넣을 메시지는 이미 준비된 상태였다.


〈To. 미래의 나에게〉

“너는 절대 이태석이 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2025년 3월 15일, 유성찬


“10년 후로 설정된 메시지… 수신일자를 5일 전으로 끌어온다.”



그의 손끝은 놀라울 만큼 침착했고, 눈빛은 차갑게 고요했다.

이건 단순한 자작극이 아니었다. 실험이었다.

상무 이태석조차 모르게, 새로운 시간질서를 조작하기 위한 사전 예행연습.


유성찬은 모니터 속 메시지 수신 예정을 확인하고, 조용히 웃었다.


“됐어. 이제… 두 번째 파동이 시작된다.”





#2 – 상무의 혼란, 그리고 강시후 호출


몇 시간 뒤, 이태석 상무의 집무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메일함을 확인하다가, 유성찬의 이름을 보는 순간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유성찬?”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첫 번째 타임캡슐의 조작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

그것은 단지 강시후를 흔들고, 회장의 기술력에 미세한 균열을 던지기 위한 ‘불씨’였을 뿐.


하지만 두 번째 캡슐은… 계획에 없었다.


“유성찬, 그 녀석이… 왜?”


곧바로 보안관리팀을 호출했다.


“AI상담센터 이벤트 로그 분석 결과 중, 오늘 새벽 유성찬 인턴의 기록이 있는지 찾아봐.”


“네, 상무님. 20분 내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이태석은 의자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그 녀석이…


“…내 계획을 넘보려는 건가?”


그날 오후.


좌천되어 수시통계파트로 이동된 강시후가 상무실로 호출되었다.


"들어오세요."


묘하게 부드러운 어투였다.


이태석 상무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시후 씨, 오랜만이네요. 요즘은… 잠 좀 잘 잡니까?”


강시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덕분에요.”


“앉죠.”


상무는 직접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사실 오늘은, 업무적으로 궁금한 게 좀 있어서 불렀습니다. 두 번째 타임캡슐 사건… 알죠?”


“네. 인턴 유성찬 씨가 당첨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스템 로그 상에서… 몇 가지 데이터가 잘 안 맞더군요.”


강시후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떤 부분이요?”


“시후 씨도 시스템에 관여했던 사람이라, 내심 의견이 궁금해서요. 당첨자 리스트는 외부 난수 추출 알고리즘으로 정해지는데...”


“…내부 접속 기록이 있던가요?”


상무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있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렇겠네요.”


강시후는 담담하게 답했다.

하지만 속으론 확신하고 있었다.


‘상무도 당황했군. 이건 그의 통제를 벗어난 일이다.’


그는 단지 한 마디 덧붙였다.


“다만, 상무님. 시스템이 조작됐다면… 그건 내부 인가자가 아니면 불가능하겠죠?”


상무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강시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시후 씨의 의견이 궁금한 겁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입니다.”


“…뭔가요?”


“그날 새벽, 저는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상무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강시후 역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3 – 강시후의 이중 플레이

상무실에서 나오는 길.

강시후는 조용히 회의실 벽면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넥타이는 삐뚤어져 있었고, 셔츠의 주름은 하루의 피로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의심하는 건 나 하나뿐이 아닐 텐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는, 층 버튼 대신 지하 데이터 백업실 버튼을 눌렀다.

이곳은 본래 보안 권한이 높은 관리자만 접근할 수 있는 공간.

하지만 아직까지도 일부 서브권한이 그의 ID에 남아 있었다.


그는 데이터 복구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공식 시스템에서는 삭제된 로그였지만, 백업 서버에는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 로그 - 시스템에 접속하고 사용했던 기록이다. 시스템은 자동적으로 로그를 남기게 되어 있다. )


“10억 원 입금 내역… 캡슐 경고 메시지… 그리고 From the Future…”


스크린 위에 파편처럼 남은 데이터 로그들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상무가 나를 희생양 삼으려는 이유는 알겠다. 하지만 그 조카까지 끼어들었다는 건…’


강시후는 문득, 1시간 전 상무실에서의 미묘한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확실히 놀라고 있었다. 조카가 자작극을 벌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


그렇다면 이건…

상무와 조카, 둘 다 각각의 의도를 갖고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뜻이다.


강시후는 조용히 노트북을 닫았다.


"좋아… 이 틈을 내가 이용하지."


회장과 상무,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조카.

이 모든 퍼즐의 틈 사이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각자의 의심을 부추기는 것뿐이었다.


‘상무에게는 내가 조카를 의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줘야 해. 동시에 조카에게는 내가 상무의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다고 보여줘야 하지.’


그리고 이 모든 정보는…


‘정하윤에게도 공유해줘야 해. 이제,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는 휴대폰을 꺼내 정하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문자 발신 – 강시후]


확인해야 할 게 있어. 퇴근 후 옥상. 7시.





#4 – 조카의 실험

유성찬은 타임캡슐 머신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낡은 노트북을 들고, 메시지를 조작하고 있었다.


[발신 설정 – 2035년 3월 15일]

[수신 설정 – 2025년 3월 15일 / 10:45 AM]

[메시지: “이태석은 실패할 것이다. 미래는 내가 가져간다.”]

[인증 이름: 유성찬 / 권한 ID: 루트_임시계정]


그는 입력된 메시지를 재차 확인했다.


“이번엔 완벽하게 작동해야 해.”


이 실험의 핵심은, ‘시점의 조작’이었다.

보통 타임캡슐은 10년 뒤로 고정된 시스템.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개발자 도구’를 활용하면, 날짜와 인증 시간을 세밀하게 조작할 수 있다.


‘삼촌은 그걸 단 한 번, 나에게만 위임했지. 물론 잠깐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유성찬은 모든 매뉴얼과 코드 해설을 복사해 뒀다.

그리고 오늘, 자신의 손으로 실험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게 성공하면… 나는 단순한 조카가 아니게 되는 거야.”


그의 눈빛엔 이전과는 다른 열기가 맺혀 있었다.


자신이 상무보다 더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는 증명을 하고 싶었다.

더 정확히는, ‘상무를 능가하는 존재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실험하고 싶었다.


모든 설정을 마친 유성찬은 캡슐 기계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머신 안쪽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띠— 입력 완료]

[타임스탬프 고정 확인 – 수신 예정 시각: 2025년 3월 15일 오전 10:45]

[캡슐 발송 카운트다운 시작]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두 번째 미래가 시작된다.”








#5 - “우연한 커피 한 잔”

정하윤은 회의실 앞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회의는 끝났고, 강시후는 수시통계파트로 인사이동이 확정된 상황. 그는 아직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때, 조용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정하윤 선임님.”


정하윤이 고개를 돌리자, 인턴 유성찬이 반듯한 셔츠 차림으로 서 있었다. 깍듯한 표정, 그러나 그 눈동자 어딘가엔… 낯선 냉기가 느껴졌다.


“시간 괜찮으세요? 사실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정하윤은 짧게 눈을 찌푸렸다.


“…업무 관련이야?”


“네, 뭐 그런 셈이죠.”


“그래, 그럼 잠깐.”


유성찬은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커피라도 한 잔 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

카페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한적한 오후, 카페 안엔 부드러운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유성찬이 라떼 두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커피를 밀어주며 말했다.


“선배님, 사실… 그날 고양이 말고도, 제가 본 게 하나 더 있어요.”


정하윤은 라떼 거품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뭐?”


유성찬은 라떼를 들며 천천히 말했다.


“그날, 시스템 조작 중에 누군가 계단실 쪽에 숨어 있었죠. 저는 누군진 몰랐지만… 짐작은 했습니다.”


정하윤의 눈빛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그게… 나라는 걸 언제부터 알았지?”


“일주일 전부터요. 선배가 제 뒤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도, 대강 파악했어요.”


정하윤은 커피를 내려놓고, 등받이에 기대며 물었다.


“근데 왜? 지금 이걸 왜 말하는데?”


유성찬은 아주 조용하게, 낮은 목소리로 속내를 드러냈다.


“선배는 금수저잖아요.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선배는 돈을 쫓을 이유가 없죠.”


정하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그래서, 저는 선배가 상무님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최소한, 제 편은 아닐지라도… 적은 아닐 거라고요.”


정하윤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차가운 웃음이었다.


“네가 날 믿는다는 거야?”


“아니요. 아직은 아닌 것 같네요.”


유성찬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왜 그 일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왜… 제가 직접 캡슐을 조작했는지.”


정하윤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커피잔을 비우며 유성찬은 말을 이었다.


“처음엔 그냥 지시를 따랐어요. 상무님이 저를 불러… 특정 메시지를 보내게 했고, 인증 권한도 임시로 넘겨주셨죠. 그걸로 강시후 선임을 걸려들게 만들었고요.”


“…….”


“그런데… 두 번째 캡슐은, 제 아이디어였습니다.”


정하윤의 손끝이 멈췄다.


“상무님도 모르세요. 제가 두 번째 당첨자로 선정되도록 시스템을 조작한 건, 제 계획이었거든요.”


그 말에 정하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성찬은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는… 상무님보다 더 멀리 보고 있어요. 이 회사를 뒤흔들, 더 큰 계획을 위해 준비 중이죠.”


“그런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정하윤의 질문에 유성찬은 정면을 바라봤다.


“상무님을 상대하려면… 혼자선 어렵습니다. 저는 협력자가 필요해요.”


“강시후가 아니라?”


유성찬의 표정에 미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강 선배는… 감정적이니까요. 판단이 흐려질 수 있죠. 반면 선배는… 이적적인 사람 같아서요. 냉정하게 움직일 줄 아는.”


정하윤은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재밌네. 너, 정말 위험한 애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근데 말이야. 너 진짜 조심해야 돼.”


“왜죠?”


“네가 계산한 대로만 세상이 돌아가지 않거든.”


유성찬은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자신감과 불안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정하윤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당분간은 서로 적도 동지도 아닌… 어정쩡한 팀 정도로 하자.”


“좋습니다. 저도 그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어요.”


카페 바깥으론 회색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다음 화 예고 – 5장. 상담원 로그인이 열어버린 금지된 기록]

저녁 7시, STAR그룹 옥상.

ChatGPT Image 2025년 3월 30일 오후 02_31_55.png


차가운 바람이 부는 시멘트 바닥 위, 강시후는 자판기 커피를 두 잔 들고 정하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상무가 날 불렀어.”


강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커피 캔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밤공기를 밀어냈다.


“나한테 이런 식으로 물었지. 시스템에 누가 접근했는지, 흔적은 없었는지.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그 눈빛, 분명히 의심하고 있었어.”


정하윤은 잠시 커피를 들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너한테만 그런 게 아냐.”


“…무슨 말이야?”


“오늘 낮에, 상무 조카가 나를 찾아왔어. 커피 한 잔 하자고 하더군.”


강시후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정하윤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를 뒤쫓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고양이 사건 때도 나를 봤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리고?”


“두 번째 캡슐 당첨, 그건… 상무의 지시가 아니었대. 자기 혼자 한 거래.”


강시후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빠르게 퍼즐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무는 아직 그걸 몰라. 조카가 따로 움직였다는 걸.”


“맞아. 그래서 더 위험해졌어. 상무는 조카가 보내온 10년 후 메시지를 보고, 오히려 네가 뭔가 더 꾸미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어.”


“…….”


“우린 지금 두 갈래의 공격을 받고 있는 거야. 상무와… 그 조카.”


잠시 침묵.


옥상에는 도시의 밤소리만 들렸다.


강시후가 입을 열었다.


“세 번째 캡슐.”


정하윤이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해. 그거, 우리가 먼저 열어봐야 해. 상무나 조카가 그 전에 또 뭔가를 하기 전에.”


정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우리가 선수를 치자.”


두 사람은 서로의 캔 커피를 들어 올렸다.

묵직한 침묵, 그리고 조용한 공감.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어두운 도시의 끝 어딘가,

아직 열리지 않은 세 번째 타임캡슐을 향하고 있었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4화3장. 금수저 동료,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