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이 되는 강시후의 운명은...
STAR그룹 본사 20층, 고위 임원회의실.
묵직한 정적 속에 긴 테이블을 둘러싼 인사들의 시선이 엇갈렸다. 창업자이자 현 회장인 ‘서정우’가 입국과 동시에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낸 건 1년 만이었다.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시스템 버그를 논의하려는 게 아닙니다.”
부회장 이강호가 입을 열었다.
“AI상담센터에서 벌어진 ‘타임캡슐 회신 오류 사건’. 회장님께서 설계하신 캡슐 시스템에서, 실제로 10년 후에 도착해야 할 메시지가 10분만에 돌아온 사건입니다. 그 안엔 회장님의 시스템 구조를 흔드는 치명적인 조작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런가…” 회장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설계한 시스템은 이론적으로 시간의 위조가 불가능한 구조에요. 그 기술은—”
이태석 상무가 말을 끊었다. 마치 회장을 보호하려는 척하며.
“회장님, 저희는 모두 회장님의 기술력에 의심을 갖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테이블 앞쪽에 놓인 문서를 들어 올렸다.
“이번 사건의 메시지에는 ‘From the Future’라는 입금자 이름과 함께 강시후 선임의 인증 서명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몇몇 이사들이 놀란 듯 시선을 주고받았다.
“저는 단지, 실무자의 실수나 오용 가능성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시스템 구조가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단지 누군가…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이 우려스러울 뿐입니다.”
말끝에 깔린 뉘앙스는 명확했다. 회장과 시스템은 건드리지 않되, 실무자인 강시후를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신호.
“회장님,” 부회장이 나섰다. “현재로선 강 선임의 시스템 접근 권한을 박탈하고, 조사에 협조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회장은 조용히 손을 깍지 낀 채 그들을 바라봤다.
이사회는 모두 숨죽이고 회장의 처분을 기다렸다.
“좋아. 수시통계파트로 인사 발령을 내도록 하지.”
마지막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엔, 짧고 날카로운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 시선은 부회장을 지나 이태석 상무에게로, 아주 조용히 향했다.
( 수시통계파트 - 회사의 타 부서나 팀에서, 이벤트 또는 마케팅 데이터나 정보를 요청을 받으면, 관련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통계 레포트를 제공하는 ai상담센터내 파트 )
정하윤은 인턴으로 들어온 신입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말투, 눈빛, 어디선가 본 듯한 감정 없는 태도.
‘이태석 상무의 조카.’
그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내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 한 장과, 내부 인트라넷의 채용 정보.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조합해낸 결론이었다.
그 후, 그는 인턴의 사무실 방문 빈도와 시스템 접속 기록을 은밀히 추적했다.
그리고, 오늘 밤.
정하윤은 타부서 요청을 핑계 삼아 AI센터 내부 시스템을 몰래 확인하던 인턴이 ‘루트 관리자 계정’으로 접속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 계정, 원래는 상무 전용인데.”
그 순간, 의문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 이태석 상무가 있다.
정하윤은 조용히 계단실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순간, 어깨에 부딪힌 의자 때문에 옆에 놓인 서류철이 바닥에 떨어지며 ‘텅’ 소리를 냈다.
딱.
인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방향을 향해,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정하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10미터.
5미터.
1미터…
그 순간, 철문 너머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오르며 ‘야옹!’ 하고 울었다.
“……고양이였나.”
인턴은 고양이를 보곤 고개를 돌렸지만, 그 직전— 정하윤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마치 무언가를 눈치챈 듯한, 아니면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자리로 돌아가 시스템에 집중했다.
정하윤은 땀에 젖은 셔츠를 부여잡은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건… 내가 반드시 배후를 찾아내겠어!’
“그래서 말입니다.”
부회장 이강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 이번 시스템 회귀 사건은, 실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스템의 설계 구조부터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마치 무심한 척, 그렇지만 속내는 노골적으로 회장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었다.
그 순간, 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이강호 부회장.”
짧지만 묵직한 목소리에 회의장 전체가 멈춰섰다.
“그 시스템을 처음 만든 나를 문제 삼는 것인가? 10년 전, 가장 가까운 사람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 만든 결과물인것을 모른단 말인가? 내겐, 기술 이전에… 그 시스템 안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언컨대, 시스템 자체는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사람이 어떻게 이용하느냐입니다.”
그는 시선을 이태석 상무에게로 옮겼다.
“강시후 선임은 조사에 협조할 것이에요. 하지만, 이번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지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는 종료되었다.
옥상. 여전히 바람은 차고, 도시의 소음은 멀게 느껴졌다.
정하윤이 캔 커피를 두 모금 더 들이켰다.
강시후는 한쪽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하윤아… 너 진짜 뭔가 알고 있는 거지? 너, 그날 회식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
정하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눈빛은 장난기 없이 차분했다.
“시후야. 너 인턴으로 들어온 애, 이상하다고 느꼈지?”
“응. 근데 왜?”
정하윤은 주머니에서 자신의 사내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고 조용히 화면을 넘기며 보여주었다.
“이태석 상무의 가족. 그 조카가 바로, 이 인턴이야.”
“…뭐?”
강시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름도 다르게 적어놨어. 외가 성 따르고, 입사도 추천 전형 아닌 일반 전형으로 위장됐더라고. 하지만 계정 접근 기록을 보면…”
정하윤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캡슐 관리자 시스템, 루트 권한 접근. 단 몇 번, 아주 짧게.”
강시후는 말없이 정하윤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연결돼 있단 말이야?”
정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루트 권한은 회장님, 상무, 너. 단 셋만 사용할 수 있어.”
“그런데 그 인턴이 썼다고? 어떻게?”
“상무가 권한을 위임한 거겠지. 일시적 서브 루트 생성. 내가 개발팀 서버 권한에서 그걸 찾아냈어.”
강시후는 들고 있던 커피 캔을 내려놓았다.
“그럼, 그날 김유진 고객한테 온 메시지… 그 입금과 경고 메시지… 그 모든 게 조작이라는 거야?”
정하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엔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오늘, 그 인턴이 캡슐 서버에 뭔가 입력하는 걸 직접 봤어.”
강시후는 숨을 삼켰다.
“그래서… 넌 왜 그걸 나한테 말하는데?”
정하윤은 조용히 웃었다.
“넌 믿을 수 있으니까.”
“…….”
“너와 나 아니면… 이걸 끝까지 파고들 수 있는 사람 없을 것 같아서.”
짧은 정적이 흘렀다.
강시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쪽 가슴이 묘하게 뭉치는 느낌.
오랜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는다’고 말해준 건.
“고마워,” 강시후는 작게 말했다. “근데 이건 진짜 위험한 일이야.”
“알아. 그래서 내가 움직이고 있는 거고, 너도 더 조심해야 해.”
정하윤은 캔을 마지막으로 비우고는, 태블릿을 접으며 말했다.
“이제 곧, 회장님이 직접 등장하실 거야. 상무는 그전에 널 흔들어 놓으려는 거고.”
강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 작은 다짐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음 화 예고 – 4장. 상무의 호출]
좌천된 강시후에게 예고 없이 상무의 호출이 들어온다.
“시후 씨, 오랜만이네요. 요즘은, 잠 좀 잘 잡니까?”
강시후는 아직 알지 못한다.
이 호출이, 또 하나의 퍼즐 조각을 맞추게 될 거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