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타임캡슐 오픈!
늦은 밤.
AI상담센터 내부, 대부분의 불은 꺼지고 있었다.
모니터 불빛 하나만이 조용히 깜빡이고 있는, 이질적인 정적 속에서 정하윤은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쥐었다.
“...분명, 이 경로였지.”
그는 수시통계 파트의 업무 지원을 핑계로, 직원 전용 관리자 계정에 접속했다.
지난번, 성찬이 조작에 사용했던 것으로 의심되는 로그 경로를 기억하며 루트 계정의 권한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폴더명: RECORD\_DELTA\_10Y]
눈앞의 폴더명은 마치 그 자체로 경고처럼 느껴졌다.
정하윤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클릭.
수백 개의 타임캡슐 메시지 기록,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 코드들,
무언가 삐뚤어진 듯한 데이터 값이 불규칙적으로 나열돼 있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단 하나의 이름.
[사용자: JIYOON.J | 최종 접근일: 4년 전 | 상태: UNKNOWN]
정하윤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윤 누나...?”
상태: UNKNOWN.
삭제가 아닌, 은닉.
그가 4년 동안 기다려온 단어였다.
정하윤은 숨을 삼키며 마우스를 다시 움직였다.
지윤의 캡슐 기록을 열자, 더 이상은 평온하지 않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다.
타임캡슐 메시지 발신 기록
내부 전력 이동 로그
위치 좌표 변조 이력
응답 실패 로그
관리자 접속 기록
그는 눈을 부릅뜨고 주석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메모 영역에서 두 개의 이름을 발견했다.
[접근자 로그: S.CHAN | 관리자 권한 발급자: T.LEE]
“성찬... 이태석 상무...”
순간, 머릿속이 복잡하게 요동쳤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아마도 누군가가... 일부러 보여준 흔적이었다.
누나의 기록은 감춰져 있었지만, 삭제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걸 이 시스템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던 사람은 단 두 명일 것이다 —
상무, 그리고 상무의 조카 성찬.
그리고 정하윤은 더 깊은 질문을 떠올렸다.
‘왜 성찬은 이걸 내게 보게 놔뒀지? 일부러...? 나를 끌어들이려는 건가?’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희망과 의심이 동시에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밤 7시, 옥상.]
정하윤은 자판기에서 뽑은 캔커피 두 개를 들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왔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도시의 불빛이 멀리 깜빡이고 있었다.
강시후는 이미 난간 근처에 서 있었다.
“요즘 자주 마신다, 이 커피.”
정하윤이 건넨 캔을 받아들며 강시후가 씁쓸하게 웃었다.
“네가 보낸 문자… 그거, 무슨 뜻이야?”
정하윤은 한 모금 마시며, 한동안 말없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후야. 나… 누나 기록을 찾았어. 4년 전 실종된 지윤 누나.”
강시후의 손이 순간 멈췄다.
“…진짜?”
“응. 금지된 폴더 안에서. 메시지, 위치 기록, 전송 오류 로그… 다 남아 있었어.
그리고 관리자 접근 로그. 이름이 적혀 있더라. 성찬. 상무 조카.”
강시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성찬이… 일부러 보여준 거야. 널 끌어들이려는 의도.”
“그걸… 어떻게 알아?”
“느낌이 왔어. 아니, 직감에 가까워.
처음부터 자연스러웠어. 금수저 너에게 접촉할 이유도, 시점도… 너무 딱 들어맞잖아.”
정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난 그 순간 고마웠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
그걸… 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런가?... 하윤아.
성찬을 너무 믿지 않는 것이 좋겠어. 그냥... 널 이용하려고 할 수 있으니까.”
“…….”
“내 생각은 이래. 너는 돈이 목적이 아니니까. 자기 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지.”
정하윤은 복잡한 표정으로 강시후를 바라봤다.
“그럼… 넌 어떻게 할 거야?”
"나?…"
캔커피를 반쯤 비운 강시후는 옥상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고요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하윤의 질문을 받고, 시후는 잠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때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후는 생각이 나는대로 하윤에게 모두 이야기를 해주었다.
강시후는 지각이 일상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늦잠을 자고, 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교문을 향해 걸어가던 길이었다.
“시후야, 또 늦었구나.”
교감 선생님이 익숙한 미소로 말을 건넸다.
“오늘은 알람이 울리긴 했는데요… 아침 햇살이 너무 예뻐서요.”
“응?”
“창밖 보는데, 하늘이 막 연보라색이랑 연노랑이 섞인 거예요. 마치 수채화처럼요.”
교감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시후는 핑계도 시적이구나.”
“그럼요. 저, 언젠가 교감 선생님 시를 책으로 낼 때, 표지 디자인 제가 담당할게요!”
“하하하, 이 녀석. 넌 정말 특이한 아이야.”
지각을 해도 야단치는 대신, 그렇게 대화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날도 역시, 그런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아이 하나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작고 단정한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교감 선생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시후를 향해 돌아섰다.
“형도 안녕하세요.”
“…어? 아, 안녕?”
시후는 잠시 당황하다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의 눈빛은 낯설게 맑았다. 어느 초등학생보다도 조용한 자신감을 가진 듯한.
며칠 뒤, 또다시 늦게 등교하던 날.
그 아이는 등굣길에 시후에게 작고 먹음직스런 빨간 사과 하나를 건넸다.
“이거… 나 주는 거야?”
“응. 형, 착하니까요.”
“……고마워.”
그날 이후,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진 시후는 교감 선생님께 물었다.
“그 1학년 친구요, 요즘 안 보여요.”
“아, 그 아이. 전학 갔단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작은삼촌이 키우는데 서울 본사 쪽으로 이사 가셨다고 하더구나.”
“…이름이 뭐였더라.”
그 순간까지 기억이 뿌옇게 떠올랐지만, 어릴 적 특유의 무심함에 묻혔던 이름.
불현듯 그 아이 이름이 스치듯 떠올랐다.
[밤 7시, 옥상.]
“성…찬 그 아이, 성찬이었어.”
시후의 말에 정하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응. 붉은 사과, 조용한 눈빛, 그 인사. 나한테 처음으로 ‘착하다’는 말을 해준 아이.”
시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상하지… 그런 애가, 지금 날 없애려는 쪽에 서 있다는 게.”
“…….”
“그땐 날 형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제거 대상이라니.”
정하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시후는 다시 난간에 팔꿈치를 얹고,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야근, 밤 10시 – 강시후 & 정하윤]
이들은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있었다.
모두가 퇴근하기를 기다린 고의적인 야근이었다.
강시후는 움직임을 멈춘 채, 화면을 들여다보며 숨을 삼켰다.
“찾았어… 세 번째 캡슐.”
그는 정하윤에게 조용히 화면을 보여주었다.
정하윤은 눈을 좁히며 읽어내려갔다.
잠시 뒤,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건… 성찬이 직접 보낸 캡슐 메시지?”
“정확히는, 누군가가 실제 ‘타임머신 기기’를 사용해서 보낸 메시지야.
단순한 웹 인터페이스나 가상 전송이 아니야. 물리적인 흔적이 시스템에 남았어.”
정하윤은 숨을 삼켰다.
그의 눈에 불안과 기대,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이걸 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후는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지만, 이내 결연한 빛을 띠었다.
“모르지.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먼저 열어야 해.
이 판을 만든 건 성찬이지만, 그 위에서 어떻게 움직일지는 우리 몫이니까.”
그는 마우스를 인증 버튼 위에 올렸다.
짧은 정적.
그리고—
클릭.
짧은 진동과 함께, 3번 캡슐의 메시지가 열렸다.
잔잔한 알림음과 함께, 화면이 펼쳐졌다.
[세 번째 캡슐 메시지 – 내용 요약]
“이 캡슐을 연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과거를 바꿀 자격이 있는가?”
발신자: 없음
인증키: S.CHAN ID-Ω-3
첨부 파일 목록:
2025년 AI상담센터 내부 보고서 (비공개)
STAR그룹 이사회 회의록 발췌본 (2026년)
‘정지윤 실종 사건’ 수사자료 (2021년, 미공개 기록)
정하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윤 누나…”
그의 입술이 굳게 다물리고,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강시후는 조용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윤아. 네가 찾아온 그 답, 이 안에 있어.”
정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세 번째 첨부파일을 클릭했다.
화면에 나타난 건,
STAR그룹 비인가 실험실의 내부 출입 기록과 CCTV 영상.
그녀였다. 정지윤.
캡슐 발신일 하루 전, 연구소에 들어가는 모습.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두 사람—성찬, 그리고 이태석 상무.
정하윤은 눈을 감았다.
뭔가, 안에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실타래를 붙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누나는…”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몰라.
강시후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거야.
이 자료들… 우리가 ‘우연히’ 찾은 게 아니야.”
정하윤이 고개를 들었다.
“성찬이… 일부러 남긴 거라는 거야?”
“응.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것이 아닐까?
이건 ‘그가 만든 게임’으로의 초대장같아.”
[세 번째 캡슐의 진짜 의도]
강시후는 다시 인증 로그를 꺼내 확인했다.
로그 마지막 줄.
[로그 접근 권한: 강시후, 정하윤 – 인증 허가: 성찬]
“봐. 성찬은 우리 둘에게만 이 캡슐을 허용했어.”
정하윤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이건 경고가 아니라, 선택을 요구하는 거네.”
“그래. 판 위에 올라오라는 거지.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묻는 거야.”
정하윤은 주먹을 꼭 쥐었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한 마디.
“이제… 나도 진짜 알아야겠어.
누나에 대해, 그리고 성찬이라는 놈에 대해.”
강시후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윤아, 너는 누나를 위해서 이 싸움에 뛰어든 거잖아.
나도… 이제 이유를 찾았어.”
“…뭔데?”
“그 애가… 성찬이.
그 빨간 사과를 내밀던 꼬마가,
지금은 STAR 그룹 사람들의 미래를 주무르려 하고 있어.
…그래서, 지켜만 볼 순 없잖아.
이제는, 우리의 미래를 지켜야 할 차례같아.”
[AI상담센터 – 심야, 보안실 서버룸 근처]
모든 사무실 불이 꺼진 시간.
남은 불빛은 서버 룸 안의 모니터, 그리고 그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눈동자뿐이었다.
정하윤과 강시후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게… 성찬이 남긴 숨겨진 경로야.”
시후는 낮은 목소리로 태블릿을 조작하며 말했다.
“루트 관리 콘솔과는 별개의 시간 조작 로그. 캡슐 송수신 일정을 일시적으로 조정할 수 있어.”
정하윤은 화면을 들여다보며 손을 떨었다.
“그럼… 우리가 직접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거야?”
“응. 단, ‘정지윤’이라는 사용자 이름으로 과거에 등록된 유일한 캡슐로만.
…발신 시점은 4년 전, 실종 이틀 전.”
정하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메시지는 내가 쓸게.”
그는 키보드를 앞에 두고 앉았다. 잠시 침묵.
두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렸다.
명절날 초콜릿을 나눠주며 웃던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손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임캡슐 발신 메시지]
받는 사람: 정지윤
수신 시점: 4년 전 – 실종 이틀 전
보낸 사람: 정하윤
지윤 누나.
당신이 이걸 보고 있다면…
제발 살아 있다는 신호를 보내줘.
이건 장난이 아니야.
캡슐 시스템이 조작됐고, 당신의 기록이 지워졌어.
누군가 일부러 누나를 지우려 했어.
그리고 지금도, 같은 시스템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어.
나는 시후와 함께 이 진실을 쫓고 있어.
누나를 반드시 찾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줘.
회신해줘.
그게 단 하나의 희망이야.
정하윤의 손이 떨렸다.
“시후야… 보내도 될까?”
강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올려 캡슐 발신 버튼을 눌렀다.
짧은 진동음이 울렸다.
� [타임캡슐 전송 완료]
화면엔 단 하나의 메시지만 남았다.
캡슐 수신 대기 – 24시간 후 자동 회신 감지
정하윤은 모니터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강시후는 조용히 그 옆에 앉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세 번째 캡슐에 ‘희망’을 담아 과거로 흘려보냈다.
그것은 단순한 회신이 아닌,
시간과 기억을 되돌리는 첫 번째 시도였다.
그리고, 그 답장이 도착하면—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 6장 예고편 - 17년 전, 어느 따뜻한 봄날 ]
초등학교 1학년 성찬은 작고 빨간 사과를 들고 있었다.
아침 등굣길에 만난 시후 형에게 주려고.
형은 지각생이었지만, 늘 여유로웠고, 따뜻했다.
성찬은 생각했다.
‘시후 형이… 내 진짜 형이었으면 좋겠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다시 형을 만날 수 있길 바라며 눈을 감았을 때—
옆방에서 삼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찬아, 안 자면 이리 오너라. 잠깐 이야기 좀 하자꾸나.”
성찬은 작은 발소리로 방을 건넜다.
삼촌은 STAR그룹의 중역.
지방 지사에서 일하다,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서울 본사 복귀를 앞두고 있었다.
“이젠, 서울에서 살아야겠구나.”
그 말이 끝났을 때, 성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떠난다는 사실보다—
형에게 작별 인사조차 못 할 거라는 게 더 두려웠다.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형이 자신을 외면하는 꿈.
삼촌이 어딘가로 자신을 끌고 가는데도,
시후 형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성찬은 꿈속에서 울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형을 미워할 거야.’ 그래야, 쉽게 잊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