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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나더씽킹 Jul 23. 2021

정이 들어서

"엄마, 자가 부러졌어. 어떡해?"

아이 목소리에 실망감이 잔뜩 묻었다. 

어떤 건지 어떻게 부러졌는지 묘사를 들은 나는 상태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이고, 새로 사야겠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산 짧은 자였다. 완전 두 동강이 났다고 했다. 보나 마나 재사용하긴 어렵겠다 싶었다. 

"안돼, 정들었던 말이야."



아이는 정이 자주 든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모든 사물에 정이 든다. 함께 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게 깊게. 아주 어렸을 때는 한 달에 한번 오시는 정수기 관리하는 분한테까지 정이 들곤 했다. 어느 달인가 다른 분이 오시자 아이는 굉장히 실망했었다.(그래 놓고는 새로 온 분에게 또 정을 쌓는다. ^^)


자 상태를 보니 도대체 어떻게 썼나 싶을 정도였다. 표면이 닳고 닳아서 울퉁불퉁, 도무지 자를 대고 일직선을 그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5년을 썼으니 대단하다 싶다. 

자뿐만이 아니다. 필통도 가위도 초등학교 입학할 때 샀던 것들이다. 연필 같은 소모되는 필기구만 교체가 됐을 뿐이다. 연필도 몽당연필이 어찌나 많은지. 홀더를 끼워도 너무 작아서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학년이 올라가 필기구가 많아지면서 작아진 필통을 나는 몇 번이나 새로 사주겠다고 했었다. 아이는 멀쩡하다며 필요 없다고 했다. 나는 안다. 필통이 망가져도 아이는 어떻게든 고쳐 쓰고 싶을 것이란 것을.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방학을 앞둔 어느 날, 아이는 울먹이면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하는 말이, "엄마, 나 필통 잃어버렸어. 분명히 잘 챙겨 넣은 것 같은데 아무리 뒤져봐도 없어."

아이 목소리가 너무 간절해서 차를 출발하지 못하고 여전히 가방을 뒤지고 있는 아이를 기다려주었다. 결국 아이는 다시 찾아보겠다며 학교로 달려갔고 10여분이 채 지나기 전에 돌아왔다. 멀리서 걸어오는 세상 다 가진 표정을 한 아이 얼굴을 보니 '찾았구나' 싶었다. 그게 뭐라고, 저렇게도 좋을까. 심하게 망가지지 않는 한 평생을 함께 할 분위기다. 


새 것에 대한 욕망이 없는 아이, 쓰던 것, 오래된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강한 아이. 이런 이유로 우리 집에선 아이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 뭔가 하나를 버리기 위해서는 아이가 '마음먹을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마음 정리가 안 되는 것들은 몇 달 유예기간을 주거나 갖고 있기로 한다. 아이 책장에 아직도 유아기 때 보던 책들이 적잖이 남아있는 이유다. 책만큼은 새책에 대한 욕심이 많다 보니 제한된 책장은 늘 터질 지경. 그렇다고 모든 책을 다 가지고 있을 수는 없어서 우리가 낸 묘수는 '꼭 갖고 있고 싶은 몇 권'을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새 책이 들어오는 만큼 중고책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눈으로 보는 아이는 며칠을 고민하며 '소장용 책'을 선별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을 함께 할 때 나는 정말로 행복하다. 아이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그 책들을 샀던 때, 함께 읽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단순한 책 하나가 아닌 우리의 추억과 아름답게 이별하는 의식을 치르는 기분이 든다. 



어제 아이와 함께 다큐멘터리 '미니멀리즘'을 보았다.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았지만 행복하지 않다고 여겼던 이들이 물건을 버리고 비우기 시작하면서 깨닫게 되는 풍요로운 삶,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사례 중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도 등장해 완전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우리가 정말로 너무 많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주객이 전도된 채 살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큐멘터리를 보기 직전 아프리카에 버려진 헌 옷으로 만들어진 강, 그 위에서 풀 대신 합성섬유를 뜯고 있는 소들의 이야기를 '아빠의 추천 영상'으로 나와 함께 시청했던 아이는 다큐를 보다가 말했다. 

"엄마, 그런데 물건을 버리는 건 너무 어려워. 다 정이 들었잖아."

"맞아. 쉽지 않지. 우리의 추억이나 기억이 담겨 있으니까. 대신 우리는 새로 사는 것을 최소화하면 될 것 같아. 그게 꼭 필요한지 생각해보고 불필요한 소비는 하지 말아야지."

진심이었다. 검소하고 중고 물품에 열광하는 독일 사람들의 삶을 옆에서 본 탓인지 나의 소비는 한국에 살던 때와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다. 최대한 있는 것을 활용하고 새 것을 사기 전엔 정말 몇 번을 고민하는지 모른다. 

"엄마, 그래도 나 옷은 좀 사야 할 것 같아. 이제 다 너무 작아졌어."

갑자기 커진 몸 때문에 옷들이 작아져 내 반바지를 입고 있던 아이가 하는 그 말이 어찌나 웃기던지. 

"하하, 그래. 네가 많이 커서 옷이 좀 많이 작지. 그래, 그런 건 사야 하는 거야. 걱정 마!"


아참, 부러진 자는 테이프로 칭칭 감아 응급처치를 했다. 도저히 버릴 수 없다고 한 아이를 위해서인 것도 있고 새 제품을 사기 위해서인 것도 있다. 버리지 않고 갖고 있어도 된다고 하니 그제야 실토하는 아이.

"사실 선 긋기가 좀 힘들긴 했었어."


굉장히 오랜만에 하는 인사, 

오늘도 굿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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