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리가 가을을 지켰어요."

by 느린 발걸음

가을이다.

한낮엔 아직 더울 때도 있지만, 그 시간만 지나면 선선한 공기가 느껴지고 새벽엔 싸늘하기까지 하다.

더워서 헉헉대며 에어컨 바람에 지탱하던 여름이 서서히 가을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더위도, 여름도 계절의 흐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미세먼지도 좋아서 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시원이 바람이 나를 살짝살짝 스쳐가는 게 기분 좋다.


가을이 찾아왔음을 하늘을 보며 다시 한번 느낀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파란 물감을 흩뿌려놓은 듯한 청량함이 느껴지는 하늘만이 간직한 색.

거기에 솜털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실제로는 엄청 무겁지만) 하얀 뭉게구름까지.

이런 환상적인 조화를 가을은 매 순간 보여준다.

선선해진 가을 공기를 느끼며 걷다가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면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계절.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가을을 좋아한다.


그런데 어렸을 때보다 확실히 가을이 짧아졌음을 느낀다.

엄청 더웠다가 이제 조금 시원함을 만끽하나 싶은데 어느새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이 성큼 다가온다.

그게 못내 아쉽다. 나는 덥고 추운 것보다는 선선한 날씨를 좋아하기에.

가을에만 입을 수 있는 옷들을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겨울을 맞이하는 것도 슬프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가을 옷은 잘 사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봄, 가을의 기간이 짧아질수록 아쉬운 마음 한편 미안한 마음도 크다.

그만큼 지구를 아프게 했다는 증거니까.


지구가 아프다고 여기저기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매년 역대급 폭염, 추위, 홍수, 태풍, 가뭄, 산불 등의 얘기가 들린 지 꽤 됐다.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도 지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사계절을 제대로 즐길 수 있던 나라에서 봄과 가을은 잠시 스쳐가는 계절이 된 듯하다.

나는 어른이어서 그걸 제대로 실감하는데 가끔 두 아들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아직 10년도 채 살지 않은 아이들이 뭘 제대로 알까 싶은데, 학교에서 배워서 알게 된 거였다.


두 아들은 이야기한다.

지구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봄, 가을이 사라질 거라면서.

그래서 사용하지 않는 콘센트는 다 뽑고, 사용하지 않는 전등도 끄고, 가끔은 일찍 소등하기도 하고, 쓰레기를 되도록 배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려고 한다.

이런 노력들이 조금씩 더해지면 지구가 덜 아파하지 않겠냐면서.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 어른으로서 미안해진다.

어른들이 벌여놓은 일을 아이들이 수습해야 하는 게.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려고 노력한다.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에어컨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던 날씨에서 이젠 에어컨 없이도 견딜 수 있는 날씨로 조금씩 변해갈 때.

그래도 한낮엔 너무 더워서 반팔, 반바지를 입고 하교하던 초등학교 1학년 둘째 아들과 집에 올 때였다.

너무 덥다고 느껴지지 않고, 온몸을 휘감던 습함도 느껴지지 않던 날씨.

높고 높은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던 날.

아주 조금은 시원한 공기가 느껴지던 날이었다.

나도 모르게 기분 좋아서 둘째 아들에게 이야기했다.

"이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나 봐요. 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해요. 하늘도 너무 예쁘고요."

"맞아요. 엄마. 이젠 그렇게까지 덥지 않네요. 다행이에요. 엄마, 우리가 가을을 지켰어요."

이쁜 목소리로 나를 쳐다보며 싱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아이도, 가을을 지켰다는 말도 너무 이뻤다.

한편 미안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가을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주는 것 같아서.


"그래요, 우리가 가을을 지켰네요. 앞으로도 계속 가을을 지켜나가야겠어요."

"맞아요. 엄마, 우리 계속 가을을 지켜요. 엄마, 이런 날씨 좋아하잖아요."

"그래요. 엄마는 이런 날씨 좋아하죠."

아이의 따스한 말과 마음에 나도 따스해진 하루였다.

가을을 지키는 것, 우리 모두 함께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나는 지금 이 가을을 오래도록 보고 싶고, 아이들에게도 오래 보여주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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