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의 농도
오늘도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에게 건넨다. 할 수 있는 한은 더 자주, 더 많이 하고 말 거란 걸 안다. 나는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여태의 그 어떤 사랑보다, 지금 이 순간 더 많이 사랑하고 있으니까.
- 좋아한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해진 것 같아. 사랑하나 봐.
- 벌써?
우르르르. 사랑으로 붉게 물드는 노을 진 배경이 SF영화의 한 장면처럼 산산조각 나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났다. 분명히 그랬다.
인간이란 동물은 멀쩡히 똑똑하게 굴다가도, 꼭, 가끔 그렇게 둔해질 때가 있는가 보다. 혹시 작은따옴표를 잘못 쓴 건가 싶게 만드는 저 질문에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멍한 나를 보며 그가 뒤늦게 달래 보려 애썼지만 내 마음이 부정당한 것 같아, 울적한 기분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이미 그의 것과는 크기가 다른 내 감정의 덩어리가 그의 또랑또랑한 눈을 마주할 때마다 커지고 말 것을 알아서, 하루 종일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덜 바라보는 편이 나았다. 그날 이후로도 며칠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게 되는 순간들에 마음을 움켜쥐고, 큰 숨을 내 쉬어야 했다. 이럴 거면 그렇게 사랑스럽지나 말던가. 별스러운 원망까지 생겼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조금 ‘덜’ 사랑하고자 하는 일은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고, 또 슬픈 일이기도 했다.
다소 조심스러워지고 표현이 적어진 나를 그가 알아채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내 두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실로 오랜만에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눈치도 없이 내 심장은 또 쿵 하고 내려앉는다. 바보 같은 소릴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로 시작된 그의 말엔 진심이 있었고 거짓은 없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사랑' 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너무 크고 무거운 것이어서 그저 자신에게는 조금 이른 것 같을 뿐이라고. 속도가 조금 다른 거라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으니 먼저 가서 조금 기다려주면 금방 갈게, 하는 그의 말에, 나는 충분히 위로받고 설득당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딘가에 숨겨두기엔 너무 커버린 내 것의 마음들은 어느 때고 불쑥불쑥 비집고 나와, 당장이라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을 수없이 마주했다.
- 있잖아, 듣기만 하는 것도 안되나? 나도 듣고 싶다는 욕심 안 나. 그냥 좋아하기만 하기 너무 힘들어- 나는 이렇게 많이 사랑하는데. 사랑해.
전혀 수줍지 않은, 엉뚱한 고백을 받은 그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이마와 볼과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리곤 마치 나도 그렇다고 말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 조금 슬픈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괜찮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조금도 서럽거나, 외롭지 않았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고 있지만, 그 보다 더 강하게 그의 진심을 느끼고 있었다.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저녁식사 후에 둘이 손 잡고 그의 집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오는 가벼운 산책을 즐긴다. 매미 소리가 너무 시끄럽던 어느 한 여름밤의 산책 후, 옆 건물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으로 눈, 코, 입 위치만 겨우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어두운 방 안. 그 사람의 팔을 베고, 얼굴을 마주하고 누워 도란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결국 그 말이 새어 나오듯 내 귀에 닿았을 때, 나는 적어도 그 순간 세상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다. 진짜 다 가져버린 걸지도 모르겠다.